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3. 대마법사와 악녀 메이커 (35)
아니,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순식간에 변할 수가 있단 말인가? 아무리 자기들 목표가 급하다고 해도 그렇지 이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나는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몰라 표정을 흐리다가 말고 발데르를 올려다 보았다.
나와 다르게 이 남자는 웬걸, 뭐가 달라졌냐는 듯 아무 평온하고 태평한 표정이었다. 오늘도 여전한 반쯤 감긴 눈 탓에 여유롭고 느긋해 보이기까지 했다.
이 남자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자연스럽게 저 커플의 대단한 연기가 잊혀진다고 해야 할까, 흐려지더라.
‘그래, 이 순간만은 대충 살자……. 눈을 반쯤 떠서 눈꺼풀을 최소로 움직여 깜빡이는 저 남자처럼…….’
그렇게 결심하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화사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생각해보니까, 이 공녀 언니랑 황태자가 앞에서 어그로란 어그로는 다 끌어준 탓에 상대적으로 나랑 발데르의 존재감이 가려지는 건 아닐까?
……는 무슨.
‘가려지기엔 너무 잘생겼다고.’
나는 발데르의 미모를 떠올리고는 속으로 꾹 숨을 참았다.
그 사이에도 앞에서 1초에 세 마디는 떠들 작정인 듯 한시도 입을 쉬지 않는 기쎈 커플을 보고 있으려니 내 기가 쪽쪽 빨려 나가는 기분이었다.
그러다 누군가 내 손을 잡았다. 손을 타고 올라 손목을 부드러이 감싸 쥐는 손에 시선을 돌리니 나를 빤히 바라보는 미남 대마법사님의 시선이 있었다.
“영애.”
“……네?”
그의 뒤로 보이는 화사하기 그지없는 꽃이 가득한 배경 때문일까.
원래도 그를 보면 뛰던 심장이 괜스레 더욱 뛰는 것 같았다.
“저도 저렇게 해야 했던 거군요.”
“예?”
한창 미모를 즐기고 있었건만, 갑자기 진지한 표정을 하고서 이러는 것이 아닌가.
이건 또 무슨 소리야.
“깨달았습니다. 전 안일한 마음으로 임했던 것이군요.”
“저기, 대마법사님 지금 무슨 소릴 하시는 건지……. 저도 알 수 있게 해주지 않으실래요?”
발데르의 시선이 공녀 언니와 황태자를 흘끗 향했다. 자연히 내 시선도 그쪽을 향했다.
그리고 황태자와 공녀 언니가 자연스럽게 팔짱을 낀 장면을 보며 입이 살짝 벌어졌다.
……저 두 사람, 내 응접실에서는 닿는 것조차 서로 극혐했으면서?
“호칭이 이리도 중요한 것임을 알았다면 미리 공부라도 할 것을 그랬습니다.”
“아뇨, 그런 거 하지 마세요. 아니, 배우지 마세요.”
저 사람들 조금 이상하다고요. 이상한 거 배우지 마세요.
나름 단호히 말했다고 생각했는데, 발데르는 그렇게 느끼지 않았던 것 같았다.
찰나의 시간 동안 아주 진지하게 표정을 굳히더니, 고민에 잠긴 표정이었다.
그러고서는 하는 말이.
“달링? 자기, 여보, 슈가. 어느 쪽이 좋은지 말씀해주세요.”
“……다 싫어요.”
싫어. 싫다고. 그렇게 부르는 것도 싫고 불리는 것도 싫다고요?
내가 양팔을 붙잡고 히익 소리를 내며 문질렀다.
‘나는 남들 연애 읽는 거나 좋지, 내가 그렇게 오그라드는 그런…… 그런!’
그런 걸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러나 내가 간과했던 사실은, 이 자리에 그 누구보다 훌륭한 배우가 되어 열연 중이신 내 스승님이 함께 있었으며, 우리가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을 용케 다 보고 듣고 있었단 거였다.
“어머나, 좋네요. 나는 자기에 한 표. 달링은 어떻게 생각해요?”
“오, 내 피앙새의 의견에 동의하지만…… 더욱 달콤한 호칭은 슈가 같군요. 이걸 추천합니다, 영애.”
……망할 황태자 자식. 저놈은 그냥 즐기는 거다.
내가 가장 쪽팔려 할 거란 호칭을 기가 막히게 눈치챈 거라고!
“추천은 감사하지만, 영애가 바라는 쪽으로 선택하고 싶군요.”
그나마 다행인 건 발데르가 다른 때와 다르게 조금 차갑게 두 사람의 추천을 거절했다는 점이랄까.
“이름, 차라리 이름을 불러요. 저는 저런 호칭은…….”
“흐응?”
“아니, 크흠, 아직 이른 것 같아요. 우리 단계별로 해볼까요?”
공녀 언니의 무언의 압박에 나는 말을 하다 말고 황급히 말을 바꿨다.
그래, 친구 사이에도 이름을 부르는데 이 정도에서부터 시작해도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공녀 언니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어머나, 그러고 보니……. 달린 양. 영애의 이름은 사실 아주 달콤해질 수도 있는 이름이네요? 달린과 달링. 단 한 끗 차이잖아요?”
나는 멈칫했다.
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내용이네. 속으로 어이없이 감탄하면서.
“…….”
문제는 왜인지 발데르가 뜻 모를 표정을 지으며 눈빛을 빛낸 것 같단 점이었지만.
다행스럽게도 호칭에 대한 대화는 더 이어지지 않았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안쪽으로 갈까요?”
