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180화 (180/281)

◈180화. 3. 대마법사와 악녀 메이커 (19)

* * *

집으로 돌아간 나는 쉴 새도 없이 베키를 데려와 한곳으로 향했다.

“여기에 모두 넣어놨다고?”

“네, 맞아요. 아가씨.”

베키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문을 열었다. 먼지 내음이 났다. 살짝 기침하면서 안쪽을 보자, 볕에 물든 천들이 보였다.

‘설마하니, 이걸 다시 찾게 될 줄이야.’

수없이 많은 네모 사각틀들.

여기는 오래전 내가 이 제국 미남들의 초상화를 모아뒀던 곳이었다.

참고로 나는 일단 이 제국에서 잘생긴 미남 초상화를 모두 모은 뒤, 거기서 내 취향의 미남만을 선별했기 때문에 첫 번째 단계에서 탈락한 수많은 초상화들이 여기에 아직 남아있었다.

한마디로 겁나 많단 소리다.

“리제에겐 서신 넣었지?”

“네! 보냈어요. 아가씨.”

베키가 이렇게 말하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아가씨, 여기 넣어두신 초상화들은 어디 쓰시려고요?”

나는 그저 웃고 말았다. 어디긴, 이번엔 다른 언니 소개팅 시켜주려고 그러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연락을 했던 리제가 우리 집으로 찾아왔다.

“달린? 연락은 받았어. 대체 무슨 일이야?”

나는 리제를 초상화 방으로 데려와 다과를 대접하면서 미주알고주알 모든 것을 털어놨다.

당연하게도 원작을 바로 잡아야 하느니, 이런 얘기는 아니고 공녀 언니와 협력하게 된 일 이야기였다.

“으음, 그러니까 처음엔 공녀님이 너에게 입을 다물라는 협박…… 비스무리하게 경고를 했지만 듣다 보니 공녀님의 사정이 딱하셔서 네가 돕기로 했다고?”

약간의 MSG 첨가를 해서 말이다.

“응, 리제. 혹시 괜찮은 사람 없을까?”

“글쎄…….”

의외랄지, 리제는 정말 의외로 내가 하는 얘길 편견 없이 들었다.

그저 얌전히 들어주면서 그 후작이 그런 놈인 줄이야 미리 알았다는 둥 어쨌다는 둥 이사야 후작의 욕을 보탤 뿐이었다. 마치 벌써 몇 번 들었던 이야기라는 것처럼

“조건은 3가지라고?”

“응!”

“첫 번째, 미남일 것. 두 번째 열렬히 사랑하는 척을 해줄 남자, 세 번째 적절한 때에 헤어져 줄 남자……. 달린, 나 모두 이해는 했어. 근데 한 가지만 이해가 안 되는데, ‘첫 번째, 미남이란 조건’은 왜 반드시 붙는 거야?”

“그거야 생각해봐. 리제. 그 후작놈을 떼내려고 하는 일이야. 일종의 복수나 마찬가지인데 남들 눈에 그 후작보다는 잘생겨야 하지 않겠어?”

“……일리 있네.”

“그렇지?”

“근데 달린, 그것도 아는 거지……?”

“응? 뭐를?”

리제가 드물게도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사야 후작보다 잘생긴 남자는 별로 없어.”

어라, 정말? 우리 제국에 아무리 미남이 많다지만 말이야. 수준 차이라는 게 분명 있지 않나?

난 그제서야 그 후작 놈이 그래 보여도 까다로운 선별에 마지막까지 남았던 초상화 주인 중 하나였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큰일 났다.’

첫 번째 조건부터 이렇게 어렵다니?

“달린,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그 설마, 설마, 2황자님이나 대공님을 소개해드리려는 건…….”

“엥? 설마! 내가 미쳤어? 아니아니, 미안해. 너무 놀라서. 그렇지만 경우를 아는 사람인 이상 어떻게 그런 부탁을 해.”

“그렇지?”

왜 안심한 얼굴을 하는 거야, 리제야?

네 눈에 내가 좀 푼수같이 보여도 설마 그렇게까지 철없는 친구인 거야? 아니지?

무엇보다도 나를 좋아한다고 고백한 두 남자한테 어떻게 그런 말을 해?

그런 짓은 절대 할 수 없다.

