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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192화 (192/281)

◈192화. 3. 대마법사와 악녀 메이커 (31)

베키가 우물우물 열심히 먹는 나를 보면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오늘은 공녀님께서 오지 않으실 건가 봐요.”

“응. 맞아. 어제 내가 공작저에 다녀왔으니까.”

베키가 ‘그렇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공녀 언니와 가까워진 몇 주간 에스테 백작가 사람들은 내가 공녀 언니와 아주 친한 친구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당연하겠지만 언니와 안에서 무슨 얘기를 나누는지는 까맣게 모르는 채였다.

‘발데르가 모든 대화를 차단해주었으니 말이지.’

그렇게 알고 있는 게 나에게도 공녀 언니에게도 편할 듯해서 우린 추수제에서 만나 친해졌다고 둘러대기로 했다.

나를 정말 아끼는 베키부터 해서 부모님들까지, 그간 달린이 아파서 집안에만 있던 나날이 생각났던 건지 몹시도 좋아하고 축하해주었다.

오직 오빠인 파올로만이 마찬가지로 축하는 해주긴 했지만 고개를 갸웃하며 의문을 표했다.

‘엄, 새 친구가 생겼다니 축하한다. 근데…… 너, 트리샤 영애와는 연락 안 하냐? 그, 통 못 본 것 같아서, 크흠…….’

파올로의 말을 듣고 보니, 추수제에 함께 참여한 것을 마지막으로 한동안 리제를 보지 못하긴 했다.

그렇지만 그리 오래되지도 않았고, 이전에도 리제는 한 달에 몇 주 정도는 보이지 않다가 나타나기도 해서 그러려니 하고 있었다.

하지만 파올로가 이렇게 얘기하니 내가 좀 무심했던 건 아닌가 싶어 리제에게 편지를 보냈다. 시간 되면 한번 보자는 내용이었다.

‘흠, 좋아. 보내놓으면 내일쯤에는 답장이 오겠지?’

사실 황태자까지 참여한 ‘공녀 언니&황태자’가짜 연애 작전은 백 퍼센트 우리 집 내 응접실에서 이어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공녀 언니만 백작가를 들락날락하면 이상한지라 가끔 나도 공작저를 가곤 했다.

요정 그놈이 세계의 오류가 헤벤 공작 저에 있다는 둥 그래서 자칫하면 그놈에게 살해당할 위험이 있다는 뉘앙스로 입을 털어대니 당연히 공작저에 방문할 때마다 시한폭탄을 품에 지고 걷는 기분이었다.

‘세계의 오류가 헤벤 공작 저에 있다고 해서 어찌나 간이 쫄리던지…….’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직까진 아무 일도 없었다.

“끙, 어디까지나 ‘아직까진’ 말이지…….”

“네, 아가씨?”

“아냐, 아무것도.”

공녀 언니와 황태자의 합동 작전은 원활하게 진행 중이다.

얼마 전엔 헤벤 공녀가 약혼 드레스의 유행을 알아갔다더라, 드레스를 고르며 황실 문양을 살폈다더라, 황태자가 수도에서 가장 유명한 보석상에 모습을 비추며 반지를 사들였다거나 하는 식으로 자신들의 소문을 위한 떡밥을 효과적으로 열심히 퍼트리는 중이었다.

덕분에 사교계엔 헤벤 공녀와 황태자가 대체 무슨 사이냐, 두 사람 사이에 무언가 있는 게 분명하다, 는 둥의 말이 널리 퍼졌다. 두 사람이 계획한 대로였다.

‘아마 이틀 뒤에 있을 공개(?) 데이트, 호수 공원에 모습을 드러내면 못이 탕탕 박히는 거지.’

나는 두 사람이 주야장천 데이트하는 장면만 보여줘도 될 줄 알았는데, 계략은 그렇게 짜는 게 아니라나?

‘이런, 영애. 그런 식으로 해서는 사교계의 어린 숙녀도 속일 수 없답니다.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에요.’

