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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186화 (186/281)

◈186화. 3. 대마법사와 악녀 메이커 (25)

나는 들어오는 두 사람에게 인사하는 것도 잠시 잊고 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뭐야, 이건 뭔데?

‘애정을 고백하라고?’

지금까지 요정이 딱히 내게 합리적이거나 논리에 딱딱 들어맞는 미션을 내린 적이 거의 없긴 한데……. 이거야말로 해괴한 미션들 중 하나로 남을 것 같았다.

첫눈에 반하라면서 강제로 설레고 두근거리게 만들어주질 않나. 그러면서 이제 그만 핑크빛 연애 한번 해보라고 부추기질 않나.

거기다 이제는 애정을 고백하란다.

‘화내기 전에 말이지…… 애정 고백이 뭘 고백하라는 건데?’

뭐 좋아한다고 고백이라도 하라고?

그럼 좋아한다, 사랑한다 말하라고 하면 될 것을……. 용어 선택이 왜 이리 애매해?

그러나 요정의 창은 더 떠오르지 않았다. 보통 이런 건 내 해석에 맡긴다는 소리인데.

‘그리고 보통은 이래 놓고서 내 답이 틀려도 딱히 도와주거나 정정해주지도 않지.’

좋아한다고 고백하기. 사실 이거야 딱히 어렵진 않다.

생각해보라. 정말 좋아하는 사람한테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게 어렵지, 마음이 없는 상대에게 말하는 게 무에 어렵겠어?

‘뭐, 문제가 있다면 강제로 심장이 뛰고 흥분하게 된다는 점인가…….’

강제로 짝사랑 체험하는 건 참 기묘하긴 한데, 엉뚱한 소리지만 이런 건 좀 힘줘서 참을 수 있게 해주면 좋겠다. 그 사람이 근처에 올 때마다 심장이 먼저 반응하게 되니 말이다.

지금도 그러했다.

창문이 활짝 열리고, 커튼이 크게 나부꼈다. 한들거리는 백금발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대마법사는 나와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옅게 미소했다. 부드러운 눈웃음에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옆으로 래빗과 황태자의 모습이 보였다.

분명 래빗이 나를 의아하게 보는 걸 알면서도 눈앞의 남자에게서 눈을 떼어낼 수 없었다. 심장을 꾹 누르는 동안 콩콩 작은 발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나는 고개를 돌렸다.

“롤린.”

“안녕하세요, 황녀님. 좋은 오전이에요.”

누군가 잽싸게 래빗의 옆으로 얼른 걸어왔는데, 말할 필요도 없이 황태자였다.

나는 그에게도 인사를 올렸다. 일단 이 자리의 주인공이었다.

“오랜만입니다, 황태자 전하.”

“추수제 연회에서 보았긴 합니다만, 예. 이렇게 인사를 나누는 건 오랜만이군요?”

추수제 연회에서는 님이 저를 웃으면서 노려보느라 바빴잖아요.

바쁜 틈틈이 래빗과 있는 나를 어찌나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는지 옆통수에 구멍이 뚫리는 줄 알았다. 그나저나 이 사람과만 인사를 나눌 때가 아니었다.

오늘의 주인공은 하나 더 있었으니까.

나는 발데르에게도 인사와 함께 여기까지 래빗과 황태자를 데려와 줘서 고맙다고 인사한 뒤, 몸을 돌렸다. 그곳에는 대체 이게 무슨 광경인가, 헛웃음을 짓는 공녀 언니가 있었다.

어처구니없는 표정이었다.

“에스테 영애.”

그녀는 나를 부르고서는 잠시 생각하더니, 앞으로 다가왔다.

어쨌거나 이 자리에서 황태자를 무시할 수는 없었을 터다.

“창공의 날개에 안식의 숨결을. 위대한 날개는 패배하지 않을 터이니.”

“날개에 앉은 영광이 그대를 가호하길 바라지.”

공녀 언니가 인사하는 모습은 어설픈 예법으로 연명해오는 나와 다르게 몹시도 우아했다. 그림에서 톡 튀어나온 것 같았다.

‘으음…… 다만, 그, 파지직 전류 같은 게 흐르는 것 같은데…….’

