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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178화 (178/281)

◈178화. 3. 대마법사와 악녀 메이커 (17)

남자는 나를 보며 잠시 놀란 얼굴을 하는가 싶더니 이내 긴 눈매를 그윽하게 접어 내렸다. 내가 보았던 남성의 웃음 중 가장 우아하고 지적인 미소였다.

“이런, 손님께 인사가 늦었습니다. 뮌 이사야입니다.”

“아, 달린 에스테입니다. 후작님.”

나는 속으로 어리둥절하면서도 치마를 잡고 인사를 올렸다.

이 남자는 뭔데 여기 주인처럼 날 반겨줘?

그 사이 눈이 마주친 남자가 더욱 예쁘게 웃었다. 확실히 내 초상화 컬렉션에 들 만큼 잘생긴 얼굴이었지만, 좀 지나치게 반질반질한 느낌이랄까.

순간 그가 나를 보며 무척이나 반갑다는 듯, 그윽한 미소를 지었다.

‘와, 진짜 바람둥이…….’

둔해진 신경이 쭈뼛 설 정도로 노골적인 시선이었다. 더군다나 인사를 하겠답시고 잡았던 손도 몇 초나 더 잡고 있다가 놓아주었다.

“제 약혼녀께서 초대하셨나 봅니다.”

거기에 더해 이상한 개소리까지.

‘얼씨구?’

연회장 후원에서 봤던 모습과 대화 내용을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다.

이 남자랑 그 공녀 언니의 사이는 좋은 말로라도 사이가 좋다고 할 수 없었다.

‘아니, 그렇게 싸웠는데 여기선 천연덕스럽게 행동한단 말이야?’

거기다가 당당하게 약혼녀 운운하면서 거의 주인 행세하는 모습인데?

흘끗 주변을 보았다.

내게 고개 숙인 인원들은 전혀 동요가 없었다. 마치 당연한 것을 보는 듯한 모습이었다.

특히나 가장 앞에 서 있는 나이 든 집사의 표정이야말로 가장 평온했다.

그가 이사야 후작을 바라보는 시선은 그야말로 존경과 믿음으로 가득했다. 누가 세뇌시키더라도 이 정도로 존경 가득한 눈은 하지 않겠다 싶은 굳건한 시선.

보고 있으니 절로 한숨이 나올 것 같더라.

‘허, 누가 보면 저쪽이 이 집안 아들인 줄 알겠네.’

그저 잠깐 본 나도 기가 막힌 상황인데, 헤벤 공녀는 어떤 심정일까.

그 사이, 후작이 내 손을 슬쩍 잡아당겼다. 뭐야, 아직도 잡고 있었냐?

“약혼녀라 하시면…… 역시나 공녀님을 말씀하시는 거겠지요?”

이 집안에 딸 하나라는 건 익히 알고 있지만 믿기지가 않아서 다시 묻는다. 진짜냐? 이런 의미를 팍팍 담았더니 후작이 반갑다는 듯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아, 아직 바깥에는 제대로 공표가 되지 않았을뿐더러…….”

“…….”

“에스테 영애께서는 아무래도 소문에 다소 느리실 수 있는 환경이셨지요.”

아닌데? 아닌데? 내 친구 중에 정보로는 쩌는 친구가 있어서 댁이 망할 바람둥이라는 사실을 아주 잘 들었다만.

손을 빼고 싶었다.

저는 쓰레기는 취급 안 해요.

자고로 로판을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지고지순한 남자, 남주는 여주만 봐야 하는 온리원!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기 마련이다. 나 또한 그러했다.

그러니 바람둥이는, 거기다 현실 바람둥이는 정말 질색일 수밖에.

“제 약혼녀께 이렇게 연약하고 사랑스러운 친우가 생기신 줄은 몰랐군요.”

“감사합니다만, 모두 제가 좋아하지 않는 수식어다 보니…….”

기회를 틈 타 손을 빼냈다.

그만 만져. 댁은 얼굴이 아깝다. 아니, 이 말도 취소.

라이칸이랑 휴고보다 급 떨어지는 인간이…….

“실례가 되었다면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이사야 후작이 잠시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하더니, 곧 어른스러운 얼굴에 유감스럽다는 표정을 틔웠다.

