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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187화 (187/281)

◈187화. 3. 대마법사와 악녀 메이커 (26)

“뭐, 좋아요. 받아들이는 대신 조건이 있어요. 말씀대로 저 또한 좋은 배우를 찾고 있으며 황태자 전하께서 제 요구를 들어주기 어려울 시에는 바로 파기했으면 하는데, 상관없으시죠?”

“……허?”

“이토록 완벽하신 분께서 설마 한낱 연기 하나 못하시겠어요?”

“공녀, 내가 아쉬운 처지긴 하지만 나를 이렇게 도발해서 좋을 건 없을 거예요. 하지만, 그 조건은 기꺼이 따라드리기로 하죠. 당신의 말처럼 못할 것은 없으니.”

“…….”

엄마야, 내 멋대로 하겠다고 선언하는 공녀 언니나 그래 어디 한번 해봐라, 대신 뒷감당은 네 몫이다 대놓고 선언하는 황태자나…… 둘 다 무서워. 무서운데…….

‘……흥미롭다!’

로판 경력 N년 차, 오랜만에 독자로서의 혼이 타오르다.

딱 이렇게 표현하면 좋을 것 같은 열의가 흥미로움과 함께 속에서 활활 솟구쳤다.

팝콘을 먹고 싶다는 열의였다!

물론 이 세계에 팝콘은 없지만 미리 내온 다과 중에 아주 작아 한 번에 와구와구 먹을 수 있는 작고 하얀 과자가 있었다. 나도 모르게 하나씩 주워 먹으며 살펴보다가 문득 래빗이 떠올라 돌아봤더니.

……같이 과자를 먹으며 보고 있었다. 그것도 흥미진진하게.

눈이 마주치자 래빗의 얼굴이 더욱 잘 보였다. 너무나 흥미롭다는 표정 말이다.

“……롤린아, 첫째놈이 조로케 빡치눈 곤 처음 바따, 아주 흥미로운 골?”

“세상에, 황녀님. 벌써부터 이런 재미를 깨달으시다니…….”

래빗의 작은 속삭임에 나는 끄덕끄덕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이론 재미라니? 몰 말하눈 고야?”

“황녀님 자로고 구경은 불구경, 싸움 구경, 마지막으로 남의 연애사가 가장 재미난 법이죠.”

“오오오……! 하디만 쟤둘운 연애룰 하눈 게 아니쟈나?”

“가짜 연애라도 보는 재미가 있다. 이런 말이죠. 저길 보세요, 재밌잖아요?”

“그로치!”

우린 서로를 마주 보며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가 멈칫했다.

발데르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윽…….’

저기서 기 싸움 중인 공녀 언니와 황태자에게 들리지 않게끔 래빗과 함께 목소리를 낮추긴 했지만 바로 옆에 있는 발데르에게 들리지 않게 낮출 수는 없었다.

그럼 거의 래빗에게도 들리지 않을 수준이니까.

나를 관찰하겠다는 말이 과언이 아니었던지, 발데르는 마치 내 솜털까지도 보겠다는 기세로 빤히 응시했다.

시선이 조금 낯간지럽고 부담스러울 즈음,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대화는 마법으로 차단했습니다.”

“……네?”

발데르가 졸린 눈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들리길 바라지 않는 대화 같아서요?”

“아…… 그건 맞는데.”

짧은 시간에 생각도 하고 그런 마법도 쓰고 했다고? 의외의 배려였다.

“황태자 전하께서 수준급 검사이시니 듣고자 하면 이 방 내에 작은 숨소리조차 들을 수 있습니다.”

그건 그렇지. 라이칸도 뛰어난 검사였고 래빗은 더욱 대단한 검사였으니, 잘 알았다.

“으음, 감사해요.”

“도움이 되었다니 기쁘네요.”

부드럽게 웃는 미소에 심장이 다시금 뛰었다. 아이고, 이건 시도 때도 없이 난리네.

가슴을 통통 두드리고는 고개를 돌렸을 때, 어느새 공녀 언니와 황태자의 대화는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된 듯 끝나 있었다.

“그래요, 뭐. 에스테 영애.”

공녀 언니가 표독스러운 얼굴로, 거기다 심기까지 잔뜩 불편한 얼굴로 말했다.

“어쩔 수 없이 영애가 데려온 배우님으로 진행해야겠네요.”

황태자가 싱글 웃고 있었다. 저쪽도 어째 웃는데 눈은 웃고 있지 않은지라 영 좋은 표정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서로가 끝내 거절하지 않는 것도 신기했다.

