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3. 대마법사와 악녀 메이커 (33)
“…….”
“이런 식의 통제는 좋아하지 않아서 실제로 실행에 옮긴 적은 드뭅니다만, 그럼에도 사람들이 날 향해 무어라 하는지 잘 알고 있지요. 여동생을 몹시도 사랑하는 오빠. 틀린 말은 아닙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죠?”
“난 여동생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이건 누가 시켜서 생긴 감정이 아닌 오로지 내 감정이죠. 그런데, 어느 날 이 감정이 비상식적으로 자극된 결과 폭력적인 감각을 느낀 적이 있습니다. 공녀는 느껴본 적, 없습니까?”
“으음, 뭐.”
로잘린은 어물쩍 말하는 척 대답하지 않았다. 슈리안은 이어지는 침묵에서 암묵적 동의를 읽어냈다.
“이 감각이 가장 최고점을 찍었을 때는, 달린 에스테 양과 있을 때였지요. 공녀는 이런 경험을 한 적 있습니까? 만약 없다면 이것도 이야기해도 좋겠군요. 내가 경험한 이상한 통제당하는 감각을 달린 에스테 양이 해결해주었단 것도요.”
그러자 로잘린은 고개를 돌려 슈리안을 응시했다.
사실부터 말하자면 로잘린은 슈리안이 말하는 것이 무언인지 알 것 같았으며 낯설지 않았다.
왜냐, 설명하기 참으로 기묘하지만…….
로잘린은 한때 자신이 죽거나 몸을 빼앗길 것 같다는 이루 설명할 수 없는 묘한 감각을 느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상한 감각을 느낄 때는 내 몸이 내 것 같지가 않더군요. 나는 본디 충동과는 관련이 먼 몸임에도 사람 서넛쯤은 너끈히 죽일 것 같은 충동이 들었으니까요.”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공녀와 나는 참 불행히도 생각하는 방식도 사고도 삶을 살아온 방식마저 비슷하지. 그렇다면 이런 묘한 부분조차 비슷할지도 모르니 알려주는 겁니다, 공녀.”
슈리안이 느슨하게 웃으며 냉정한 눈을 드러냈다.
“아니, 나의 연인에게 주는 도움이라 하면 낭만적이겠습니까?”
“우습지도 않군요, 달링.”
“네. 참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이런 기묘한 통제가 있음에도 우리는 무사히 살아있지요. 만약 그대도 이런 충동을 느꼈다면 내가 그러했듯이, 완전히 나를 되돌려받는 기분을 느끼길. 감각을 되찾길 바랍니다.”
로잘린이 가만히 슈리안을 응시했다. 슈리안은 그저 사람 좋게 웃을 뿐이었다.
마침내 로잘린이 차갑게 고개를 돌려버렸을 때 슈리안은 이것이 그녀식의 긍정임을 또 한 번 어렵지 않게 알아보았다.
“아, 그런데 말입니다. 내 연인님?”
“달링. 아직도 할 말이 남으셨다니 수다쟁이는 좀 별로인데요.”
“하하. 칭찬 고맙습니다. 그나저나 이건 가벼운 호기심입니다만…….”
질문을 하려던 슈리안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인지 자신이 지금 막 떠올린 생각에 스스로가 의아해졌던 까닭이었다. 왜 이런 생각을 했지?
“공녀, 당신은 대마법사를 증오하지 않았습니까?”
“……제가요?”
로잘린이 무슨 이상한 소릴 하느냐는 듯 서늘하게 쳐다봤다. 증오라니, 왜 그런 말을 하는진 모르겠으나 정말 그랬다면 이 계획에 발데르의 도움을 받을 리 없지 않은가.
서슬 퍼런 시선 속에서 슈리안은 이상함을 느끼며 미간을 찌푸렸다.
“음, 미안합니다. 내 착각인 모양이군요.”
어쩐지, 슈리안은 자신이 착각한 게 분명하다 싶었다.
왜인지, 순간이지만 대마법사가 둘. 그러니까 지금 대마법사인 발데르 이전에 또 한 명의 대마법사가 있다고 느꼈으니까.
‘왜 이런 생각을 했지?’
하지만 곧 그 생각은 거짓말처럼 깔끔하게 저편으로 넘어갔다. 그들에겐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였으니까.
죽은 ‘주인공’은 ‘새 주인공’을 위해 모두의 기억 속에서 지워진다,
세계의 규칙을 모르는 자들의 태연함 속에서 거대한 진실이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흘러갔다.
허공에서 이를 보던 세계의 관리자만이 자신의 파트너, 그리고 이 세계의 유일한 희망을 향해서 이동했다.
[요정은 빙의자님을 너무너무 아껴요!✿⸝⸝⸝⸝(*/∇\⭒)]
‘뭐야, 이놈 또 왜 이래?’
* * *
다음 날.
공녀 언니가 선언했던, 대망의 데이트 날이었다. 나는 아침부터 복잡함 반, 염려 반. 반반의 마음으로 열심히 준비했다.
이 와중에도 발데르 생각만 하면 심장이 주책없이 뛰는 통에 더욱 심란했다고 할까.
“와, 아가씨 너무 예쁘세요!”
“맞아, 맞아. 세상에…… 추수제 날보다 더 예쁘세요!”
“으응?”
나는 거울을 보면서 어색하게 고마움을 전했다. 추수제 날보다 더 예쁘다는 게 더 화려하단 소리는 아니겠지? 아니, 공원 산책인데 연회장에서보다 더 화려하면 큰일이지.
“드레스가, 아니, 원피스가 좀 화려한 거 아닐까?”
“화려하긴요! 아가씨 요즘 유행은 다 이렇게 장식이 많은 편이에요.”
“맞아요!”