황태자와 시선을 교환하는 순간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전류가 파바박 튄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긍정적인 거 말고 부정적인 거.

“아르슈타인, 파이얀, 도 테르시안테. 체테르파시안. 미시안슈. 신께 영광스러운 진명을 받은 고귀한 자를 뵈어 영광입니다. 슈리안 리온 비센 황태자 전하.”

이어진 말들에 나는 숨을 꿀꺽 삼켰다.

‘잠깐만 저거.’

……내가 예전에 맨날 못 부르고 기억 못 해서 라이칸에게 매우 혼났던 그 이름 맞지?

황족들만 받는다는 ‘진명’? 와, 더럽게 기네.

‘나 들었어도 기억 못 했겠다.’

거기다 듣기에 공녀 언니가 너무 수월하게 술술 말해서 그렇지, 발음 하나하나가 매우 까다로웠다. ‘R’ 발음과 ‘L’ 발음이 왔다갔다 하는 기분이랄까.

황태자의 눈웃음이 깊어졌다.

“이야, 과연. 수많은 귀족 중에서도 그대의 발음이 가장 멋지네요. 헤벤 공작 가의 보물. 공녀를 오랜만에 봅니다.”

“추수제에서 뵈었으니, 오랜만이라 칭하실 정도는 아닌 것으로 아옵니다. 또한…… 외우지 못한 자들의 응징을 봐온 사람으로서 어찌 고귀한 이름에서 실수할 수 있겠습니까?”

“하하하하. 영애, 모르는 자가 들어서는…… 제가 제국의 귀한 신하들을 쥐잡듯 잡기라도 한 줄 알겠습니다?”

“어머나, 어찌 그런 말씀을 드리겠습니까. 혹시라도 그리 들리셨다면 사죄드리겠습니다.”

……엄. 뭐지. 그러니까 이거.

‘싸우는 거 맞지?’

해석하자면

‘황태자 니가 이름으로 얼마나 귀족들을 쥐잡듯 잡았는데, 내가 더러워서 외우고 말지.’ ‘엥? 아닌데? 나 잡은 적 없는데 착각 아님?’ ‘그래, 그렇게 듣고 싶으면 그래라 ^^’ 정도로 해석 될 수 있는 거 아닌가?

‘아니 그보다, 두 사람 사이가 생각보다…….’

더 나빠 보이는데. 빈말로조차 좋다고는 할 수 없어 보였다.

제국을 떠받치는 공신이자 공작 가의 무남독녀 외동딸과 장차 황제가 될 강력한 황태자.

서로를 모를 수가 없는 사이니 당연히 알고야 있을 걸로 알았지만…….

그 순간 공녀 언니가 내 쪽으로 휙 몸을 돌렸다.

곧 화사하게 웃는 미소가 떠올랐는데, 그 모습이 예쁜 장미보다는…… 파리지옥이 떠올랐다.

“에스테 영애, 잠깐 이야기 좀 할까요?”

마치 엄마가 ‘너 잠시 여기 앉아봐.’ 하고 부른 기분이었다. 잘못한 것부터 시작해 잘못하지 않은 것도 잘못했다고 빌어야 할 것 같은 기분?

웃고 있지만 어딘가 어두운 기운이 느껴지는 얼굴에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흐음, 나를 불러놓고 주최자를 데려가겠다는 건가요?”

손님을 불러놓고서 주인을 데려가는 건 사실상 황태자에게 무례가 되는 일이었다.

문제 삼자면 삼을 수 있겠지만 본인도 공식적으로 방문한 건 아니라 그렇게 하진 못할 텐데……?

“아뇨. 생각해보니…… 굳이 다른 곳에서 이야기할 필요는 없겠네요. 에스테 영애.”

“네, 네?”

공녀 언니의 눈이 화려하게 휘어졌다.

“영애가 데려온다던 ‘후보’가 저쪽, 아니, 저분인가요?”

음, 방금 일부러 저쪽이라고 말씀하신 것 같은데요.

나는 눈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의외로 공녀님은 다음 순간 그리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저 생각하는 표정이었을 뿐.