‘문제는 달리 말하자면 라이칸에게는 협조 구하기도 어렵게 되었단 말이지.’

아무리 라이칸이 답을 뒤로 물러 달라고 했다지만, 답변도 아직인 사람에게 다른 사람 소개해줄 남자를 알아봐달라는 건 나라도 좀…….

사탄까지는 아니더라도 사탄 아래아래 등급의 일 같긴 하다.

“차라리 두 번째나 세 번째 조건은 구하기 쉬워. 일단 공녀님보다 신분이 낮은 사람이나 혹은 신분은 적당하되 돈이 필요한 사람이라면 이 조건을 충분히 만족할 테니까. 문제는 이런 사람들은 이미 한 재력 하시는 영애분들이 채갔거나, 심각한 하자가 있단 거지.”

“으음…….”

이거 생각보다 어렵네.

그 공녀 언니를 스승님으로 모시는 일이 이렇게 험난하다니.

하지만 퀘스트가 힘들지 않았던 적이 있었나 뭐.

“저, 달린…… 있잖아.”

함께 머리를 맞대던 이때, 리제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올리더니 내 시선을 피했다.

“나, 적당한 분을 찾은 것 같은데…… 그, 이 역할에 아주 잘 어울리고 너를 돕는 일이라면 음, 절대 거절하지 않을 것 같은 분으로…….”

“뭐? 진짜? 누군데? 누구셔?”

그런 사람이 옆에 있었나? 눈을 반짝거리자, 리제가 난감한 얼굴로 뺨을 문질렀다.

순간이지만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 파올로 님?”

“엑, 기각.”

“뭐? 어째서?”

나는 차게 식은 표정을 지었다.

리제야, 내 가장 친한 친구라도 용납할 수 없는 발언이었어.

“외모에서 탈락, 광속 탈락, 완전 탈락!”

“어째서! 내, 내, 눈엔 제일 잘생긴 분이신데……!”

“콩깍지! 탈락!”

“아, 아니야!”

무슨 소릴 하나 했더니.

확실히 오빠인 파올로라면, 두 번째나 세 번째 조건은 충분히 만족할 수 있다.

뭐, 리제에게 이렇게 얘기했지만 외모도 그렇게까지 나쁘진 않다.

하지만!

‘아무리 나라도 친구의 미래 연인을 그렇게 써먹을 수는 없지.’

이미 썸을 타는 게 확실한 이 미래의 연인을 방해할 생각은 없다.

아무튼 기각한 뒤로 우리는 열심히 머리를 굴려서, 아니, 정정한다. 대체로 리제가 거의 머리를 굴려서 대략적인 리스트를 만들어봤지만…….

그리 성에 차진 않는 리스트였다.

“일단 여기까지만 하고 나머진 다음에 하자.”

“응…….”

녹초가 된 리제가 부스스 일어나 고개를 끄덕였다.

윽, 내 일인데 리제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열심히 어깨를 주물러 주었다.

‘근데 리제는 왜 이렇게까지 내게 잘해줄까?’

가만 보면 때로 내가 정확하게 이유를 밝히지 않은 일조차 자신의 일처럼 나서주었다.

좋은 친구란 건 알지만…… 보통 아무리 친하더라도 이렇게까지 잘해주나?

출처가 알려지면 자신도 위험해질 만한 기밀까지 넘겨주기도 하면서?

폭풍처럼 돋아난 생각이 머리를 어지럽혔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일단은 이 퀘스트를 해결하면서 더 생각해보자. 위험한 건 아니니까.’

리제는 집으로 돌아갔다.

아마 오늘 완성하지 못한 일 때문에 곧 다시 만날 터다.

‘에휴, 차라리 발데르, 그 대마법사가 공녀랑 철천지원수만 아니었으면 주인공도 같이 해먹고, 여기에 가짜 애인으로도 쓰고 얼마나 좋아.’

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와 동시에 어딘가에서 툭, 툭툭, 하는 무언가 유리창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창문이 휙 열려있었다. 흩날리는 커튼 사이에서 익숙한 남자의 인영이 보였다.

나는 이번엔 놀라지 않았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그저, 이런 생각을 했을 뿐.

조금 힘없는 목소리와 함께 손을 흔들었다.

“안녕하세요, 대마법사님?”

