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3. 대마법사와 악녀 메이커 (20)
‘정신 차리자.’
이대로 멍하니 있을 때가 아니다. 정신 차리잔 의미에서 난 스스로 뺨을 찰싹 내리쳤다.
발데르는 내가 이상한 행동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저 지켜보기만 하였다.
관찰하는 시선 같기도 했고, 또 다른 무언가를 품은 듯한 시선이기도 했다.
“이곳엔 어쩐 일이신가요, 대마법사님?”
일단 에스테 저택에 불쑥 나타난 남자의 용건부터 알아야겠다.
문제는.
쿵쿵쿵.
쉼 없이 뛰고 있는 심장이었지만.
저 잘생긴 얼굴을 보고 있자니 얼굴이 절로 붉어지는 기분이었다.
일단, 인정할 건 인정하자. 잘생기긴 했잖아?
호들갑 떨지 말고 저 남자가 너무 잘생겨서 두근거리는 거고 그래서 얼굴도 빨개진 거라고 하자.
‘젠장, 첫사랑을 이따위로 경험하고 싶진 않았다고.’
빙의자들의 로망이 무엇이던가.
이 세계에서 잘생기고 본인 취향인 데다 참한 남자와 낭만적인 사랑에 빠져보는 것!
일단 나는 그랬다. 나름 이런 로망이 있었단 말이다.
‘눈 뜨자마자 살아남기 급급해서 생각을 못 했을 뿐이지!’
지금 상황은 요정의 손에 억지로 이루어지는 상황이었다. 어떻게 즐길 수가 있을까? 하지만 어떡하겠나. 일단 메인 퀘스트가 이따위로 나타났으니.
“어쩐 일이냐면, 당신을 보기 위해서 왔죠?”
두근.
‘아 이따위 멘트에 두근거리지 말라고! 자존심 상해!’
나는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발데르는 내 표정에 고개를 갸웃했지만 지적하진 않았다. 하긴 갑자기 본인을 철천지원수처럼 노려보니 의아하긴 했을 거다.
“그러니까 그 용건이 어떻게 되시는데요?”
“으음, 무덤에서 만났을 때보다 조금 사나워졌네요?”
“네. 조금 그럴 일이 생겨서요. 혹시 기분 나쁘신가요?”
“딱히……?”
좋아. 아무 생각 없는 듯한 멍한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좀 진정이 되는 듯했다.
“아니, 갑작스럽게 이 시간에 남의 집을 방문하셨으면 용건이 있으실 거 아니에요.”
나는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주저앉은 그대로 바닥을 탁탁 내리쳤다.
이 동작이 마치 엄마가 아들에게 ‘아들, 너 거기 좀 앉아봐. 얘기 좀 하자.’ 하며 혼을 내기 3초 전 느낌이었단 건 다음 순간에야 알았다.
“혹시 지난번에 ‘실험’하고 싶다는 말의 연장 선상인가요? 그거 얘기하러 오신 거죠?”
“다르진 않아요.”
발데르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추수제에서 영애를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알았는데요?”
“보지 못해서요.”
“음? 저를 못 봤다고요?”
못 볼 수가 있나?
굉장히 튄다고 할 수 있는 래빗이랑 아니면 라이칸이랑 함께 있었는데?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아니었기에 얼른 난 대꾸했다.
“그래요, 어디 한번 들어나 보죠. 그 실험이란 거, 뭘 하고 싶으신 건데요?”
“도와주려고요?”
“네.”
실험이라니, 단어가 딱히 좋은 어감은 아니었지만 일단 들어보기나 해보자.
“말은 실험이라지만…… 사실 딱히 큰 건 없어요. 그냥 영애의 일상을 내 눈으로 지켜보고 싶다는 것? 최대한 옆에 있어 주거나 아니면 내가 곁에 있도록 해주면 좋겠네요…….”
“엄…… 그건 실험이라기보단 관찰에 가깝지 않나요?”
“맞아요.”
그는 순순히 끄덕였다. 졸린 듯한 유순한 표정으로.
“몇 달 전 황실의 요청으로 당신을 치료하라는 명을 받았을 때,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했거든요.”
“이상하다니요?”
“당신의 몸, 이미 죽었는데.”
“……!”
“왜 영혼은 멀쩡하다 못해 빛이 날까?”
충격적인 말이었다.
그에 따르면 처음부터 눈치챈 것은 아니었고, 나를 본 뒤로 그 위화감에 대해 계속 생각하고 또 생각했더니 그런 결론에 도달했다고.
