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3. 대마법사와 악녀 메이커 (27)
뺨 때리는 방법이라니, 이 말을 듣는 순간 어찌나 기함했던지.
‘내가 살면서 들은 최고로 놀란 말 중에 당당히 3위 안에 들었다…….’
도대체 이 언니가 나의 뭘 보고, 뭘 믿고 이런 제안을 받아들인 건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수업이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많은 것을 배웠느냐 하면…….
“으음, 영애, 아직도 어려운가요?”
“그으게, 엄…….”
너무너무 슬프게도 제자리걸음이었다.
‘아니, 대뜸 사람 뺨을 때리라고 하는데 어느 누가 옙! 하고 때리냐고요!’
그랬다. 우리 공녀 언니의 수업은 매우 자유분방하고 상상을 뛰어넘는 실전 수업이었던 것이다.
공녀 언니는 무엇이 문제냐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흐음, 왜 그래요, 영애. 충분히 합의된 사람이니 마음 놓고 연습을 해도 좋다니까요?”
“아니, 그게, 공녀님……. 일단 사람을 때린다는 게, 으음.”
“흐음, 사람이 문제인가 싶었더니…….”
공녀 언니가 잠시 턱을 쓰다듬더니 말했다.
“아예 죄인을 데려올까요? 맞아도 싼 놈이면 괜찮겠어요?”
“공녀, 죄인이라니요? 관리는 어찌하려고요?”
“헤벤의 딸이 죄인 하나 관리하지 못하겠습니까, 달링?”
“……내 살다 살다 그리 살벌한 달링 호칭은 또 처음이군요?”
“칭찬 감사합니다.”
아니, 두 분은 갑자기 왜 또 기싸움을 시작하세요.
내가 끙 한숨을 쉬는데, 줄곧 과자를 먹고 있던 래빗이 내게로 쪼르르 달려왔다.
“롤린, 롤린.”
사실 황녀님은 정서 교육에 좋지 않으니 이 자리에 절대 참여하지 않았으면 했지만, 어디 이 황녀님을 데려온 황태자가 황녀의 요청을 거절할 사람인가.
심지어 황태자가 이런 것도 조기 교육이라고 말을 하는 꼴을 봐서는 황실의 교육은 뿌리부터 잘못된 것 같다.
“왜 네가 이런 교육울 받아야 하는지 모루겠다. 저 공뇨의 교육운 몬가 이상하지만…….”
그러게요, 저도 받고 싶지는 않았어요. 내가 악녀라니. 나 악녀 노릇할 줄 모르는데? 싶은 마음이거든요.
[이런, 빙의자님의 악명 수치는 1/100입니다! 노력하세요. o(iДi)o ]
저 1이 올라간 것도 공녀 언니에게 이런 저런 나쁜 말을 배우면서 간신히 는 것 같은데 말이지.
악독함인지 악명인지 모를 저 수치를 올려야 하는 것만 아니라면 아예 시도조차 안 했을 텐데…….
보통 악녀 빙의물의 정석은, 화려한 말빨과 카리스마를 갖춘 주인공 악녀 언니가 시원시원하게 사이다를 보여주는 맛이다.
그런데! 욕 한마디에도 망설이는 제가 무슨 사이다를 보여주죠?
“그래도 북부에소 몬스터는 잘 팼지 않우냐?”
“사람이랑 몬스터랑 같나요…….”
“사람울 몬스터라고 생각하묜……?”
“아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누가 이렇게 가르쳐 주셨어요, 황태자님이세요?”
래빗이 조그만 손을 까딱까딱 움직이면서, 달린 내가 이래 보여도 너보단 정신 연령이 높다며 열심히 주장했다.
그래 봐야 그 조그만 몸으로는 설득력이 없었지만,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사실 뺨이 문제가 아니긴 해.
나는 기본적으로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걸 싫어하고 될 수 있으면 조용히 사는 걸 선호한다. 방구석에서 열심히 소설이나 읽던 독자라고. 관종의 재질이 없어요. 예?
지금까지야 어떻게든 생존이 먼저라는 생각에 어찌저찌 해왔지만, 필요한 일이면서도 생존과는 직결되지 않는 이 미션은 내게 쥐약이나 다름없었다.
연거푸 한숨을 쉬는데 누군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영애.”