초상화로 가득한 방, 그 어떤 그림보다도 아름다운 남자가 바람과 함께 휙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태연한 내 인사에 더 태연한 대답이 돌아왔다. 아무리 봐도 저택에 무단침입한 남자가 할만한 목소리와 태도는 아니었다.

원래 마법사란 이들은 다 제멋대로인가?

하지만 원작 소설을 생각해보면 또 그렇지도 않았다. 남주가 좀 능글맞기는 해도 대체로 정중한 사람이었는데 말이지.

발데르와 친구라더니 이런 점은 닮지 않은 건가.

“이 방은 뭔가요, 영애?”

“으음, 아주 오래전에 열심히 노력한 흔적요?”

이 세계가 어느 소설인지 알아보려고, 그리고 살아남으려고 열심히 노력했습죠.

“그렇군요. 조금 특이한 노력이네요.”

“뭐, 이상해 보인다는 건 알아요. 그러니까 음, 제가 잘생긴 사람을 좋아하는 걸로 해둘까요?”

“잘생긴 사람.”

그러자 대마법사가 잠시 나른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정정한다. 이 남자는 오늘도 꽤 졸린 듯한 표정이었다.

졸리면 마탑에서 잠이나 잘 것이지 왜 찾아온 건지.

사실 이 상황이 썩 내키지 않았다. 내가 여주인공인 ‘악녀’가 되었다고 하나 아직 메인 퀘스트도 알지 못하는 상황이라, 이 남자와 다시 보고 싶은 생각은 없었으니까.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다 시선을 위로 올리니 어느새 지난번처럼 이 남자의 얼굴이 불쑥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살랑살랑, 흔들리는 바람 속에서 참으로 예쁜 남자란 생각이 들었다.

솜사탕 같은 머리를 한번 만져보고 싶다 생각했으니까.

그저 눈앞에 조각상 같은 이가 있으니 무의식중에 나오는 감탄이었다.

그러나 왜였을까.

두근.

시선을 마주한 순간, 처음으로 느끼는 고동에 나는 그대로 멈칫했다.

‘……뭐야, 방금 뭐였지?’

놀라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긴 속눈썹이 팔랑 움직이며 나를 관찰하는 시선이 드러났다.

신비로운 홍채 속에 내가 담긴 순간.

두근.

착각이 아니었다.

[축하합니다, 메인 퀘스트가 도착했어요! 꺄아! ( ๑˃̶ ꇴ ˂̶)♪⁺]

[퀘스트(메인) - ‘필승! 새로운 세 번째 이야기에서 살아남기!’

세상에나! 주인공의 사망이라니! 세 번째 이야기는 정상적으로 돌릴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세계의 관리자, ‘요정’은 긴급하게 새로운 대안을 구했습니다!

하지만 새로 만드는 이야기가 과연 진짜를 대체할 수 있을까요?

이 모든 건 지금까지 살아남은 ‘빙의자’님 당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세계가 멸망하지 않게, 이야기를 붙잡아 봅시다!

※주, 이번 퀘스트는 다른 메인 퀘스트와 궤를 달리합니다!

내용: 세계의 관리자 ‘요정’이 지시하는 5개의 지령을 성공하세요!

세부 조건

1) 발단: 여주인공 찾기 - ‘빙의자님’이 주인공 ‘악녀’가 되었습니다 (완료)

2) ???

3) ???

4) ???

5) ???

기한: 40일

실패시: 사망

보상: 퀘스트 완료 후 산정됩니다. ]

[퀘스트(메인)- ‘필승! 새로운 세 번째 이야기에서 살아남기!’

두 번째 세부 조건이 해금됩니다.

2) 전개: 남자주인공에게 첫눈에 반하기]

……뭐?

[단, 위 조건은 강제로 진행되는 버프입니다. ✿˘◡˘✿]

[그간 생존하느라 고생 많았던 ‘빙의자’님, 마음껏 사랑을 만끽하세요!]

무, 뭐, 뭐, 뭐야?!

[우리 요정은 당신을 아끼며 응원합니다.]

무시무시한 한마디와 함께, 고개를 든 나는 아연하게 이 남자를 바라봤다.

두근두근.

생전 처음 느껴보는 거대한 고동 소리가 나를 지배했다.

설렘과 떨림이 주어진 이 순간.

어째서인지 나는, 이 순간에 처음으로 울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