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3. 대마법사와 악녀 메이커 (21)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왔다.
이건 또 무슨 생각지도 못한 소리야?
“저, 대마법사님 혹시나 해서 확인 차 묻는 건데, 그 친구가 그…… 그분 맞으시죠? 탑 아래 비석…….”
“네. 죽은 전대 대마법사죠.”
으윽, 역시. 어떻게 봐도 이건 빼도 박도 못한 사실이잖아.
나는 양손에 얼굴을 묻고 으앙, 하고 소리 없이 울었다. 정말 울고 싶은 마음이었다.
당장 메인 퀘스트니 서브 퀘스트니 주어진 미션 해결하는 것도 바빠 죽겠는데, 미지의 적까지 신경 써야 해?
이건 아주 큰 문제가 생긴 거다.
‘세계의 오류는 세 번째 이야기의 남주와 여주를 죽였다.’
그래서 요정은 세계가 무너지지 않게 새로운 세 번째 이야기를 만들기로 했다.
그런데 ‘세계의 오류’ 시점으로 생각해보자.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자는 이야기를 망치기 위해서 주인공들을 죽였지. 그런데 새로운 주인공들이 나타났어.’
과연 이 시점에서 새로운 주인공을 가만히 둘까?
난 숨을 꿀꺽 삼켰다.
어쩌면, 새로운 주인공이 나타난 것을 알게 되면…… 날 죽이려 드는 거 아니야?
[빙고! ˚✧₊⁎( ˘ω˘ )⁎⁺˳✧༚!]
아오씨, 깜짝이야!
[요정은 빙의자님의 영민함에 감탄했어요! 역시 우리가 선택한 빙의자님!]
웃기지 마! 이건 누구나 추론하면 알 수 있는 소리잖아.
그보다 그럼 이놈들은 설마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걸 알고서도…… 나를 세 번째 주인공 삼은 거야?
나는 입을 쩍 벌렸다.
이 요정 놈의 악랄함은 이미 익히 알고 있었지만 새로운 영역을 맛본 기분이랄지.
정말 이놈들이 실체가 있어서 눈앞에 있었다면 이번에야말로 두들겨 팼을지도 모르겠다.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래, 이젠 화도 안 난다. 새로운 유형의 음흉함을 보여도 이젠 요정 놈이 요정했다, 라는 느낌이랄까. 나는 머리를 쓸어올렸다.
한동안 말이 없자 마법사가 나를 다시 불렀다.
“영애?”
내가 죽을지도 모르는 건 둘째 치고, 그럼 이 남자는?
이 남자도 졸지에 세계의 오류에게 살해당할지도 모르는 처지가 된 거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요정 놈에게 남자주인공으로 선택되는 바람에!
순간 이 사람에게 동질감을 느꼈다.
선택하지 않았던 일로 강요받고 억지로 운명이 주어진 기분이 어떤 기분인가.
아주 더럽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니까.
사락사락, 부드러운 천 소리와 함께 졸린 듯 잘생긴 얼굴이 바로 앞으로 다가왔다.
예쁜 백금발 사이로 긴 눈매가 시선에 들어왔다. 반듯한 콧날이 옆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진다.
아,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저기, 제 이마는 왜 짚으시죠?”
“얼굴이 빨간데, 열이 나는 건가 싶어서요?”
“열은 없어요. 혹시나 있어도 화가 나서 나는 걸걸요. 사람이 극도로 분노하면 열이 오르기도 하잖아요.”
“……내 얼굴을 보다 별안간 왜 극도로 분노하는 일이 생겼는지 모르겠지만.”
남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더니 알았다는 듯이 눈을 깜빡였다.
“아……! 혹시 내 얼굴 탓인가요?”
“그럴 리가요. 당신 얼굴은 내 눈을 아주 즐겁게 하고 있어요.”
거기까지 말하다 말고 입을 합 다물었다.
내가 지금 뭐라는 거야. 나도 모르게 생각이 그대로 빠져나가 버렸다.
“끙…… 어쨌든 얼굴이 빨개진 이유는 화가 나서가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뭐 때문에 빨개진 건지, 짐작이 잘 가니까.