“몸은 이미 죽었지만, 영혼이 가진 ‘생명력’으로 연명하고 있어요. 맞죠?”
“…….”
느릿느릿한 말투.
질문을 가장했지만 질문이 아니라 확정하는 듯한 말투였다.
“생명력이 닳을수록 아프고, 피도 토할 것이며, 체력은 급속도로 떨어지고 앓아눕기도 할 거예요.”
“……이런 증상을 잘 아는 것처럼 말하네요?”
“잘 알진 못해요. 나도 추측한 바이니까요.”
하지만 진실에 근접했다. 나는 숨을 꿀꺽 삼켰다.
‘이러다 내가 빙의자인 사실도 알아차리겠네.’
내가 래빗에게 ‘엠버넷’이 환생한 사람이 아니란 걸 들켰을 때나, 직접 신의 계시를 받는다고 말하던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저 당신이 굉장히 흥미로워요. 당신 같은 영혼은 본 적 없기에 지켜보고 싶은 마음?”
“으음, 일종의 희귀 동물을 바라보는 느낌이라는 거죠? 지금.”
“음, 그것과는 조금 다르긴 하지만 비슷하긴 하네요.”
발데르가 덤덤하게 ‘당신은 동물이 아니잖아요?’라고 덧붙였다.
어째 이 남자가 너무 아무렇지 않게 진실을 툭툭 말하니까 나도 같이 차분해졌다.
‘그래, 보인다는데 어떡할 거야.’
혹시나 요정의 창이 보복할까 봐 걱정된 거지, 지금 아무런 메시지창이 뜨지 않는 걸 보아선 내가 비밀을 들키더라도 따로 패널티는 없는 모양이었다.
“좋아요.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이야기가 편하겠네요. 맞아요, 난 시한부예요.”
“그렇군요.”
“어째, 눈을 더 반짝거리시는 것 같네요? 어쨌거나 저를 관찰만 하게 해드리면 되는 거예요?”
“일거수일투족.”
“아, 그래요. 제 일상 전부를 드릴게요.”
봐라 봐. 그게 뭐 얼마나 도움이 되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런데 하나만 여쭤볼게요. 안 물으면 찝찝할 것 같아서요. 제게 흥미가 있다는 건 알겠는데, 그래서 제 영혼을 관찰해서 어디에 쓰시려고요?”
이 사람 혹시 현실 세계의 대학원생이나 뭐 교수, 연구원 같은 걸 할 체질인 건가? 아니면 미지의 존재에 대한 호기심? 마법사들이 원래 호기심이 많은 건가? 묻지 않으면 찝찝할 것 같아 가볍게 질문했는데.
“내 상태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심장에 문제가 있었거든요.”
“……네?”
실례, 하고 말하며 커다란 손이 내 손을 잡아 본인 가슴 위에 올려두었다.
나는 다시 세차게 뛰는 고동을 느끼며 숨을 삼켰다. 아, 제발 깜빡이라도 켜고 들어오라고.
“느껴지시나요? 난, 심장에 문제가 있어요.”
손 끝에서 느릿한 고동이 느껴졌다. 보통 사람이 ‘두근두근’하는 일정한 속도를 가지고 있다면 현저히 느릿한 고동 소리.
“보통은 살아남기 어렵지만 영혼에 엄청난 마력을 타고나서 생을 이어가는 존재. 당신과 비슷하단 얘기죠. ”
“…….”
“당신을 관찰하면 내게도 도움이 될까 싶어서요.”
발데르가 이렇게 말하며 보일 듯 말 듯 미소지었다. ‘흥미와 호기심이 가장 크지만요’하고 덧붙이면서.
나랑 비슷한 존재.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이 세상 어디에서도 듣지 못할 말이라 생각했으니까.
그럼 이 남자도 혹시 언제 죽을지 몰라 전전긍긍하던 때가 있었을까?
자다가 건강 수치가 떨어져 죽기라도 할까 봐, 어느 날 밤을 지새웠던 나처럼 이 남자도 힘들었던 때가 있었을까?
누가 내게 그간 무섭지 않았느냐 묻는다면 난 말할 수 있다.
무섭지 않았던 적이 단 한 순간도 없었다고.
‘아니, 아니. 잊자. 부정적인 생각은 안 하기로 했잖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나는 입술을 꾹 물었다가 떼어냈다.
그래. 이 말로 인해 이 남자에게 동질감을 느꼈다. 부정할 순 없겠다.
“좋아요. 이유는 잘 알았어요.”
그렇다고 이 남자에 대해서 자세히 속속들이 알고 싶은 건 아니었다.
