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177화 (177/281)

◈177화. 3. 대마법사와 악녀 메이커 (16)

그도 그럴 것이 현재 휴고의 모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수척했고 힘이 없었다.

사실 워낙 빼어난 얼굴인 탓에 살이 살짝 빠진 낯은 더욱 날카롭고 차갑다 못해 지적으로 보였지만, 본인은 자신이 어떻게 보이든 신경 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오히려 주인 잃은 강아지처럼, 아니 주인을 발견했지만 철창에 가로막히기라도 한 것처럼 주인이 떠난 방향을 멍하니 보기 바쁠 뿐.

북부 기사들이 저마다 다른 자세로 끙, 숨을 삼켰다.

“……크흠, 저, 대공님. 저도 부관과 같은 생각입니다만, 인사 정도는 드려도 되지 않을까요?”

지켜보던 제타르마저도 어느새 감화되어 슬그머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휴고의 귀에는 이들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제타르.”

“예, 대공님.”

“내가 너, 너무 빨리 찾아왔나?”

“…….”

“더 기간을 두기엔…… 나를 잊으면 어쩌시나 해서…….”

제타르는 할 말이 많은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고작해야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았습니다만.’

더군다나 우리 대공님 얼굴이 어디 쉽게 잊히는 얼굴이던가? 솔직히 말해서 그들의 주인은 자신이 가진 미모를 단 0.1할도 활용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냥 얼굴로 밀어붙이시라니까요?”

“맞습니다. 대장님, 제가 봤습니다요. 대공비님은 대장님 얼굴을 보면서 흐뭇해하셨다니까요?”

의외로 대공성 사람들은 달린을 생각보다 잘 파악하고 있었다.

특히나 그녀를 옆에서 모신 시녀 두 사람의 증언이 있었다.

‘확신합니다. 우리 대공비님은…… 얼굴 보십니다! 매우! 많이! 엄청나게!’

그리하여 대공성 사람들은 확신하게 되었다.

우리 대공님이 얼굴로 어떻게든 밀어붙이면 다시 한번 약혼이 성사되지 않을까?

‘작전을 짜봅시다!’

‘옳소!’

그러거나 말거나 휴고는 홀로 장례라도 치르듯 침울한 낯이었다.

“이 흥겨운 욘회에서 홀로 듁오가눈 얼굴이군.”

휴고의 아래에서 조그만 목소리가 들렸다.

휴고는 시선을 주지 않다가 한숨과 함께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발치에는 조그만 어린아이, 래빗이 서 있었다.

래빗은 짧고 통통한 팔을 애써 구겨 넣어 팔짱을 낀 모습이었다.

“……황녀님.”

“구래.”

래빗의 손에는 뚜껑이 달려 빨대가 꽂힌 컵이 들려 있었다.

래빗은 이를 쪽쪽 빨아 마시며 흥미롭다는 듯 휴고를 관찰했다.

휴고는 시선을 돌리고 싶었지만 황족, 그것도 현재 이 황실에서 가장 실세인 이의 얼굴을 피할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달린이 모시는 아기였다.

“너눈, 우리 달린이가 그렇게 좋냐?”

“네.”

바로 따라오는 대답에 래빗이 눈을 깜빡이더니 곧 흐, 하고 웃었다.

우리 달린이가 예쁘고 착하고, 다정하고 좀 푼수 같기는 해도 똑똑하기도 하지. 래빗은 흐뭇해졌다.

“대답이 빨라소 마움에 둘었오. 내 오뺘는 인정하눈 데만 한참 걸렸눈데 말이지.”

“……2황자님 말입니까?”

그럼 누구겠어? 래빗이 조그만 어깨를 으쓱했다.

“대공, 나눈 우리 달린이가 좋다고 하눈 사람이랑 행복했우면 좋겠오.”

래빗이 잠시 달린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휴고는 한순간 절대 아이라고 할 수 없는 깊이의 시선을 래빗에게서 보았지만 침묵했다.

“이로케 둘우면 웃길지도 모루지만.”

래빗이 가만히 속삭였다.

“나눈 삶울 구원받았어.”

아이에게서는 나올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휴고는 덤덤히 받아들였다.