곧 공녀 언니가 표정을 수습하더니, 이내 빙긋 정말로 기쁘다는 듯 미소했다.

“그래도 고마워요. 날 도와줘서.”

그 미소 만큼은 눈까지 어여쁘게 휘어진 기분 좋은 미소인지라 나는 잠시 대답하지 못하고 눈을 깜빡였다. 와, 예쁘긴 진짜 예쁘시네요 언니…….

“에스테 영애?”

“아, 죄송해요, 공녀님. 순간 너무 예쁘셔서 넋을 놓았네요.”

“…….”

“공녀님?”

공녀 언니가 눈을 가늘게 좁히더니 이내 픽 웃었다.

“아, 이렇게 직설적인 칭찬은 정말 오랜만이라. 잠시 놀랐네요. 그보다도…… 비슷한 표현을 빌려서 에스테 영애의 얼굴로 그런 칭찬을 하는 것도 참.”

“네?”

내가 무어라 대꾸하기도 전에 래빗이 답싹 내 다리에 매달렸다.

“공뇨, 그대두 우리 달린이 매력에 뺘져꾼.”

“안녕하십니까, 황녀 전하? 인사드렸지만 또 한 번 드립니다.”

“내게눈 거창한 인사 따위 할 피료 업쏘. 그건 겉치레룰 조하하눈 놈둘이나 챙기눈 고지.”

“……음, 우리 래빗? 오빠를 말로 때리다니 아프구나.”

졸지에 가장 아끼는 여동생에게 저격당한 황태자가 화살에 맞은 척 하면서 과장스럽게 아픈 표정을 지었다. 음, 방금 공녀 언니가 황태자를 보고 극혐하는 표정을 지은 것 같은데…….

“뭐, 어쨌거나 이제 나도 제대로 된 사정을 들을 수 있겠죠?”

황태자가 본래의 정갈한 표정으로 돌아와 당당히 사정을 요구했다. 그러더니 지금까지 침묵하고 있던 발데르 쪽을 눈짓했다.

“그나저나 대마법사가 어째서 이 일에 협조하고 있는 건지, 거기다 왜 이 자리에 계속 남아있는 건지 참으로 궁금한데……. 황제 폐하의 명에도 10번에 9번을 잔다는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불참하는 사람이 말이지요?”

“그걸 정말로 잤습니다, 황태자 전하.”

“오, 대답까지?”

이전에 리제나 래빗이 설명해준 것 외에도 평소에 발데르가 어떤 이미지인가 싶더니, 황태자의 말로 대충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쨌거나 대마법사가 이 자리에 있는 이유 중 하나는 알 것 같군요. 비밀 유지를 위해 맹세 마법이라도 하려는 모양이죠? 뭐, 좋습니다. 나도 비밀이 새어 좋을 건 없으니.”

엄……. 그건 아닌데. 저 남자는 순수하게 나를 관찰하기 위해 옆에 붙어 있는 거니. 사실을 말하지도 못하고 그저 빙긋 웃어 보였다.

괜히 어설프게 웃었다가 황태자에게 뭔가 있다는 단서를 주고 싶진 않으니까.

다만, 공녀 언니 또한 ‘그래서였어?’ 하는 얼굴로 보는 동시에 ‘그렇게까지 나서주다니…….’ 하는 살짝 감동 어린 표정이라 난감하긴 했다.

공녀 언니가 황태자에게 사정을 간략하게 설명했고, 이 설명에는 공녀 언니의 오랜 짝사랑이라거나 힘들었던 나날 등 여러 감정적인 부분이 빠져 있지만 핵심을 전달하기엔 충분했다.

“비밀 유지를 위한 맹세 마법을 진행하겠습니다.”

어엄? 나는 부탁한 적이 없었지만 발데르는 분위기를 보더니 순순히 나서주었다.

매번 졸린 눈을 하고 있길래 눈치가 없을 것만 같았는데…… 가만 볼수록 나른한 듯 부드러운 얼굴 속 상황파악도 눈치도 빠른 남자였다.

이어서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발데르의 마법을 통해 비밀 유지 서약을 마쳤다.

모든 과정이 끝나는 동시에 황태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선 내가 더 자릴 비울 수 없는 상황이라 다음에 다시 한번 볼까요?”

그는 이 제국에서 가장 바쁜 사람 중 하나였다. 아직 한참은 더 현역으로 있을 황제가 있지만 황제를 도와서 하고 있는 일이 많은 모양이었으니까.