두둥실 떠 있는 남자는 오늘도 그림자같이 내 곁을 지키던 대마법사 발데르였다.
그를 보는 순간 심장이 또 쿵쿵 뛰었다. 이제는 익숙해진 고동을 손으로 꾹 누르며 시선을 마주했다.
‘웬일이지?’
이 남자는 관찰하겠다 선언한 뒤로 정말 조용히 자리를 지키는 쪽을 택했다.
지난 일주일간 매일같이 공녀 언니나 황태자를 만나는 자리에서도 함께 있기는 하되, 거의 아무 말도 없었던 것이다.
사실 내게 이것저것 캐묻지 않을까, 특히나 요정의 창에 대해 물으면 어떡하나 가슴을 슬쩍 졸이던 나마저 긴장을 풀 정도로 침묵을 지켰다.
눈이 마주친 예쁜 주황색 눈동자가 나른한 빛을 띠었다.
흘끗, 공녀 언니와 황태자 쪽을 보면 두 사람은 웃고는 있지만 소리 없이 싸움을 진행하느라 경황이 없어 보였다.
나중에 들은 얘긴데, 저 사람들 만나기는 어린 시절부터 만나서 쭉 이어진 악연이라고 하더라고? 만났을 때마다 서로에게 좋은 기억은 아니었다나.
“무슨 일이세요, 대마법사님?”
“……일주일간 줄곧 지켜봤는데, 아무래도 첫 단계를 넘어가지 못한 거지요?”
뺨 때리기가 영 수월하지 않지? 할 수는 있니? 라는 말을 부드럽게 돌려 말한 걸까.
나는 난감하게 웃으며 수긍했다.
“음, 네, 뭐. 쉽진 않네요.”
“도와드릴까요?”
“네? 어떻게요?”
“사람만 아니면 되는 거죠?”
발데르가 말을 마치기 무섭게 손끝에서 빛이 솟더니 반투명한 사람 형상을 했다.
몸은 평범한 남성의 체형이었고, 머리 부분에는 달걀 귀신처럼 머리 스타일도 이목구비도 없는 형태였다.
“질감은 다르지 않겠지만 사람은 아니에요. 이런 것은 어때요?”
“아…….”
“세상에, 대마법사님? 아주 멋진 마법을 보여주셨군요.”
내가 무어라 하기 전에 어느샌가 발견한 건지 공녀 언니가 자연스럽게 끼어들었다.
발데르는 공녀 언니의 말은 들리지 않는 것처럼 나를 응시했다. 이에 언니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지만 한편으로는 그러려니 하는 얼굴이었다.
‘발데르가 어떤 이미지길래, 황태자도 그렇고 공녀 언니도 무례한 행동들도 그냥 다 넘어가네.’
둘 다 성격이 보통은 아닌 사람들인데 말이다.
“얼굴은 아직 표현하지 않았어요. 영애가 말하면 어떤 얼굴이든 표현해줄게요.”
“아, 우선은 감사합니다.”
사실 얼굴을 표현하지 말고 그대로 한 대 치는 게 허수아비를 치는 느낌이라서 마음 편하겠는데. 그건 안 되려나?
“어떤 얼굴이든 가능해요? 대마법사님이 모르는 얼굴이라도요?”
“어떤 표현을 원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다 가능할걸요?”
발데르가 잠시 고민하더니 검지와 엄지를 딱, 부딪쳤다. 그 순간 사람의 형체가 빛에 휘감기더니, 빛 사이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흔들리는 하늘빛 은발, 아주 매서운 눈매…….
‘라이칸?’
라이칸이었다.
“이렇게나.”
내가 놀라기도 잠시 발데르가 다시 한번 검지와 엄지를 부딪쳤다.
빛에 휘감긴 형체가 다시 모습이 바뀌더니 이번엔 흑발과 붉은 눈동자를 드러냈다. 웃지 않고 날카롭기까지 한 서늘한 얼굴.
휴고였다.
“이렇게도 가능해요.”
곧 다시 빛에 휘감긴 형체는 다시 허수아비처럼 돌아왔다.
그 뒤로도 발데르는 아무렇지 않게 몇몇 얼굴을 더 보여주었다. 평범한 얼굴이나, 순박한 얼굴, 추남의 얼굴까지……. 하지만 가장 처음 본 라이칸과 휴고의 얼굴이 쉬이 떠나질 않았다.