“하나도 우습지 않습니다. 황녀님.”

머뭇거림이 없는 목소리에 래빗이 말했다.

“대공도 그로한가?”

“……예. 저와 같으시군요.”

래빗이 방긋 웃었다.

“구래, 우리 달린이 대굥에게도 자신에게 특뵬한 임무 같운 게 있다고 말하뎐가?”

“……비슷합니다.”

휴고가 의외로 순순하게 끄덕이자 래빗은 이럴 줄은 몰랐다는 듯 잠시 눈을 크게 떴다.

달린이 직접 밝혔다면 아마 이 남자도 달린이 퍽 믿는 사람이란 뜻이리라.

“됴아. 대공, 기상운 마움에 들었어.”

래빗이 아기가 요구르트를 먹듯 컵에 꽂힌 빨대를 입에 살짝 물고는 삐딱하게 머리를 기울였다.

“그대의 사랑에.”

래빗의 조그만 검지가 대공을 향했다.

“이 몸이 방해눈 하지 않아주지.”

휴고는 여기 와서 처음으로 얼떨떨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감사합니다?”

* * *

추수제 연회가 끝났다.

끝난 당일 저녁, 라이칸은 파트너로서 끝까지 매너를 지키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돌아갈 때도 나를 에스테 저택까지 에스코트 해준 것이다.

‘……혹시 연회에서 만나지 못한 건가?’

‘네?’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잊어주겠나.’

돌아가는 마차에서 뜻 모를 이야기를 잠시 한 것만 제외하면 이 남자는 아주 좋은 파트너였다.

보통은 연회장에서 파트너와 춤을 추지만, 그는 내 몸이 염려된다며 춤 대신 대화를 나눴다.

사실 나도 춤을 직접 추는 것보단 누가 추고 있는 걸 보는 게 더 즐겁더라.

이번 연회에서 가장 눈이 즐거웠던 때는 음, 악녀보다 더 악녀 같아 보이던 공녀를 만났을 때와 연회가 끝날 때까지 내내 함께 있던 라이칸의 미모를 볼 때였다고 할까.

‘이래서야 누가 얼빠라고 해도 할 말이 없겠는데.’

뭐, 사실이니까.

추수제 연회는 하루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보통 짧게는 5일에서 길게는 2주까지 진행되는데, 올해는 황제 폐하께서 막내딸을 지극히 아끼는 덕분에 더 오래 우리 딸 미모를 자랑해야 한다며 꽤 오래 열기로 했단다.

그래서 오늘밤에도 연회가 열리겠지만 오늘은 참여하지 않기로 했다. 가족들이 날 무척이나 걱정하며 말렸기 때문이었다.

가족들 입장에서 난 한없이 연약한 딸이고, 몇 달 전까지 사경을 헤매다 눈을 뜬 데다 얼마 전엔 그 춥고 험하다는 북부까지 다녀온 상황이니…….

막 건강해진 부친마저 눈물이 그렁그렁해져서 말리시기에 나는 냉큼 알았다고 했다.

일단 세 번째 소설 여주인공을 찾는다는 목표는 이뤘으니 말이다.

설마 그게 나 자신일 줄은 몰랐지만 말이지.

‘뭐, 연회에서 더 볼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나저나 라이칸의 파트너로 함께 입장했을 때, 아무리 래빗이 함께 있었다곤 하지만 이런저런 말이 나오진 않을까 싶었는데 생각보다 잠잠해서 이상했다.

해답은 오늘 오전부터 놀러 온 리제가 알려주었다.

“어제 2황자님이 여동생을 너무 아낀 나머지 함께 입장했다고 난리였어. 그들과 함께 있는 너에 대해서도 너무 부러워하고.”

“……혹시 다른 말들은 없었어?”

“물론 호사가들이 모인 곳이니만큼 몇몇 헛소리가 있긴 했는데, 요즘엔 귀족들도 자유연애가 대세라서 큰 말들은 없던걸?”

휴고와 파혼한 뒤로 수도에서 좋지 않은 소리를 들을 각오도 했었는데, 생각보다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음, 아마 대공 전하가 무서워 입을 사리는 자가 많은 것도 한몫할 것 같아. 그분이야, 북부에서 마수와 몬스터를 토벌해 위명을 떨친 분이잖아.”