쉴 새 없이 뛰고 있는 이 심장 말이지.
‘으으, 좀 적당히 하지.’
가슴을 툭툭 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대신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허공에 요정의 창이 약이라도 올리듯 둥실둥실 떠 있었다.
‘야, 요정. 넌 알고 있던 거지?’
몰랐을 리가 없다. 방금 전 반응으로 보아 더욱 확실해졌다.
얌마, 내가 살해당할지도 모른다는 걸 알면서도 날 주인공 삼은 거냐고!
[요정은 고민해요. 지금 전달할 이야기는 세계의 뿌리 이야기! 빙의자님에겐 본래 전달할 수 없는 이야기에요 (。•́︿•̀。)]
내가 무어라 분노하기 전에 또 다른 창이 불쑥 떠올랐다.
[빙의자님을 너무너무 아끼고 사랑하는 요정이 새로운 팁을 전달합니다!]
[~사실 빙의자님이 세 번째 이야기 주인공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세 가지나 있었다?! 뿌슝빠슝~]
내용을 보는 순간 인상을 확 찡그렸다. 이게 진짜.
[첫번째는 새로운 남자주인공 ‘발데르(대마법사)’와 악녀 후보 ‘로잘린 헤벤’이 심각한 원수지간인 것]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잖아. 게다가 헤벤 공녀 언니 쪽의 일방적인 미움인 것 같더만? 그래서 다음은?
[두 번째는 ‘세계의 오류’의 위치. ‘로잘린 헤벤’이 주인공 ‘악녀’가 될 경우 99.9%로 또 한번 주인공이 살해될 것으로 판단.]
야, 그럼 나는? 나는 어쩌라고!
[또 다른 ‘악녀’ 후보인 ‘리제 트리샤’가 살해될 확률은 92.3%, 빙의자 님이 주인공이 될 경우 판독 결과 살해될 확률은 76.2%, 빙의자님이 생존에 좀 더 유력했어요! (╥╯^╰╥)]
뭐야, 저 애매한 숫자는? 70퍼센트도 이미 높은 거 아니야? 높다고! 매우 높다고!
[세 번째 이유, 빙의물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일까요?]
이윽고 떠오른 요정의 한마디에 나는 흘끗 발데르를 보았다. 그를 보는 순간 정답을 알아차렸다.
[정답, ‘빙의자’여야 한다. 결국, 주인공님밖에 없었다는 것이죠! ヾ(๑ㆁᗜㆁ๑)ノ”]
[아, 이런 실수! 빙의자님! 꺄르륵]
이게, 진짜! 참지 못하고 소리치려는 그 순간, 누군가 내 손을 잡았다.
고개를 돌리면 살랑 흔들리는 백금색 머리카락이 보였다. 알아차리기도 잠시, 파지직 소리와 함께 요정의 창이 강제로 사라졌다.
내 눈이 커졌다.
“흐으음, 역시.”
내 손을 잡은 손이 부드럽게 까딱거렸다. 커다란 손은, 내 손을 가득 덮은 걸로 모자라 손끝으로 손목의 가장 여린 살을 매만지고는 떨어졌다. 스친 흔적이 흡사 베이기라도 한 듯 얼얼하게 남았다.
“무언가 있기는 한 모양이네.”
뚝 짧아진 말끝, 여전히 여유롭고 부드러운 말씨.
그러나 전과 다른 긴장감이 느껴졌다.
“안 그래요? 예비 연인님.”
고개를 든 순간 나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눈앞에는 졸린 눈의 남자는 온데간데없이 눈을 명료하게 뜬 남성이 나를 마주하고 있었다.
신비로울 정도로 깊고 단정한 시선 속으로 예쁜 보라색 아지랑이가 일렁거렸다.
마치 사막 위의 보랏빛 웅덩이가 고인 것처럼 거대한 존재감을 드러낸 눈동자였다. 숨이 고였다. 졸린 눈을 할 때는 보이지 않던 반듯한 날카로움이 남자의 낯을 스쳤다.
“저게 당신을 괴롭히나요?”
다정하지만 오싹할 정도로 황홀한 목소리에 목 뒤로 솜털이 쭈뼛서는 기분이었다.
