소설리스트

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176화 (176/281)

◈176화. 3. 대마법사와 악녀 메이커 (15)

입을 살짝 벌린 나는 혼란스러운 시선으로 부채와 악녀 언니의 치마 끝을 번갈아 보았다.

‘……이건 또 무슨 황당한 시추에이션이야?!’

의도치 않은 여주인공 역할은 두 번째 이야기로 족하다고!

나는 속으로 왁왁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내 격렬한 욕설에도 요정은 대꾸가 없었다.

그저 익숙한 띠리링 소리와 함께 커다란 창이 떠올랐을 뿐이다.

[서브 퀘스트가 도착했어요! ˚✧ ҉ ٩(๑>ω<๑)۶ ҉✧༚! ]

[퀘스트(서브)- ‘내가 바로 악녀의 계승자!’

커다란 구멍이 뻥 뚫려버린 세 번째 소설을 살릴 방도를 찾아낸 당신!

대단합니다! 이제 세 번째 소설의 주인공이 되어봅시다!

다만, 주인공이 되기엔 아직 ‘자질’이 부족한 당신! (。>﹏<。)

마침 눈앞에 제대로 된 스승이 있군요?

스승에게 배워봅시다!

내용: ‘조연(공녀)’의 소원을 들어주고 악녀의 자질 배우기, 악독함 100 달성! (0/100)

실패 시, 건강 수치 -40

기한: 20일

보상: 건강 수치 +3, 세 번째 이야기의 든든한 조력자, 히든 피스]

뭐야, 이 황당한 퀘스트는?

‘뭔데, 뭐냐고. 야! 내가 자질이 부족하면 제대로 된 사람을 주인공 삼으면 될 거 아니야?’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내용으로 보아, 눈앞에 있는 이 공녀 언니는 악녀의 스승으로 삼기에 딱 좋을 만큼 제대로 된 악녀였다.

그러면 나 말고 그냥 저 사람을 주인공으로 만들면 되잖아?

야, 요정, 듣고 있냐? 야! 눈이 엉덩이에 달렸냐!

[주인공 ‘악녀’는 후보 중 가장 적합한 사람이 선택되었어요! (⸝⸝⸝ᵒ̴̶̷̥́ ⌑ ᵒ̴̶̷̣̥̀⸝⸝⸝) 요정은 억울해요!]

어디서 순진한 척이야?

[요정은 주인공님을 위해 조언해요! 세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은 빙의자 님이 맡지 않으면 헤쳐나갈 수 없어요! ]

나는 더는 이 말도 안 되는 소리에 대꾸할 수 없었다.

“에스테 영애?”

눈앞에서 실시간으로 이 공녀 언니가 고개를 갸웃하고 있었으니까.

표독스러우면서도 우아하기 짝이 없는 눈. 웃고 있지만 몹시 살벌하게 느껴졌다.

‘그래, 스승. 스승님 좋은데 말이지…….’

요정, 댁이 정해준 스승님이 나를 제자로 받아줄 생각은커녕 나한테 좀 빡치신 것 같은데?

슬쩍 식은땀이 삐질 흘렀다.

‘추측하자면 아무래도 내가 이사야 후작과의 일을 본 게 아닌가 의심하는 것 같은데.’

억울했다. 아니, 대체 내 머리 장식에 붙은 나뭇잎만으로 어떻게 그걸 알아차린단 말인가?

그보다 라이칸은 함께 있었으면서 혹시 봤으면 좀 떼주지……!

그의 탓도 아니건만 괜히 한번 원망해보았다.

“영애 앞에 내 부채가 떨어진 것 같은데 보고만 있을 건가요?”

리제가 새하얘진 낯으로 벌떡 일어서려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Q. 요정이 내 스승으로 모시라고 시킨 참된 악녀 언니가 제게 시비를 걸어요. 어떡하면 좋을까요?

A. 일단 침착하게 비굴해지자.

“음, 으음, 이걸 제가 주워드리면 될까요, 언니?”

“……언니?”

나는 누구보다 잽싸게 부채를 주워 공녀에게 내밀었다. 동시에 한껏 방싯방싯 웃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 미소가 무엇이냐, 왕년에 대륙을 호령하신 정복대왕 황제님도 반했던 미소라 이거지.

