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3. 대마법사와 악녀 메이커 (32)
“네?”
그에게서 나온 건 엉뚱한 대답이었다.
“아니면, 혹시 마법적인 도구를 사용했거나 무언가를 삼켰거나요.”
“아뇨, 그럴 리가요?”
나는 곰곰이 고민했다.
“일단 당연하지만 난 마법을 쓸 줄 몰라요. 그리고 지금 내 손엔 마법 도구가 없고요.”
그리 말하다가 팔에 차고 있는 아이템 사이렌 오더를 보고 아차 싶었다.
이것도 마법 도구라고 할 수 있나? 요정이 준 건데? 일단 모르겠어서 마법 도구를 가지고는 있지만 쓴 적은 없다고 했다.
“그리고 먹은 거라곤…… 지금 여기 놓여있던 쿠키랑 차뿐인데요? 또…… 아, 약도 먹었네요. 지병이 있어서 먹는 약도 있거든요.”
“그런가요?”
발데르는 내 이야기를 전부 듣고 나서 고개를 미세하게 갸웃했다. 표정 변화가 크진 않지만 스스로도 혼란스러운 기색이었다.
“음, 아무것도 아닙니다.”
“무슨 일인데요?”
“제가 조금 전 커다란 마법을 하나 쓰고 왔더니…… 마력의 흐름이 남아서 착각했나 봐요.”
자신의 턱을 느슨하게 잡은 발데르에게는 미약하게나마 의아해하는 기색이 남아있었다.
“영애의 몸에서 뭔가 큰 흐름이……. 음, 아니, 아니에요.”
“저, 죄송한데…… 찝찝하니까 이상한 거면 말씀해주세요.”
나는 내 손과 몸을 한번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실은 최근까지 몸이 많이 좋지 않아서 누워만 있었거든요. 그래서 몸과 관련한 거라니 조금 무섭기도 하고 그렇거든요……?”
지금이야 상당히 극복했다지만, 이 세계에서 막 눈을 떴을 때 내 몸이 어땠던가.
5보 이상 걸어도 건강 수치가 떨어지고, 기침만 해도 건강 수치가 떨어지던 시절.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기만 했다.
거기다…… 요정에게 한 방 먹인 뒤라서 찝찝함이 더 했다.
설마하니, 그놈들이 내 몸에 뭔 짓 한 거 아니야?
[요정은 빙의자님 몸에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아요! ( ー̀εー́ )✧*⁎]
웃기지 마. 내가 처음에 건강 수치로 고생했던 건 니들이 설명을 제대로 안 해줘서 그런 것도 있거든? 씩씩거리자 요정의 창은 더는 대답이 없었다.
‘확실히, 이놈들…… 세 번째 이야기에선 눈치를 보네.’
평소라면 거지 같은 이모티콘을 찍찍 붙여가며 몇 번 더 깐죽거리든 약을 올리든 했을 요정이 이리도 쉽게 물러나다니.
“당장은 괜찮은 것 같습니다. 아무런 이상이 느껴지지 않아요.”
“……정말요?”
“네. 아니면… 이렇게 하죠.”
발데르가 내게 손을 내밀었고 나는 자연스럽게 그 위에 손을 얹었다.
이 남자는 스킨십이나 접촉이 아주 태연스러운 탓에 정신 차려 보면 이처럼 나도 모르게 응하는 경우가 잦았다.
……진짜 선수인가.
어쨌거나 발데르가 잡은 손 위로 자그마한 빛이 동동 떠올랐다.
그러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내 손등 위로 쇽 사라졌다.
“내 마력을 미세하게나마 심어두었어요. 아마 이제 영애의 몸에 이상이 생기면 내가 바로 알 수 있을 거예요.”
“어…….”
이렇게까지 해달라는 건 아니었는데. 나는 당황했지만 차분하게 감사부터 전했다.
“감사합니다……. 이 정도로 해주실 줄은 몰랐는데, 으음. 그, 염치없지만 그럼 제가 만약에 다음에도 북부에서처럼 크게 다치면 한 번만 도와주실래요?”