내가 주춤 물러나자, 발데르는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더니 나를 쫓아 내가 멀어진 만큼 거리를 좁혔다.
“왜 피해요, 섭섭하게.”
“…….”
“우리, 이제 협력 관계 아닌가?”
남자가 천천히 바닥에 무릎을 대고 앉았다.
“나랑 연인을 하자면서, 왜 눈도 못 봐요?”
이 시선을 오래 마주하면 안 될 것 같은 위기감에 숨을 들이켜며 시선을 빗겨나갔다.
“저, 음, 대마법사님? 그렇게 가까이 오지 않으셔도 그, 대화는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하하.”
“대화.”
“네, 대화.”
“좀 더 가까이서 보고 싶은데, 안돼요?”
네. 제 심장이 안 될 것 같아요.
다행히 발데르는 더는 가까이 오는 대신 꽤 가까운 거리에서 나를 응시했다. 다시 감지 않은 눈으로 여전히 신비로운 빛이 아롱졌다.
“좋아요, 대화해요. 이렇게. 아깐 그건 뭔가요?”
발데르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가 ‘물어도 대답해줄 것 같지는 않고.’ 하고 덧붙였다.
베키가 올 시간이 됐는데.
어째서인지 베키마저 오지 않는 방은 적막, 긴장, 그리고 알 수 없는 야릇한 분위기가 맴돌았다.
“자꾸 내가 아닌 허공을 보잖아요. 그리고 허공에서는 기이한 힘이 느껴지고……. 혼자 허공을 보다 협박이라도 당하는 것 같이, 사색이 되질 않나.”
“하하, 제가 지병이 있잖아요? 그 병으로 인한 가끔 환시나 환청을 듣는…….”
일단 본능적으로 변명을 주워 삼켰지만 깨달았다.
씨알도 먹히지 않았구나.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 앞에서 나도 덩달아 침을 삼켰다.
“뭐, 좋아요. 당신 옆에 있으면 차차 알게 되겠죠.”
발데르가 내 손을 가져와 부드럽게 거머쥐었다. 손 끝의 감촉에 쿵쿵 심장이 뛰었다.
이제는 요정이 억지로 만들어 낸 설렘 때문인지, 긴장 때문인지, 놀란 건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나는 연민이라곤 없는 사람인데, 참 이상하죠.”
“네?”
발데르가 허공을 잠시 응시했다. 저곳은 조금 전까지 요정의 창이 띄워져 있던 곳이었다.
“조금 전 당신의 모습이 무척…… 절망적으로 보여서.”
“……으음?”
“안쓰럽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내가? 난 그저 요정의 창을 보면서 요정 저 XX를 죽여 버리겠단 생각밖에 안 했는데? 대단히 빡친 표정이라면 모를까. 얼떨떨했다.
“뭐, 표정을 보아하니 본인 스스로는 자각이 없나 보네요?”
“무슨 소릴 하시는 건지 모르겠지만…… 딱히 절망한 적은 없는데요……?”
절망은 무슨. 아무리 거지 같아도 저승보단 이승의 똥밭에 구르는 게 최고라고. 설마, 절망해서 체념하기라도 했으면 이미 탈락해서 죽었겠지. 악착같이 살아있는 걸 보면 모르겠는가.
“그래요. 본인이 그렇게 생각한다면야. 그래서 방금 사라진 건 뭔데요?”
“으음…… 꼭 얘기해야 하나요?”
그러자 발데르가 작게 미소했다. 눈꼬리가 그대로 접히는 부드럽고 단정한 웃음이었다.
그가 내 손끝에 작게 입을 맞췄다. 입술이 닿는 순간 작은 빛이 터져 나왔다.
“말하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이 또한 알아내는 재미가 있을 테죠.”
“재미요?”
“네. 영애. 어떡하면 좋을까요. 흥미롭다 못해…….”
바로 앞에서 마주한 눈은 천진난만하기도 했고, 처음 놀이동산을 가본 아이처럼 흥분한 것 같기도 했으며…… 이윽고 깊어지는 눈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묘하고 야릇한 것을 품었다.
“진심으로 당신에게 빠질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