휴고의 위명이 대단하긴 하구나, 하기야 보통 북부 대공이 가진 명성보다 휴고는 훨씬 뛰어나니까.

전혀 북부 대공 같지 않던 모습에 익숙해졌던 터라 새삼스러웠다.

“그리고…… 음. 아니야.”

“왜 말을 하다 말아? 뭐 때문에 그래?”

“아, 음. 이건 네게 전해도 되나 모르겠는데 흐음…… 소문이 그리 나쁘게 퍼지지 않은 거 말이야. 북부에서 먼저 대공님께 파혼 사유가 있다고 이야기를 퍼트린 덕분일 거야. 네가 여기 도착하기 전이랑 도착할 즈음부터 해서 말이야.”

“…….”

“넌 한창 백작님 뵙고 저택에만 있을 때야.”

그랬지. 수도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저택으로 달려가서 부친이 건강해진 모습을 확인하고, 가족과 회포를 풀고…….

이후로는 쭉 저택에서만 머물렀다. 바깥에 어떤 이야기가 퍼졌는지 관심도 크게 없었고.

“달린, 잘은 모르지만 음…… 대공님께서는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분이신가 봐?”

리제가 조심스럽게 말하며 뺨을 긁적였다.

“네 표정이 그런 걸 보면 말이야.”

“…….”

나는 작게 웃었다. 그러고는 어깨를 작게 으쓱였다.

리제는 좋은 친구였다. 궁금할 텐데 더 캐묻는 대신 적절하게 다른 화제로 돌리는 걸 보니 말이다.

점심을 먹고 오후, 리제가 집으로 돌아가고 나서 내 방으로 작은 서신이 도착했다.

“편지? 내게 말이야?”

“네, 아가씨,”

나는 베키가 내미는 봉투를 받았다. 뜯어보니 편지와 함께 자그만 종이가 동봉되어있었다.

발신자는 헤벤 공작가.

‘공녀 언니네?’

함께 온 편지에는 크게 낯선 말은 없었다. 어제 연회장에서 속삭였던, 다시 만나자는 말만 적혀 있을 뿐.

‘그나저나 이 언니…… 생각보다 성격이 급하시네.’

헤벤 공녀가 다시 만나자고 했을 때, 나는 연락까지 며칠은 걸리리라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게 한창 추수제 철이니 이 언니도 연회에 참석하느라 바쁠 것 아닌가.

“베키, 나갈 채비를 해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생각해 봐도 내가 악녀 역할을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좋아, 어디 요정님이 정해준 악녀 스승님을 보러 가볼까.

* * *

헤벤 공작가.

제국에 단 둘뿐인 공작 가문 중 하나로, 대대로 문관을 배출한 가문이다.

동부의 곡창지대를 소유한 집안으로, 동부 상단 연합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 중이며 이를 통해 막강한 자금력을 손에 쥐었다. 리제가 있는 트리샤 가문과 동시에 자금력으로는 으뜸인 가문.

‘악녀에, 돈 많은 가문의 공녀님이라니.’

이거 다시 생각해도 악녀물은 이 분만 한 주인공이 없는데, 요정 이놈은 무슨 생각으로 내게 중책을 맡긴 건지 모르겠다.

이번 이야기는 빙의물, 그중에서도 악녀 빙의물.

보통 악녀 빙의물에도 여러 클리셰가 있지만, 예쁘고 돈 많고 시원시원한 성격의 주인공이 돈도 잘 쓰고 미남도 잘 만나는 내용이 주를 이룰 텐데.

그런데 일단 나는 돈이 없는걸? 우리 가문도 그렇고 말이지.

헤벤 공작가 저택에 도착해 정문으로 들어가자, 서 있던 집사와 하녀들이 고개 숙여 반겨주었다.

“어서 오십시오, 에스테 영애님. 공녀님께 하문 받았습니다.”

슬쩍 안쪽을 둘러보는데, 누군가 계단에서 천천히 내려왔다.

“음, 누구지? 손님이신가?”

고개를 들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저 사람은…….

‘연회장 후원에서 공녀 언니랑 같이 있던 남자잖아?’

이사야 후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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