“보아하니 모두 말하고 모셔오지는 않은 것 같고, 상황을 봐서는 이 자리에서 대략의 사정을 이야기하려던 모양이죠?”

“네, 네! 맞아요.”

저 황태자에게 어찌 모든 사정을 다 말한단 말인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황태자에게?

사실 오늘 자리는 공녀 언니의 반응을 먼저 보려 했고 또 의견을 묻는 자리였는데…….

저 반응을 봐서는 무리겠군.

“그럼 사정을 설명하기 전에 내가 미리 거절할게요. 에스테 영애.”

“허?”

황태자가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졸지에 걷어차인 처지가 됐으니 기분이 그리 좋진 않겠지만 수습은 자리를 만든 내 몫이라 생각했다.

일단 황태자랑 래빗은 다시 돌려보내거나 음 다른 방으로 모실까?

어느새 래빗이 내 옆으로 다가와 슬쩍 내 치마를 잡아당겼다.

눈짓이 ‘텄지?’ 하는 시선이라 끄덕여주었다. 네 황녀님, 우리 텄어요. 아쉽게도.

사실 돌려 말하는 것보다야 이렇게 산뜻하게 거절해주는 쪽이 낫다.

“음, 혹시나 조심스럽게 하나 여쭙자면 사정을 한번 들어보실 생각은…… 없으실까요? 공녀님.”

“네, 없어요. 영애. 사정을 아는 순간 발을 빼기 힘들 것 같은데?”

“…….”

그건 그렇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으니 여기서 헤어지는 게 산뜻하겠다.

“으음, 그럼 우선 두 분께 폐를 끼쳐 죄송하다는 말씀 드려요. 우선 공녀님께서는 다른 응접실로 안내드리고 황태자 전하와 황녀 전하는 다시 황성으로 귀가를…….”

“어라, 내 의견은 물어보지 않나요?”

황태자가 싱글 웃으며 손을 들어 올렸다. 어라, 저 인간 눈이 웃질 않는데.

설마 자존심이라도 상했나?

하긴 이때까지 황태자의 행실을 보면 여기서 자존심을 내세우고도 남을 인간이긴 하지.

“상황 대충 알겠고, 웬만해선 나도 산뜻하게 물러나고 싶지만, 내가 조금 급해서요. 공녀.”

“……무슨 사정인지 모르겠으나.”

“아, 좀 들어줬으면 하네요? 생각해봤는데, 이대로 내게 필요한 사람 찾는 것도 일이고…….”

황태자가 방안을 느릿하게 훑다 잠시지만 나와 눈이 마주쳤다. 깊고 푸른 눈동자가 내게서 떨어졌다.

“부탁할 만한 사람에게 말이라도 걸었다간 동생들에게 미움을 살 것 같으니.”

“…….”

“난 내 동생들에게 절대 미움받고 싶진 않거든요.”

“그래서요?”

“이 자리에 있는 공녀만큼 적격인 사람이 없는 것 같아서.”

황태자가 양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나는 좋은 배우가 필요하고 보아하니 공녀도 비슷한 배우를 찾고 있는 것 같은데. 필요에 있어서만큼은 좋은 협력자가 될 것 같지 않나요?”

그 말에 나는 나도 모르게 지금까지 줄곧 침묵하던 대마법사를 보았다. 말을 시키지 않았더니 굳이 말을 걸지도 않는, 방안의 장식처럼 서 있는 남자.

고요히 서 있기만 하는데도 주의를 기울여 다른 곳으로 시선을 피하지 않으면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좋은 협력자. 이 단어에서 그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날 써먹어요. 공녀. 필요할 때 도와주고 끝나면 미련 없이 헤어지는 최고의 파트너가 되어줄 테니.”

공녀 언니가 손으로 입술을 살풋 가렸다. 어째 이 언니도 웃는 모습이 황태자랑 비슷했다.

입매는 예쁜 곡선을 그렸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는.

“어머나, 고고하신 황태자 전하께서 제게 아쉬운 소릴 다 하시고.”

“…….”

“어린 시절 그 어려운 진명을 틀릴 때면 비웃어주시던 분께서?”

“……내가 말입니까? 기억이 나질 않는군요.”

……똑같은 사람들끼리 만난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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