이미 3살 아기님 앞에서도 비굴하게 엎드렸던 기억이 충만한 무릎은 아주 쉽게 움직였다.

“영애에게 그런 호칭을 허락한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앗, 죄송해요. 제가 북부에서 온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아서…….”

무릎뿐일까. 입술도 기름 술술 칠한 것처럼 잘도 움직였다.

‘그래, 어쨌거나 이 언니랑 가까워져야 한다 이 말이지.’

그럼 제대로 해야지, 어떡해.

“제가 북부에서 어떤 멋진 분과 가까이 지냈었는데, 그때의 태도와 잠시 헷갈린 탓이에요. 다시 한번 죄송해요.”

나는 손을 입술로 가져다 대고 슬쩍 눈을 내리깔았다.

“그분이 공녀님처럼 정말 키도 크시고 멋진 여성분이셔서 저도 모르게 그만…….”

래빗이 이르길 나는 이런 표정을 하면 정말로 갓 태어난 토끼 같다나 어쩐다나.

과연 공녀님의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아래에서 보니까, 휴고와 눈동자 색이 비슷해서일까? 어쩐지 휴고가 진지할 때의 얼굴과 비슷한 느낌이 나기도 했다.

“무례를 용서해주세요. 공녀님.”

내 긴 속눈썹이 팔랑 움직였다.

“그렇게 말한다면 달리 책 잡을 순 없겠네요, 영애.”

상황을 넘어가려는 말에 나는 일어나는 대신 슬그머니 공녀님을 빤히 쳐다봤다.

비굴한 건 비굴한 거고, 이왕 이렇게 된 거.

“저, 공녀님 혹시 실례되는 이야기가 아니라면 제가 조금 전에 후원에서 산책을 하면서 공녀님을 뵌 것 같은데…….”

“뭐라고요, 에스테 영애?”

대화할 계기를 만들어 보자고.

‘아까 나한테 갑작스럽게 시비를 건 게 분명 잎사귀를 본 뒤부터였지?’

눈을 깜빡이면서, ‘저기 언니, 저랑 할 얘기 없으세요?’ 하는 시선을 보냈더니 곧바로 신호가 왔다. 눈앞으로 이 공녀 언니의 새하얀 손이 뻗어진 것이다.

“바닥이 차요, 일어나는 게 좋겠어요.”

배려하는 듯하면서도 미묘하게 강압적인 말투. 나는 기분이 나빠지기는커녕 조금 흥미로워졌다.

어딜 보아도 이 언니, 로판 사이다물의 주인공 같아 보이는데 말이지.

‘왜 이런 사람을 두고 내가 주인공으로 선택된 거지?’

거기다 그녀를 스승으로 모시다니, 이런 전개는 생각도 못 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가늘고 얇은 팔의 이미지와 다르게 공녀는 의외로 쉽게 나를 일으켜 세웠다.

오히려 이 공녀 언니가 더 놀란 낯이었다.

“……영애, 실례지만 사람이 이렇게 가벼워도 되나요?”

“네?”

공녀 언니가 우아하게 고개를 내젓더니 부채를 톡톡 털고는, 나를 한번 훑어내렸다.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당하면서도 불쾌감조차 느끼지 못했다.

연회장에는 여전히 음악 소리와 사람들의 말소리로 북적거렸다.

그러나 귓가로 들려오는 속삭임은 몹시도 선명했다.

“달린 에스테 영애, 우리 이야기 좀 할까? 내 저택에서 말이야.”

공녀 언니는 이렇게 속삭이고는 떨어졌다.

부채로 살짝 가려진 얼굴 위로 눈이 유혹하듯 사르르 휘었다.

그렇지만 눈동자 속에 담긴 것은 경계와 사나움이었다.

‘와, 잘못하면 콱 물릴 것 같은 시선이네.’

나는 싱글싱글 웃으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요정의 팁! ‘조연(공녀)’의 주인공 탈락 사유를 알려드려요.]

[※정보: 해당 인물은 대마법사 ‘발데르’를 죽일 듯이 미워함]

생글생글 웃던 얼굴에 금이 가는 게 느껴졌다.

