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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185화 (185/281)

◈185화. 3. 대마법사와 악녀 메이커 (24)

아찔하리만치 야릇한 손길을 자각하기도 잠시 나는 화들짝 놀라 어깨를 떨었다.

뭐야. 그렇게 말하면.

“아니, 그걸 직접 밝혀버리면 어떡해요? 그보다, 그런 말을 황녀님 앞에서 하면 어떡해요!”

“아. 밝히면 안 되는 거였나요?”

“당연하죠. 밝히면 무슨 의미가 있어요?”

마법사들은 다 똑똑하다며? 이 사람이 왜 이렇게 맹한 대답을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흐음, 미안해요. 황녀님과는 친한 것 같아 이야기해도 되는 줄 알았어요.”

“네?”

“날더러 울면서 당신을 살려달라고 하던 분이니…… 비밀 정돈 공유하는 줄 알았거든요?”

난 그대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순간 머릿속에 두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하나는 육아물 메인 퀘스트에서 내가 쓰러졌을 때. 다른 하나는 아버지가 쓰러진 뒤에 수도로 올라가려다 그대로 휴고의 폭주를 막고 쓰러졌을 때.

“이건 내 실수네요. 미안해요. 이젠 다신 그러지 않을게요.”

래빗은 이 두 번 모두 펑펑 울었다고 했다.

할 말이 없어졌다.

그 사이 발데르가 어느새 내 손을 살그머니 잡고 아프지 않게 살짝 눌렀다. 눈이 마주치자, 나른한 눈이 그대로 뜨이더니 그대로 배시시 휘어진다.

날카로운 눈이 이토록 야릇한 미소에 어울릴 수 있다니, 실로 여우에 홀린 듯한 기분이었다.

“응? 미안해요.”

발데르의 손이 툭, 손목의 가장 안쪽을 스쳤다. 나도 모르게 손을 움츠렸다. 당신 스킨십은 전연령 금지인 것 같단 말이야.

심장이 뛰고 절로 얼굴이 빨개지는 느낌에 끙 숨을 내쉬었다. 이놈의 심장!

“모냐, 모야. 달린. 이건 대체…….”

“끙, 황녀님 제가 직접 설명할게요. 이건 사실.”

“이제 역할극도 하는 고냐?”

“네, 역할…… 네?”

래빗이 알수 없단 표정으로 나를 한번 발데르 쪽을 한번 보았다. 특히나 발데르의 가면을 오랫동안 보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알았다는 듯이 나를 보며 끄덕였다.

“그론 취향이었누냐?”

“네? 아뇨, 잠깐만요, 황녀님.”

“취향 존듕한댜.”

아니, 기다려보세요. 황녀님. 무엇을 생각하시든 그거 아니에요. 아니라고. 나는 서둘러 손을 내저었다.

이미 래빗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상상하는 표정인지라, 난 얼른 사정을 설명했다.

“협력 관계라고?”

“네, 맞아요!”

래빗은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좌우지간 나름의 이해를 한듯한 얼굴이었다.

“흐움, 근데 말이다. 달린. 그렇다면 네 얼굴은…….”

래빗이 나에게 총총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자연스럽게 고개를 내려 뺨을 내준 나는 곧 눈을 깜빡였다.

왜인지 바로 앞에 놓인 내 어린 친구의 얼굴이 몹시도 염려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나눈 내 감정에눈 서툴디만, 한푱생 남의 감정운 날카롭게 파악하면서 살았기에 눈치가 없찌눈 않아. 달린.”

아. 이건 래빗이 아니라 로아타 황제로서 하는 말이다. 나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래빗의 뒤로 언젠가 보았던 자애로운 황제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느낌이었다.

“왜 갑자기 이로케 뵨한 고지? 네 얼굴운, ……빠진 얼굴이야.”

“…….”

래빗이 의도적으로 말을 생략했지만, 빠진 단어는 바로 알아들었다.

‘사랑’이다.

나와 오래 함께 했던 아기 황녀님은 내 상태를 너무나 잘 알아보았다.

“왜지? 너눈 생각보다 이성적이고 챠가운 사람인데.”

가슴이 뭉클한 한편 조금 복잡한 심경이었다. 바로 옆에 발데르가 있으니, 제대로 대답할 수 없었다.

발데르에게 하나씩 비밀을 들키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래빗에게 먼저 이야기했던 ‘계시’에 대해서 꺼내고 싶진 않았으니까.