남을 깊게 알수록 나 또한 보여줄 것이 늘어난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니까.
“대마법사님의 요청을 들어주는 대신 저도 바라는 게 있어서요. 이건 대마법사님도 아는 이야기예요.”
지난번에도 한 번 이야기 했으니까.
“저랑 연애 좀 해주세요.”
마침 잘됐다. 상대가 바라는 것이 명확하니, 나도 말하기 편해졌다.
이번 퀘스트가 지나는 동안만 좋은 협력관계가 될 수 있겠다.
나는 쉴 새 없이 뛰는 심장을 무시하며 말했다.
“……제가 평범한 사람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과 사회성이 좀 저하된 인간이란 건 알고 있는데, 그럼에도 보통 고백은 이렇게 이루어지는 게 아니란 건 잘 알아요. 영애.”
“무슨 꿍꿍이냐는 말을 잘 돌려 말씀하시네요?”
“지난번에도 느꼈지만 영애가 내게 첫눈에 반해서 하는 말은 아닌 것 같아서요?”
발데르가 자신의 얼굴을 문질렀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불쑥 잘생긴 얼굴이 앞으로 다가왔다.
“물론 첫눈에 반한 것이라 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정답이었다. 물론 요정 놈들의 농간이긴 하지만.
“뭐, 그런 거라고 치자…… 하기엔 그렇고. 그냥 제 조건이라고 생각해주세요.”
어차피 발데르 이 남자도 내 옆에 있으려면 구실이 필요할 테니까.
“맥락 없이 진한 연애를 하자는 소린 아니고요, 차근차근 하나씩 해보자고요.”
서로 자연스럽게 알게 되고, 썸을 타고 고백을 통해 연인 관계가 되는 것.
이것이 요정이 내게 바라는 일 아닐까?
‘만약 이걸 빠르게 처리할 수 있다면 이 세 번째 메인 퀘스트는 생각보다 더 쉽게 끝날지도?’
그렇다면 이 남자를 옆에 두는 게 나쁜 일은 아니었다.
나는 발데르에게 이런 상황을 간단히 설명했고, 발데르는 무슨 의미인지 모를 표정으로 수락했다.
두근두근.
여전히 뛰는 심장을 꾹 누르며 난 한숨을 쉬었다.
“후, 그리고 앞으로 옆에 쭉 계실 거라니까 미리 말씀드리는 건데요.”
그러고 보니, 이 사람 앞으로 협력할 공녀 언니랑은 원수지간이라고 했잖아? 그 언니랑 볼 일이 많을 텐데 미리 이야기나 해두자 싶었다.
“제가 현재 헤벤 공녀님과 함께 하기로 한 일이 있어서 자주 뵙게 될 텐데, 그때도 옆에 있을 건가요? 이건 좀 곤란해서요.”
“왜 곤란하죠?”
“네? 그거야…… 헤벤 공녀님이 대마법사님을 음, 미워하니까?”
뜻밖에 발데르는 영문 모를 소릴 들었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처음 듣는 소리란 표정이다.
“그랬나요?”
“그랬나요, 라니요. 대마법사님은 아무 생각 없으셨던 거예요?”
그가 끄덕였다.
뭐야. 요정의 창이 분명 공녀는 발데르를 죽일 듯이 미워한다고 알려줬는데? 그래서 ‘악녀’ 주인공에서 탈락이라며.
‘쌍방 원수인 줄 알았더니, 공녀 언니만 일방적으로 미워하는 사이였던 거야?’
“헤벤 공작가나 그곳의 공녀에게 딱히 감정은 없습니다. 아무 감정이 없다고 하면 정확하겠네요. 오히려 영애가 그 공작가에 가는 것을 말릴 수 있다면…… 말리고 싶은 심정인데요.”
“네? 어째서요?”
“영애가 일찍 죽으면 곤란하니까요.”
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이건 또 무슨 무서운 소리야?
“왜요? 죽는단 소리 막 하지 마세요. 얼마나 무서운지 알아요?”
“아, 그런 의도는 아닌데…….”
“아무튼 제가 왜 죽어요?”
발데르가 졸린듯한 예쁜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그거야, 내 친구를 죽인 ‘원흉’이 아마…… 그 공작가 안에 있는 걸로 추정되니까요?”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발데르의 친구? 세 번째 이야기의 남자주인공이잖아?
주인공들을 죽인 건 이 세계의 오류라고 했는데?
……그 ‘세계의 오류’가 지금 헤벤 공작가에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