아니, 이건 또 뭔 소리야?

‘그러니까, 자질은 적합한데 하필 발데르 그 남자랑 로맨스는 꿈도 못 꿀만큼 미워한다는 소린가?’

요정이 굳이 이렇게 팁이랍시고 주는 걸 봐서는 보통의 원한이 아닌 모양이었다.

‘허어, 이 세 번째 이야기도 쉽진 않겠네.’

벌써부터 이런 상황에 대체 메인 퀘스트는 어떤 걸 던져줄지 예상도 가지 않았다.

‘아우, 북부에서 고생했던 걸 생각하면 아직도 어깨가 떨리는데, 제발 몸이라도 편안했으면 좋겠다.’

뼈 삭겠다. 뼈 삭겠어.

* * *

달린이 연회장 한쪽에서 숨을 겨우 돌리는 사이,

같은 시간 어느 한 곳에서 몰래 그녀를 지켜보는 시선이 있었다.

연회장 벽 한쪽, 기둥 그림자가 짙게 든 곳.

이곳을 찾는 인원은 대개 둘로 나뉘었다.

하나는 은밀한 곳이나 테라스를 찾아 움직이는 연인들, 혹은 하룻밤을 위해 마땅한 공간을 찾아 헤매는 남녀.

다른 하나는 편안한 휴식을 위해 잠시 숨돌리러 온 사람.

그러나 여기 서 있는 남자는 둘 중 어느 쪽도 아니었다.

단단한 체격. 하필 보통 사람과는 구분이 되는 커다란 덩치를 가진 남자가 기둥 그림자를 점거한 탓에, 남자를 보고서 슬금슬금 물러나는 이들도 속출했다.

옆에서 남자를 지켜보던 또 다른 남자, 제타르가 한숨을 푹 쉬었다.

“……저, 대공님.”

제타르뿐만이 아니었다. 남자를 모시기 위해 함께 나선 부관도 제타르와 비슷한 시선으로 한숨을 꾹 참았다.

제타르와 다르게 부관은 좀 더 진솔하게 말했다.

“그냥 다가가서 말을 거시죠?”

근처에 있던 북부의 기사들이 움찔하며 부관을 쳐다봤다.

그러고는 슬그머니 제 주인을 보았다.

그랬다. 달린을 멀리서 지켜보는 사람은 다름 아닌 북부의 주인, 휴고였다.

“아 정말! 그냥 가서 말 거시란 겁니다! 뭐, 막말로 대공비님과 안 좋게 헤어진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함께한 부관은 북부 사람 중에서도 조금 불같은 성격과 추진력을 가진 이였다.

거기다 북부에서 있던 여러 사건으로 달린의 열렬한 추종자가 된 사람 중 하나였다.

“크흠, 부관. 마음은 이해하지만, 영애께선 더는 대공비님이 아니시다만.”

“내 마음에선 저분만이 대공비님이요! 크흠, 목소리는 낮췄지 않습니까.”

특무대 대표로 함께한 제타르의 눈치를 보며, 부관이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그랬다. 오늘 추수제에는 북부의 인사들도 참여했다.

심지어 올해 초 북부에서는 일찍이 추수제 불참을 선언했으나, 이를 뒤집고 참여한 것이었다.

이유는 하나였다.

북부인들의 눈이 한 사람을 향했다.

휴고는 이제나 저제나 한 곳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연회가 시작한 지 2시간째, 요지부동이기도 했다.

“……거, 대공 전하. 그냥 말 거시라니까요?”

그 말에 줄곧 달린 쪽만 쳐다보던 휴고가 움찔하더니, 슬그머니 어깨를 내렸다.

아니, 꼬리 말린 거대한 강아지인 양 추욱 처졌다.

“……싫어하면 어떡해.”

주인의 시무룩한 모습에 주변 북부인들이 어쩔 줄 몰라했다.

이제 주인이 일으키던 무시무시한 발작 현상은 사라졌지만, 오랫동안 주인의 뒤틀린 심기를 어떻게든 되돌리고자 노력하던 버릇이 어디 가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것이 아니더라도 주인의 상태는 심히 신경이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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