이제 목숨이 간당간당한 순간은 그만 겪고 싶거든요. 나는 눈치를 슬그머니 보면서 말했다.
이 남자가 날 관찰한다며, 기왕이면 건강한 쪽이 낫겠지?
설마하니 아픈 모습을 보면서도 아픈 쪽도 관찰해보고 싶었어요, 하는 사이코는 아니겠지?
“그러죠.”
“앗 정말요? 하긴 그쪽도 내가 건강한 쪽이 낫죠? 그쵸? 아파서 골골대는 걸 관찰하겠다는, 그런 이상한 사람은 아니죠?”
“…….”
내가 신나서 이 남자에게 잡혀 있던 손을 열심히 흔들며 입을 움직였더니,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뭐야, 왜 대답이 없으세요? 불안하게.
“그러고 보니 그런 생각은 전혀 못 했네요? 내가 할법한 생각인데.”
“네에?!”
“아, 안심하시길. 그럴 생각이라는 건 아니니까.”
아니, 아니. 안심 못 하겠는데요? 슬그머니 손부터 떼어냈다.
발데르가 멀어지는 내 손을 빤히 응시해서 더 불안해졌다.
거, 뭐라고 변명이라도 해보라고요.
“지금은 마법을 시전하던 도중에 온 거라 다시 가봐야 합니다.”
“네……? 엄, 왔던 곳으로 돌아가신다는 거죠? 바쁘셔서요?”
“네.”
그 말에 나는 소름 돋던 것도 잊고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 오늘 여기 오셔서 꼭 해야 할 일이 있으셨어요? 아니면…… 저한테 뭔가 물어보실 거라도?”
“없는데요?”
의문이 더욱 커졌다.
뭐야. 바쁘다면서? 왜 그럼 굳이 여기 돌아온 거지? 볼일도 없다면서?
“그럼 여긴 왜 오셨어요? 오늘은 굳이 오실 필요 없으셨던 것 아니세요?”
“…….”
“대마법사님?”
발데르가 내게서 두어 걸음 잠시 멀어졌다. 그는 그대로 손을 턱에 가져다 댄 채로 고개를 슬쩍 숙였다.
다시 한번 눈이 마주쳤을 때 난 이 남자를 만난 이후로 처음 보는 표정을 목격했다.
“그러게요. 참 이상하네요.”
발데르는 그 말 하나를 남겨두더니 그대로 돌아섰다. 내가 무어라 할 새도 없이 창문을 훌쩍 넘어가더니 그대로 사라졌다.
그야말로 바람과도 같은 퇴장이었다. 남겨진 건 어리둥절한 자세로 멈춰 있는 나뿐.
“뭐야…….”
바람같이 사라지네. 아쉽게.
그나저나. 나 저 사람한테 할 말이 있었는데?
“바로 이틀 뒤가 공녀 언니랑 같이 합동 데이트 하는 날인데.”
뭔가 미리 의논해야 하는 거 아닌가?
* * *
달린 에스테가 로잘린 헤벤과 황태자 슈리안 리온 비센에게 제공한 공간은 두 사람에게 있어 더할 나위 없이 아늑하고 편안했다.
이 사실은 두 사람에게 있어서도 꽤 놀라운 사실이었다.
“에스테 저택엔 정말 손님이 드나들지 않는군요.”
“동감이에요.”
보통 귀족 사회에서 저택이란 타인에게 자신의 세를 보여주는 도구이자, 사교의 장으로 쓰이는 법이었다.
그러나 로잘린과 슈리안이 적지 않은 방문을 하면서 알게 된 점은, 이 저택이 보통 저택답지 않게 고요하다는 점이었다.
날 때부터 외모, 성격, 지위, 가문 등 모든 것에서 우수했던 이들에게 시선과 관심은 공기처럼 당연한 것이었다.
자신의 방조차도 이런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던 바, 이 저택과 달린의 응접실은 그들에게 있어 신선한 경험이기도 했다.