그렇다면 다행이긴 한데. 비교적 평범하고 수수해보고 싶은 마음이 크단 말이지. 하지만 내가 맡은 역할을 생각하면 그냥 입어야겠지?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갑작스럽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내 허락이 떨어지자, 문 틈 사이로 빼꼼 보인 얼굴은 다름 아닌 베키였다.
아침 식사까진 함께 있다가 날 꾸며주는 사이에 없어졌다 싶었더니 어딜 다녀온 모양이었다.
“베키? 무슨 일이야?”
“아, 다름이 아니라 아가씨……! 전해드릴 것이 있어요.”
전달받을 거? 뭔데?
베키가 총총 다가와 내게 무언갈 내밀었다. 갈색 봉투로 예쁘게 싸인 종이 꾸러미였다. 어째 느낌이 별로였다.
‘전에 이런 봉투에서 내가 먹는 약을 꺼내는 걸 본 것 같은데?’
아니나 다를까, 베키가 방긋 환하게 웃었다.
“아가씨 주치의가 효과 좋은 약을 만들어서 주고 가셨대요. 아가씨께서 꼭 드시라고 하셨어요!”
“으응…….”
주치의는 백작과 백작 부인이 달린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 온 제국을 뒤져 찾아낸 명의였다.
다만, 워낙에 공사가 다망한 탓에 이 저택에 머무르다가도 다른 환자를 보기 위해 훌쩍 떠나기도 했다. 덕분에 나는 거의 얼굴을 못 본 사람이다.
어쨌거나 베키가 한 이야기에 같이 있던 하녀들도 신나서 한마디씩 얹었다. 효과 좋은 약이라니, 잘됐어요! 아가씨가 이만큼 건강해지신 건 약 덕분 아닐까요? 라면서.
‘아니, 아니야. 내 건강은 내 노가다와 굴렁쇠처럼 구른 지난날과 피, 땀, 눈물의 대가라고, 언니들…….’
베키가 밝게 웃음짓는 얼굴 그대로 내게 약을 내밀었다.
“이번에야말로 정말 큰 효과가 있을 거래요! 다행이에요, 그죠 아가씨.”
으음……. 이거 꼭 먹어야 하나?
그러나 생글생글 웃으면서도 애정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에 못 이겨 그 자리에서 바로 먹어야 했다.
“오래 기다리셨어요?”
모든 단장을 마치고 마차에 앉았을 때, 기다렸다는 듯이 내 옆자리에 누군가 스르륵 나타났다.
나는 이제 더는 놀라지도 않았다. 당연하게도 발데르였으니까.
‘내가 먼저 말하기도 전에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했지.’
밖으로 나와도 보이지 않길래 어디서 보이려나 싶었더니, 마차에 타는 걸 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오늘 예뻐요.”
“네? 감사합니다.”
“어제도 예뻤지만.”
“…….”
……이 사람, 진지하게 과거가 어땠는지 좀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닐까. 다시 한번 충동이 일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예,”
“음, 그만하셔도 될 것 같아요. 제가 생각보다 쑥스러움을 잘 타거든요.”
“그런가요? 나쁘지 않네요. 그럼 더 말하면 더 쑥스러워 해주시는 건지?”
“……저기, 너무 직진하지 말아 주실래요?”
나도 모르게 속마음이 불쑥 튀어나왔다.
그러자 발데르는 순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다가 곧 아, 하고 보일 듯 말 듯 웃었다.
“아, 직설적이었구나. 미안해요, 나도 모르게 그만.”
“아뇨, 미안하실 일은 아니고요.”
마차가 출발하며 창 밖의 풍경이 느릿하게 바뀌었다. 공녀 언니가 예고한 대로 오늘은 날이 무척 좋았다. 아마 사람도 많겠지…….
‘와, 긴장되네.’
공녀 언니와 황태자의 데이트야 둘째치고, 내 데이트를 남들에게 실시간으로 공개하다니.
이 세계에서 가장 핫한 셀럽이자 권력자인 두 사람 옆에 있는 이상 함께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게 분명하니 말이다.
‘어찌 보면 내 연애를 티비나 유X브에 전시하는 거나 다름없잖아? 현생의 나였으면 상상도 하지 못할 이벤트다.’
난 주먹을 쥐었다가 펴다 말고 발데르를 흘끗 보았다.
“그저께랑 어제까지 하시던 일은 잘 되셨어요?”
그랬다. 그저께 일이 있다며 갑자기 휙 가버리고서, 발데르는 어제까지도 내내 바빴다. 내 옆에 나타나긴 했는데 얼마 안 가서 다시 가봐야 한다며 가버린 것이다.
사실 그럴 거면 처음부터 오지 않고 하루쯤 쉬어도 되지 않나 싶었지만.
“네. 잘 된 것 같아요. 아마도.”
“음, 마법을 시전하다 오셨다고 했죠? 혹시 어떤 마법인지 물어봐도 되나요?”
호수 공원까지는 거리가 살짝 있었다. 이대로 침묵하기엔 지루한지라 이것저것 물어볼 참이었다. 우선은 가벼운 얘기부터?
“네. 음…….”
그렇게 생각했는데, 어째 내 질문에 잠시 창문 너머를 보는 발데르의 표정이 영 심상치 않았다. 어쩐지 씁쓸해 보이는 표정, 그리고 분노가 스민 것도 같았다.
“누군가를 잊지 않게 만드는 마법입니다.”
“으음? 그렇군요?”
무려 대마법사씩이나 되는 사람이 이틀에 걸쳐 쓰는 마법에 대한 궁금증이 가득했건만 생각지 못한 답이 돌아왔다.
이 마법과 저 씁쓸한 표정은 무슨 관계가 있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