서사가 중요하단다. ‘서사’가.

그거라면 내가 제일 잘 아는데. 정말이지 로판 N년차 과몰입 독자 앞에서 서사의 중요성 따위를 논하다니, 분할 노릇이었다.

‘내가 마무리한 이야기만 해도 벌써 두 개인데……!’

이렇듯 걱정했던 것과는 다르게 사실 모든 것이 나름 순조롭게 흐르고 있었지만…… 이 와중에도 풀리지 않는 의문은 있었다.

분명 요정이 내게 말하길 헤벤 공녀와 발데르는 철천지원수라고 했다. 그런데, 실제로 서로를 마주한 두 사람은 전혀 그런 모습이 안 보이지 않던가?

“아아, 어쩐지 아버지께서 소환해도 보기 힘든 대마법사께서 여기 있는 이유가 있었군요?”

공녀 언니가 발데르에게 말을 거는 순간에도 두 사람 사이에서는 어떤 분노나 증오도 읽을 수 없었다.

물론 두 사람 모두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데 능한 사람이긴 하지만……. 정말 철천지원수라면 자신의 중요한 일을 해결하는 데에 도움을 받을 리 없잖아?

‘거기다 이 가짜 연애 일은 공녀 언니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랬으니, 더욱더 원수의 도움을 받을 리 없지.’

이렇게 되면 진실은 다시 오리무중에 빠지게 된다.

‘……요정이 거짓말한 거 아니야?’

[이런, 요정은 빙의자 님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그저 빙의자 님께서 아직 알지 못한 진실이 있을 뿐?]

‘야, 수수께끼는 집어치워. 이쯤 되면 하나 정도는 말해줄 때가 됐잖아?’

나는 허공을 노려보며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지금 난 이 이야기에서 네 장단에 최선을 다해 맞춰주고 있잖아?’

요정을 향해 말을 걸 때는 늘 갑갑하고 갇혀있는 기분이 들었다. 절대로 넘어설 수 없는 벽이 앞에 있는 기분이기도 했다.

적어도 두 번째 메인 퀘스트까지는.

그러나 발데르 덕분일까? 나는 꽤 중요한 힌트를 얻었다. 이건 지금까지 갑과 을에 불과했던 나와 이놈의 관계에서 내가 쓸 수 있는 카드가 되어주었다 해도 무방했다.

난 차를 홀짝 마시며 피식 웃었다. 이어 흔들리는 찻잔을 바라보며 속으로 고요히 말했다.

‘내용을 봐서는 이 세 번째 메인 퀘스트. 망치기라도 했다간 너희에게도 타격이 클 테지?’

평소와는 다른 서브 퀘스트 개수, 평소 같지 않은 얼레벌레 급조한듯한 퀘스트 내용.

더군다나 메인 퀘스트의 두 번째 지령에서 일부 내용이 미묘하게 달라진 퀘스트 성공 메시지까지.

깨달았다.

‘너희, 너희도 반드시 이 메인 퀘스트를 성공해야 하는 거야. 아니, 어떻게든 이 이야길 이끌어가야 하는 거야. 그렇지?’

아, 이놈들도 급하구나?

[…….]

대답 없이 붉어지는 요정의 창을 보며 난 크게 미소했다.

별안간 홀로 웃음을 터트리는 내 모습에 베키가 어리둥절한 듯 고개를 갸웃했지만 곧 날 따라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이상해 보인다는 걸 알았지만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그야, 너무 통쾌하잖아?

‘난 너처럼 갑질할 생각은 없어, 어쨌거나. 이 퀘스트도 내 목숨이 달렸잖아?’

나는 찻잔을 휘휘 돌리며 생긋, 예쁘게 미소했다.

창을 통해 나를 보고 있을 미지의 존재를 향해서.

‘하지만 열심히 할지 말지는 네 행동 여하에 달려있어. 요정님들.’

말 줄임표를 또 한 번 띄운 요정의 창은 곧 눈앞에서 사라졌다.