솔직하게 그들은 상대가 극히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갈수록 이 작전과 경험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 데에는 이 시간과 공간이 주는 편안함이 기여한 바가 컸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로잘린 헤벤과 슈리안 리온 비센은 살아온 고고한 삶만큼이나 비슷한 면이 많았고 서로가 생각하는 바가 거의 일치했다. 그렇기에 눈 앞의 파트너가 이 공간에 대해 생각한 바가 자신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달링, 영애가 늦네요.”
“……아래층에서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군요. 목소리를 듣자 하니 그녀의 오빠인 파올로 경일 겁니다.”
검사인 슈리안이 감각을 극대화하며 말했다.
한편으로 슈리안은 기가 찬 기분이었다. 이 여잔 날 ‘달링’같은 호칭으로 잘도 부른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건가? 흥미롭기도 하고 어처구니가 없기도 하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로잘린은 방을 빙 둘러보았다. 마침 달린이 자리를 비우며 달린을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는 발데르도 이 자리에 없는 참이었다. 게다가 슈리안이 데려온 어린 황녀도 달린을 쫓아 뛰어나갔다.
“흐음……. 마침 저희의 구경꾼 겸 중재자가 되어주는 귀여운 영애께서도 없으시니 말인데요. 황태자 전하.”
이렇게 생각하기 무섭게 로잘린이 표정을 싹 바꾸며 미소를 지워냈다.
표독스러운 표정이 드러나자, 슈리안은 역시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가 아는 로잘린 헤벤의 얼굴은 늘 저런 식이었으니.
어째서인지 달린은 전혀 모르는 눈치였지만, 슈리안은 잘 알았다. 지금이야 비교적 조용히 지내는 것일 뿐, 이 여자는 한때 제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그 악녀 로잘린 헤벤이었다.
수완 좋은 헤벤 공작의 뒤로 그를 닮은 아들이 없단 점을 모두가 탄식할 때 그 사실을 뒤집듯 엄청난 협상 능력과 카리스마를 보여주었지만…… 가신을 이끄는 데 있어서 더없이 잔인한 여자기도 했다.
“어째서 제 일에 끼어드셨습니까?”
“그 얘기는 이미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까?”
“달린 양 앞에서 끝난 척했던 기억은 나네요. 시간이 없으니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무슨 꿍꿍이이신가요?”
“이런, 내가 공녀에게 정말로 관심이 있으면 어쩌려고?”
“어머나, 좋아라. 후에 저를 약혼녀로 삼든, 처로 삼든 한번 탈탈 털려보실 생각이 있으시다면야.”
“…….”
슈리안이 헛웃음을 지었다.
이 여자는 처음 본 7살부터 느꼈지만 단 한마디도 질 줄을 모른다. 슈리안은 결국 웃음을 거둬들이며 자신 또한 본론을 드러내기로 했다.
“사실 내가 처음으로 생각했던 배우는 달린 에스테 양입니다.”
“어머, 에스테 양에게 관심 있는 줄은 몰랐군요?”
“아아, 관심이라면 관심이지요. 하지만 내 동생의 라이벌이 될 생각은 없습니다. 그저, 관심이 있다면…… 그래, 저 영애의 주변에 발생하는 ‘뜻 모를 무언가’에 대한 것이라면 모를까.”
뜻 모를 무언가? 애매한 단어에 로잘린이 고개를 갸웃했다.
“공녀, 나 또한 시간이 없으니 진지하게 묻겠습니다. 혹시 공녀는 그런 예감을 느낀 적 없습니까?”
“예감이요?”
“네. 무언가 나를 억지로 움직이게 하는듯한 예감. 의지. 충동… 단어는 뭐든 좋습니다.”
로잘린은 멈칫했다. 그런 예감을 느낀 경험을 떠올려서가 아니었다.
이 말을 하는 슈리안의 표정이 어쩐지 부드러운 듯하면서도 섬뜩했기 때문이었다.
“전 이런 예감을 느낀 적이 있습니다. 아니, 꽤 오래전부터였겠군요. 난 내 여동생 근처에 있는 모든 이들을 위협해 죽이고 찢어버리라는, 비정상적이고 강제적인 충동을 종종 느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