“…….”

나를 빤히 바라보던 아기 황녀님이 끄덕였다.

“……이것도 ‘그것’과 같은 일이도냐?”

내가 갑작스럽게 북부를 갈 때도 래빗은 물었다. 정해진 일이었냐고.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래빗은 그것으로 되었다는 듯 눈을 크게 깜빡였다. 곧 시선으로 천진난만한 느낌이 되돌아왔다.

“흐웅, 새 애인 후보가 생굤다니 축하 파티룰 해야 하눈 곤가?”

“아뇨, 그런 축하는 받고 싶지 않아요. 황녀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정말 그렇게 된 사이도 아니고…….”

그럴 예정도 없는데요. 사실 세 번째 이야기만 끝나면 뭐든 간에 푹 쉬고 싶은 생각만 들 정도였다.

래빗이 방긋 웃었다.

“구래. 네가 좋운 것먄 하쟈, 달린.”

그러더니 그녀가 발데르를 한번 보았다.

“어디 보자, 허우대눈 멀쩡한 고 같운데. 이것 참. 방해눈 하지 않겠다고 했눈데…….”

“네?”

“내가 방해하지 않아두 아주 험냔하구나.”

래빗은 뜻 모를 소릴 하더니 내 손을 꾹 잡아주었다. 손바닥에 장난치듯이 손가락을 살살 문지른다.

‘괜찮을 거다.’

음, 난 안 괜찮은데. 그럼에도 그 말이 어쩐지 큰 위로가 되었다.

“이봐, 대마법사.”

래빗이 손가락을 까딱까딱 흔들며 방긋 웃었다.

“우리 달린이룰 아껴줄 자신운 있눈 곤가?”

“글쎄요.”

“모야, 아직 우리 롤린이에게 빠지지 않운 고냐!”

그냥 협력 관계라고 분명히 말했건만 래빗이 폴짝폴짝 자리에서 뛰었다. 이걸 말려야 하나.

의외였던 것은 그냥 평소처럼 졸린 듯한 웃음을 지으며 넘겨버릴 줄 알았던 발데르가 가면을 잠시 벗었단 점이었다.

“글쎄요, 황녀님.”

잘생긴 그의 얼굴로 오묘한 미소가 스쳤다.

“지금 당장 대답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니지만……. ”

“웅?”

”곧 그렇게 될 것 같네요.”

* * *

세상에 일이 너무 쉽게 술술 풀리면 한 번쯤 의심해보란 말이 있다.

어딘가에서 잘못된 줄도 모르고 잘 풀린 걸로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세 번째 퀘스트들은 의아할 정도로 쉬웠다.

일단 서브 퀘스트인 헤벤 공녀의 협력을 얻기 위해 공녀 언니의 파트너를 찾아주는 과정이 꽤 수월하게 풀렸고, 생각보다도 더 적합한 후보를 찾았다.

물론 그 대상이 성격 파탄에 가까운 황태자란 점이 마음에 걸리지만 공녀 언니는 나처럼 그놈 술수에 쉽게 당할 사람도 아니다.

거기다 알아보니 공녀 언니가 급한 게 아니라 황태자 쪽이 더 급한 상황이더라고? 일이 잘 풀릴지도 몰랐다.

‘거기다 메인 퀘스트 쪽도 어렵지만은 않단 말이지.’

메인 퀘스트도 사실 크게 보자면 아주 쉬운 편이다.

그저 곁에 있는 발데르를 보면서 쉴 새 없이 뛰는 망할 심장이나 발긋 열이 오르는 뺨만 잘 견디면. 이런 불편함만 감수하면 술술 풀리는 셈 아닌가?

‘그나저나 이번 메인 퀘스트는 분명 요정 그놈의 지령 5개를 완수하면 된다고 했는데, 두 번째 지령은 어떻게 완수하는 거지?’

현재 메인 퀘스트 중 두 번째 지령은 ‘남자주인공에게 첫눈에 반하기’였다.

그렇다면 지금 이 지령은 이미 성공한 셈 아닌가?

‘어째서 다음 세 번째 지령으로 넘어가지 않는 걸까.’

혹시, 이건 그저 목표고 완수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조건을 충족해야 하는 게 아닐까?