티비가 꺼지듯, 혹은 자신의 기분이라도 드러내듯 시무룩하게 꺼져주는 모습은 오히려 더욱 큰 통쾌함을 선사할 뿐이었다.

“아가씨, 기분 좋은 일 있으세요? 오늘따라 아주 활짝 웃으시는 것 같아요.”

“응? 응. 있어. 베키. 아주 기분 좋은 일.”

배시시 웃어 보이자 베키는 궁금한 얼굴을 했지만 내가 대답이 없자 자연스레 포기한 기색이었다.

동시에 왜인지 알 것 같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으음, 아가씨 역시……. 그런 거였군요…….”

“엉? 뭐가 말이야?”

달칵, 티 주전자를 내려놓고 나를 보는 베키의 얼굴이 어쩐지 초롱초롱했다. 뭐지, 나 저 얼굴 본 적 있는 것 같은데…….

‘저거, 북부에서 아스와 린이 휴고랑 있을 때 날 바라보던 표정 아니야?’

익숙한 기분이 들어 얼른 베키의 손을 잡았다.

“뭐야, 베키, 그런 표정은 뭐니?”

“네? 아……. 아뇨, 아뇨. 역시…… 사랑은 사람을 더욱 사랑스럽게 만들어 주는구나 싶어서요!”

사랑? 사아아랑? 이게 뭔 소리야?

내가 입을 뻐끔뻐끔하다 말고 얼른 말을 이으려는 순간이었다.

휘이잉. 잠시 열어둔 창문으로 조금 센 바람이 불었다. 커튼이 펄럭거리는 소리에 나와 베키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어머나, 갑자기 웬 바람이…….”

베키의 눈엔 아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겠지만 내 눈엔 똑똑히 보였다.

펄럭거리는 커튼 사이로 툭, 내려서는 남자의 모습을 말이다.

둥실 떠 있는 데다, 나부끼는 천 사이로 비추는 모습이 마치 신화 속 하늘에서 내려온 신의 모습 같았다.

“베키.”

“네?”

나는 베키의 손을 잡은 채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나가 있을래? 혼자 있고 싶어.”

“아, 네! 아가씨.”

그도 그럴 게 내게는 보이지만 남에게는 보이지 않는 남자의 모습이란 생각보다 더 신경 쓰이는 법이라 저 남자가 있을 땐 웬만하면 혼자 있는 쪽을 선호했다.

베키는 익숙하다는 듯 다 마신 찻잔과 도구를 챙겨 방을 나섰다.

문이 닫히자마자 나는 고개를 돌렸다.

‘아이고, 깜짝이야.’

이젠 돌아서면 바로 근처에 있는 이 남자의 모습에도 오래 놀라지 않고 익숙해졌다.

“어서 오세요. 다녀오셨어요?”

“네.”

“볼일은 잘 보셨고요?”

요정에게 한 방 먹여준 뒤라, 여전히 기분이 좋은 참이었다.

싱글거리며 물었더니, 어째서인지 발데르는 한참이나 날 응시하다가 뒤늦게야 ‘네’ 하고 대답했다.

“밖으로는 좀처럼 나가지 않으시더니, 일 잘 보셨다고 하셔서 다행이에요. 이쪽엔 별일 없었어요.”

“…….”

“아, 그러고 보니 식사는 하셨나요? 오늘 저희 저택에서…… 대마법사님?”

“…….”

어쩐지 발데르의 표정이 묘했다. 조금 전이랑은 조금 다른 의미로 나를 응시하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몇 초 전까지는 혼란인지, 초조함인지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을 짓더니, 이번엔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이 관찰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몇 주간 옆에 있다 보니 이 남자 표정을 읽는 데 꽤 익숙해진 것 같네.

그나저나 왜 이렇게 쳐다보는 거지?

미간을 슬쩍 찌푸리며 다시 입을 열려 할 때였다.

“……영애, 혹시 마법을 사용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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