그의 낯으로 안타까움이 스쳤다.

“이런, 저는 제가 영애와 마음이 잘 맞을 거라 생각했습니다만.”

이 인간이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야? 요정의 창이 헛소리하는 사람의 입을 쳐버리는 스킬 같은 건 주지 않나?

나는 차게 식은 표정을 했다가 고개를 돌렸다.

“뭣 하고 있지? 약속 시간에 늦었다간 공녀님께서 좋아하지 않으실 듯한데.”

“예? 아, 예! 죄송합니다.”

집사가 고개를 깊이 숙이더니 안내를 자처했다.

그러면서도 슬쩍 이사야 후작의 눈치를 보는 듯한 모습이, 어째 이 공작가 한번 자알 돌아간다 싶었다.

‘공녀 언니 입장에서는 좀 복장 터지는 환경인 것 같은데.’

응접실로 들어가자, 안에서 이미 얼굴을 보았던 헤벤 공녀가 나를 반겨주었다. 그녀는 넓은 1인용 소파에 앉은 채로 고갯짓했다.

“아, 왔나요? 여기 앉아요. 에스테 영애.”

고개만 까딱하는 모습이 어찌 보면 무례하거나 건방질 법도 한데, 표독스러우면서도 지극히 아름다운 이 언니가 하니 기분 나쁘기는커녕 오히려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여기서 더한 짓을 하더라도 네, 언니! 하고 따라야 할 것 같다고 해야 하나.

‘아니 그냥 내가 얼빠인 건가.’

스스로를 너무 잘 아는 탓에 얌전히 자기 자신을 수긍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물론 인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런저런 자질구레한 인사들은 집어치우기로 할까요? 영애도 나도 바쁜 사람이니 얼른 본론으로 들어가죠.”

자질구레……. 이 언니 화끈하시네. 다시 봐도 아까웠다.

세 번째 주인공으로는 정말 딱인데!

남주와 여주가 죽어버린 소설, 세 번째 이야기의 장르는 <악녀 빙의물>. 빙의물 중에서도 주인공이 악녀에 빙의한 소설이다.

여주가 악녀로서 눈을 뜨자마자 원작 악녀가 일으킨 사고들을 수습하는 동시에 못난 약혼자는 차버리고 사이가 좋지 않은 가족들과는 화해한 뒤, 조신하고 착한 마법사 남주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알콩달콩하면서 답답한 사건들은 모두 시원시원하게 해결하는 소설이었다.

볼수록 여자주인공과 이 헤벤 공녀는 닮은 구석이 많았다.

후, 새로운 남자주인공인 ‘발데르’와 원수지간만 아니었다면 좋았을 것을…….

“으음, 저는 바쁘지 않으니 공녀님 편하신 쪽으로 말씀해주셔도 괜찮습니다.”

“바쁘지 않다고? 그렇진 않을 텐데요.”

“네?”

공녀 언니가 이상하다는 듯 느릿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한창때일 텐데?”

“한창때라니요?”

“원래 연애 초기일 때 가장 뜨겁고 바쁜 법 아닌가요.”

연애 초기? 금시초문이었다.

영문을 몰라 눈을 깜빡였더니, 공녀 언니가 ‘당신 퍽 재밌는 사람이네요?’ 하고 픽 웃었다.

“2황자님과 연애 중 아닌가요? 아, 혹시 간 보는 중?”

“네? 아닌데요?”

“하룻밤 즐기는 사이였다니, 영애도 꽤나 화끈하군요.”

화끈……. 이 공녀 언니를 향해 생각했던 말이 고스란히 돌아왔다. 전혀 다른 의미를 담고 말이다.

“어쩌다 그런 오해를 하신 건지 모르겠으나, 전혀 근거 없는 사실이에요.”

“아 그럼 혹시, 사랑한 건 북부 대공님이었지만 극복할 수 없었던 건강과 환경 차이로 헤어진 쪽이 맞나요? 아니면 북부 대공님이 너무 괴롭혀서라는 말도 있던데.”

“네에? 그건 또 무슨……. 아닙니다. 대공님은 절 전혀 괴롭히지 않으셨어요!”

“아뇨. 사전적 의미의 괴롭힘 말고, 밤에 괴롭히는 거요.”

……예?