그렇게 황태자와 공녀 언니의 만남은 여기서 마무리되었다.

* * *

한 주가 훌쩍 지났다.

그 사이 황태자와 공녀 언니는 여러 번 몰래 만남을 거쳤고 그 장소는 발데르가 도와줄 수 있단 이유로 언제나 우리 집 응접실이었다.

나야 뭐 흔쾌히 수락했고, 부친과 모친은 요즘 부쩍 낮에 집을 비우는지라 가족들과 마주할 일도 없었다.

“그러니까 첫 만남을 슈르테 호수에서 만난 걸로 하자는 겁니까? 그 시기에 나는 토테 왕국과 회담 중으로 그런 알리바이를 만들기가 어렵습니다.”

“이래서 어렵고 저래서 어려우면 그냥 그만두시는 건 어떠신지요?”

“……한번 잘 만들어 보지요. 이유.”

그 사이 두 사람은 나름의 전략을 세워 두 사람의 첫 만남부터 썸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 탔는지, 서로의 기호를 파악하느라 바빴다.

‘아니, 둘 다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 외우는 건 금방 외우던데……. 익숙해지는 게 문제였지.’

놀랍게도 처세엔 능한 두 사람이 어째 서로 붙여만 두면 미묘하게 극혐하는 표정을 지우질 못하더라? 비교적 둔한 나조차도 알아차릴 정도니 말 다 했지.

‘아, 물론 그런 부분을 포함해 싸우는 걸 보는 것도 재밌지만.’

오늘도 팝콘과 비슷한 하얀 과자를 와그작와그작 먹으며 흥미롭게 관전 중이었다. 옆에서 래빗이 썬글라스 비슷한 안경까지 쓰고 나를 따라 과자를 먹고 있었다.

얼마 전에 지구에 있던 영화관이나 3D안경에 대해 살짝 설명해주었더니, 그때부터 저런 도수 없는 안경을 쓰고 다닌다. 우리 황녀님, 너무 귀여워서 어떡하지?

“후, 여기까지 해요. 어차피 이틀 전에 저희 두 사람이 미술관에서 만난 모습을 보였으니.”

마침 공녀 언니가 휴전을 선언하며 돌연 내 쪽으로 걸어왔다.

그러더니, 기다렸다는 듯 우아하게 고갯짓했다. 이제 내 차례라는 듯이.

“에스테 영애, 지금부터는 영애의 수업을 계속할까요?”

“……네?”

지금요? 나는 흘끗 황태자를 보았다. 황태자가 흥미롭다는 듯 이쪽을 응시했다.

조금 전과는 정반대의 처지가 된 셈이었다. 으윽.

그랬다. 공녀 언니에게 황태자를 처음 들이민 날, 황태자와 래빗이 발데르의 도움으로 황성으로 돌아간 뒤 공녀 언니가 먼저 내게 말했다.

‘그래요, 에스테 영애. 내게 적절한 남자를 소개 시켜준 뒤에 내게 바라는 것을 말한다고 했죠?’

‘어엄, 그게…….’

공녀 언니에게 진실을 토로해야 할 시간이 왔다.

그때 얼마나 쫄리던지.

까놓고 말해서 ‘님에게 악녀 스킬을 배우고 싶습니다, 스승으로 모시게 해주십쇼!’ 해야 할 상황이었으니까.

‘으음? 악독해지는 법이요? 그건 내가 악독하단 소린가요?’

‘아니, 저, 그게, 어…….’

‘후후, 제대로 잘 봤네요?’

‘……네?’

의외로 공녀 언니는 산뜻하고 쿨하게 인정했다.

‘이 제국 귀족 여성 중에 나만큼 악독할 사람은 없을 것 같은데요? 맞아요. 나 나쁜X’

……아니, 또 그걸 너무 쿨하게 인정하시면 당황스러운데요. 정말 얼마나 당황스럽던지.

거기다 악독해지는 법 같은 걸 배우고 싶다는 이상한 제의도 별 뜻 없이 받아들인 것 같았다.

평소에도 있었다나? 자신처럼 되고 싶다고 말하는 영애들이.

‘좋아요, 에스테 영애. 영애를 제국 최고의 악독한 여자로 만들어 줄게요.’

조금 불안해지긴 했지만.

이어지는 화사하고 표독스러운 미소에 더욱 불안해졌지만!

‘그럼 일단, 뺨 때리는 법부터 배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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