어쨌거나 우리 아기 황녀님을 지키기 위해 신전까지 끌려가 쓰러졌던 거나 북부 대공님의 폭주를 막기 위해 온몸으로 뛰었던 생존 서바이벌에 비하면 훨씬 수월한 건 사실이다.

‘끙, 몸이 편해서 마음이 자꾸 불편해지는 건가.’

[이런, 요정은 우리 빙의자님의 영민함에 또 한 번 놀랐어요!]

[두번째 지령 완수 조건이 공개됩니다! ヾ(๑╹ꇴ◠๑)ノ”]

……허, 요정 이 XX가?

인생이 아주 지루할 틈을 안 만들어주네?

나는 어처구니가 없음에 헛숨을 턱 뱉었다.

막 요정이 다음 창을 띄운 순간,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흐응, 영애? 어딜 그리 열심히 보고 있나요?”

간드러지면서도 우아한 목소리. 고개를 돌리니 공녀언니가 턱을 괸 채 픽 웃고 있었다.

“어디, 아주 잘생긴 영식이라도 있나요? 나도 같이 봐요.”

“죄송합니다, 공녀님. 잠시 무언갈 생각하느라…….”

“괜찮아요. 손님을 초대한 집주인이 딴생각에 잠기는 건 사실 무례한 행동이지만, 영애는 괜찮게 느껴지네요. 흐응, 귀여워서인가?”

그래, 여긴 우리 저택의 응접실이었지. 거기다 나는 저 언니를 초대했고.

“그래, 오늘 영애가 내게 즐거운 소개를 시켜준다고 해서 아주 기대가 많아요.”

그랬다. 오늘은 이 공녀 언니에게 애인 후보, 정확하게는 애인 행세 상대 배우를 소개하는 날.

헤벤 공작 가로 데려가기에는 당사자들 모두 큰 영향력을 가진 인물들이다 보니, 만남의 장소는 자연스럽게 우리 저택이 되었다.

‘마침 부모님도 자리를 비우셨고 말이지.’

“그래서 어떤 잘생긴 영식을 소개해줄 생각이신가요?”

“……으음, 그, 부디 공녀님의 마음에 드시기만을 바라는 마음이에요.”

그래야, 언니를 스승님으로 모시고 제대로 배워서 얼른 이 세 번째 이야기를 탈출하지.

사실 좀 조마조마한 마음이다. 황태자를 본 순간 이 언니의 반응이 어떨지 상상도 가질 않는단 말이지.

헤벤 공작가에 가서 미리 말이라도 해둘까 싶었지만, 그곳으로 가는 걸음이 영 꺼려졌다.

이 언니를 굳이 우리집으로 부른 것엔 비단 황태자 때문만은 아니기도 했다.

‘생각해 보니, 세계의 오류가 정말 헤벤 공작가 안에 있다면…….’

이 공녀 언니도 위험한 거 아니야? 요정이 무려 주인공 후보로 꼽았던 인물이다.

어쩐지 세계의 오류가 그곳에 있는 게 이 일과 관련 없진 않을 것 같단 말이지.

‘이를테면 이 언니가 새로운 주인공이라도 되면 곧바로 살해할 준비를 하고 있다거나?’

[빙고! 요정은 빙의자님의 판단력에 애정을 +1 추가해요! (*´∇`)ノ]

그딴 거 필요 없어!

나는 짜증을 담아 푸른 창을 노려보았다.

‘진짜로 살해당할지도 모른단 거야?’

……젠장. 내 로판 돌려줘.

도대체 왜 꿈과 희망과 낭만이 넘치는 로판이 어째서 추적 스릴러가 된 건데!

그 순간 똑똑 창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두 번 두들기고 다시 세 번을 두들기는 소리.

‘왔구나!’

아마도 발데르에게 부탁해 이동 마법을 사용해서 온 래빗과 황태자일 터였다.

창문으로 고개를 돌리려는데, 그 순간 내 앞으로 조금 전 마저 다 확인하지 못한 창이 불쑥 떠올랐다.

[두 번째 지령 완수 조건이 공개됩니다!]

부디 놓치지 말고 똑똑히 보라는 듯이.

[퀘스트(메인)- ‘필승! 새로운 세 번째 이야기에서 살아남기!’

두 번째 지령 달성 조건이 해금됩니다.

2) 남자주인공에게 첫눈에 반하기

달성 조건: ‘남자주인공’에게 애정을 고백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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