‘왜 하필 두 사람을?’
의아한 눈빛을 숨기지 못하다 결국 묻고 말았다.
“대마법사님, 2황자님과 대공님의 모습은 왜 보여주신 걸까요? 으음, 지금 일이랑 상관없는 것 같아서…….”
“아.”
이에 발데르가 잠시 고민하더니 나를 빤히 응시했다. 곧 그의 입술이 느릿하게 열렸다.
“영애와 관련된 남성들인 것 같아서, 겠군요.”
“저와요?”
휴고야 얼마 전까지 약혼 관계로 묶여 있던 사이였으니, 그렇다 치고 라이칸은 왜?
아, 추수제에서 함께 참여해서? 하지만 래빗도 함께였는데? 리제도 사람들이 대부분 내가 유모로 함께 한 줄 알았다고 했단 말이야.
그러나 대답은 엉뚱한 곳에서 들려왔다.
“어머나 세상에, 몰랐네요. 영애, 설마 대공님과는 아직 관계를 이어가고 계신가요? 거기다 2황자님과도?”
공녀님이 어머나, 하고 입술을 우아하게 가리더니 나를 한번, 마지막으로는 발데르를 한번 보면서 고개를 끄덕했다. 저기, 언니? 지금 무슨 생각을 하셨길래 표정이…….
“여기 계신 대마법사님까지.”
곧 공녀 언니의 예쁜 얼굴로, 재밌다는 듯 미소가 스쳤다.
“무려 셋을 걸치고 있던 건가요? 삼다리?”
“네? 네? 네? 콜록콜록콜록!”
“어머어머, 염려 말아요, 난 그런 편견 없어요.”
“대체 무슨 편견……! 아니에요! 콜록콜록!”
침 삼키다 사레가 제대로 들려 콜록거리면서도 나는 애타게 손을 휘저었다.
대체 무슨 상상을 한 건지 정확하게는 몰라도 뭐가 됐든 그거 아니야. 절대 아니라고.
“……음? 내 동생이 정실은 아니었던 건가?”
“정실은 무슨! 아니, 황태자 전하 지금 웃으신 건가요?”
“오, 그럴 리가, 영애. 내 여동생의 유모님 말씀에 웃을 수가 있나.”
황태자가 싱긋, 얄밉게 웃었다.
“아 물론 아주 재밌다고는 생각하네!”
‘그게 놀리는 거잖아!’
나는 인상을 찡그리며 래빗을 봤다. 우리 황녀님, 쟤 좀 혼내주세요. 래빗만이 이 순간 내 구원자였다.
그러나 우리 아기 황녀님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예로부터 제왕은 많은 반려룰 두기도 해찌. 롤린, 너의 기상운 훌륭하댜. 네가 됴타면 나는 충분히 이해한댜.”
“뭘 이해해요! 아니거든요? 누구보다 제일 잘 아시면서!”
아니, 래빗아. 너만은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끙,
얼굴을 쓸어내리고 있으려니 눈을 깜빡이던 래빗이 조금 어색한 표정으로 얼른 농담이었다며 나를 달랬다. 아니, 전혀 농담이었던 표정이 아니잖아요.
“……그렇군요, 난 세 번째 후보였던 건가요?”
“저기요, 대마법사님. 여기 끼지 말아주세요. 아니에요. 아니에요.”
이 사람은 뭘 또 진지하게 정색하면서 묻는 거야. 머리가 조금 아파 왔다. 이 미션은 생명의 위협이 덜한 대신 정신적으로 스트레스와 압박을 주려는 셈인가?
“어머나, 영애. 왜 이렇게 극구 부인을 하시나요?”
“네?”
“영애는 내게 악독한 여자가 될 수 있게 도와달라고 했잖아요? 나쁜 X.”
“어어…….”
이 언니, 욕설 발음이 왜 이렇게 찰진 거지……? 이것도 악녀의 덕목인 걸까. 멍하니 공녀 언니를 바라보는데 이 언니가 싱긋 웃었다.
“몰랐는데, 당신에게는 이미 자질이 있는 걸요? 벌써 제국의 남자, 그것도 가장 대단한 이들만 골라 셋이나 손에 넣은 셈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