담백하게 나와야 할 말이 아님에도 나긋한 듯 담백한 목소리에 벙쪘다.

“북부에서 나고 자란 전사답게, 밤에 침대에서 연약한 영애를 잠 못 들게 했다는 소문이 꽤 많이 퍼졌는데 몰랐어요?”

“전혀 근거 없는 소문이에요!”

“왜 근거가 없어요. 북부 사람들이 제국에서 가장 크다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인데?”

내 뺨이 터질 듯 발갛게 물들었다.

왜죠? 왜…… 대화가 폭주 기관차처럼 달려가고 있지? 어째서죠?

“그, 어, 크, 음, 크흠, 크흠…….”

공녀 언니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숨소리를 내며 웃었다.

“키가 크단 말이에요. 키.”

“아하, 키 말씀이시군요! 그렇죠. 키, 덩치 크죠…….”

“농담이에요. 거기도 크죠.”

“…….”

“아아, 이거 마치 순진한 사람 희롱하는 중년이 된 기분이네요?”

“……그 상황과 다르지 않은 것 같은데요.”

내가 눈을 굴리며 또박또박 대꾸하자. 공녀 언니의 웃음이 진해졌다.

그녀는 숫제 턱을 괴고 말했다.

“손이요, 손. 북부 사람들이 손과 발이 큰 것도 유명한 사실이죠.”

……이 언니는 언제까지 날 놀릴 셈이지. 돌림노래도 아니고, 1절만 하고 끝내는 건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다.

“공녀님, 오늘 제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어 부르신 게 아닌가요?”

“없는데요?”

“…….”

“아, 실례. 에스테 영애의 모습이 소문으로 들었던 것과, 또 예상했던 것과 달라서 나도 모르게 그만.”

공녀 언니가 턱을 괸 채로 빙글 웃었다.

표독스럽게 올라간 눈꼬리가 놀랍도록 우아하게 접혔다.

“맞아요. 할 말 당연히 있죠. 그리고 내가 물은 질문은 본론과 상관관계가 없는 질문이 아니니 답변해주면 좋겠는데.”

“……제 개인 연애사와 약혼 관련한 일들이 관련 있다고요?”

“네.”

공녀 언니의 얼굴로 사악하단 말이 딱 잘 어울릴, 고혹적인 미소가 스쳤다.

“당신이 내 약점을 엿보았으니, 나 또한 당신의 무엇이 약점일지 정도는 알고 가야 하지 않겠어요?”

오, 지금 저 언니 눈으로 맹수의 빛이 스친 것 같은데. 날 물 것 같은데.

나는 슬쩍 눈을 굴렸다. 몸으로 덤비면 스킬을 써서 막기라도 하지……. 이런 싸움은 영 젬병인데.

“약점이라 생각하시나요?”

“그렇다면요?”

“왜 굳이 그렇게 생각하세요?”

나는 한 손을 가슴에 얹고 당당하게 생긋 웃었다.

“약점으로 작용할지 아닐지는 서로의 관계에 따라 변하는 거 아닌가요?”

공녀 언니, 전 적이 아니에요. 프렌드, 아니, 스승님으로 모시고 싶다고요. 네?

좋은 협력자가 되자고. 오케이?

공녀 언니가 나를 빤히 보더니 한쪽 눈을 미미하게 찡그렸다.

“흐응, 나를 협박하듯 말했던 자에게는 당연히 약점으로 작용하지 않을까요?”

“에이, 대뜸 부채를 던지면서 말씀하시면 누구라도 당황하기 마련이죠.”

거, 언니가 먼저 부채부터 던지셨잖아요. 우리 말은 똑바로 합시다.

평온하게 대꾸하자, 공녀 언니는 불쾌해하는 대신 흥미를 보였다.

“걸려 오는 시비는 피하지 않는다?”

“걸려 오는 시비는 피해야죠. 전 힘든 것도 아픈 것도 싫거든요. 다만, 피하지 못할 것들은.”

나는 눈을 한번 내렸다가 들어 올렸다.

“아니, 피해선 안 될 것들은 당당하게 받아줘야죠.”

공녀 언니 쪽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냥 재밌다는 듯 우아하게 웃는 웃음이 아니라 정말 웃기다는 듯 어딘가 유쾌함이 섞인 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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