“내 시종이 피크닉 준비를 마쳤을 겁니다.”
그저 그런 연기 수준이 아니라, 준비도 수준급인 이 사기 커플이 이미 자리까지 마련해준 까닭에 나와 발데르는 준비한 것 하나 없이 아주 훌륭한 피크닉 세트 자리를 맞이했다.
이 예쁜 호수 공원에 어울리는 아주 아름다운 정자였다.
정자 안에는 4명이 앉으면 딱 맞을 듯한 테이블이 있었는데, 이미 그 위로는 훌륭한 테이블보를 포함해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디저트들이 멋스럽게 올려져 있었다.
저절로 작은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여기서부터는 말을 좀 편히 해도 괜찮아요. 그렇죠, 달링?”
“아, 뭐. 간단한 방음 마법을 걸어두었으니 그러시지요. 내 피앙세.”
“……편히 말씀하자고 하시면서 호칭은 대체 왜들…….”
“어머나, 영애. 낮말은 새 새끼가 듣고 밤말은 쥐새끼가 듣는답니다?”
“그냥 새도 아니고요……?”
나는 조금 넋이 빠져서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밖이기 때문에 방심할 순 없다며, 말을 조금 느슨히 하되 호칭은 잊지 않는 이 사람들이 대단해 보였다.
“정말 대단하네요. 못 따라가겠어…….”
“따라가고 싶으십니까?”
작은 중얼거림에, 옆에서 그윽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아무래도 둘씩 앉는 자리에다, 자리가 조금 좁다 보니 발데르가 아주 가까이 있었다.
멀리서 보면 영락없이 연인으로 보일 거리다.
“아, 영애. 여긴 멀리서도 잘 보이는 자리니, 적절한 스킨십은 미덕으로, 잘 알겠죠? 스승으로 드리는 권고랍니다.”
그렇게 말하는 공녀 언니는 황태자가 집어준 과자를 입으로 받아 먹고 있었다.
누가 누구의 입에 넣어줄 것인지 재빨리 가늠하며 살벌한 시선이 오가는 걸 보았는데, 그럼에도 웃음만은 잃지 않는 저 프로페셔널한 모습이란…….
“아뇨, 대마법사님. 저는 저렇게는 못 하겠어요……. 너무 레벨이 달라…….”
“발데르.”
“네?”
“오늘은 저도 발데르, 아닌가요?”
눈앞에 부드러운 웃음이 보이는 순간 심장이 다시 한번 쿵쿵 존재감을 드러냈다.
“공녀의 말처럼 낮말은 어느 새가 들을지 모르니까요.”
“엄……. 그, 그럴까요? 발데르.”
“좋네요.”
“어떤 점이요?”
“제 이름을 마지막으로 부른 건…… 죽은 친구였거든요.”
나는 멈칫했다. 어째서인지 건드려선 안 될 부분인 것 같아 조심스러워졌다.
“마법사들은 발데르 님을 뭐라고 부르는데요?”
“님이 아니라 그냥 발데르. 마법사의 탑에서 대마법사가 불리는 호칭은 이렇습니다. 탑주님, 혹은 마탑주님. 아, 마스터도 있군요.”
난 고개를 갸웃했다. 내 손이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찻잔을 툭 건드렸다.
“음, 그 말을 듣고 나니 더욱 이름을 불러드려야 할 것 같기도 하네요.”
“어째서요?”
“이름은 그 사람의 삶 자체인걸요.”
“…….”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낯선 세상에서 눈을 뜬 빙의자이기에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말이라고 할까.
나는 어느 순간부터 ‘달린 에스테’로 살고 있었다. 이 이름은 내 이름이며, 내 가족들로 여겼다.
“그런 이름을 아무도 부르지 않는 삶은 조금 외롭잖아요.”
“…….”
“흐음, 왜 그런 표정으로 보시나요? 왜요, 이것도 제가 처음인가요?”
이번엔 조금 여유롭게 톡 붙여보았더니, 발데르가 보일 듯 말 듯 부드럽게 웃었다.
……아, 괜히 여유 부렸다.
나는 금세 후회했다.
점차 밝게 퍼지는 웃음을 보면서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내 피앙세,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것이 불구경, 싸움 구경, 남의 연애사라던데 그대는 알고 있나요?”
“달링, 조금만 닥쳐봐요. 지금이 제일 재밌는 순간이라고요.”
어느 정도냐면 바로 맞은편에서 대놓고 관객이 되어 쑥덕이는 저 커플의 소리를 한 귀로 흘려들을 정도였다.
발데르가 눈을 반듯하게 떴다. 그 눈 안으로 언젠가 보았던 금빛 아지랑이가 살랑살랑 흔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숨을 꿀꺽 삼켰다.
“달린.”
……아, 망했다. 이름은 허락하지 말걸.
차라리 ‘자기’ 따위의 호칭이 나았을 것 같았다.
“만약 눈이 아주 많이 내려서 지붕에 눈이 쌓였을 때…… 한 눈송이가 지붕에 쌓인 순간 지붕이 무너졌다면, 이건 앞선 눈송이의 탓일까요, 마지막 눈송이의 탓일까요?”
“네? 어, 엄, 그, 둘 다 잘못이 아닐까요……?”
이 사람 지금 이 순간에 무슨 소릴 하는 거지?
아니, 무슨 소릴 하고 싶은 거야?
발데르가 싱긋 웃으며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 손가락 끝은 하늘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뇨. 달린. 그건 저기 하늘의 잘못이죠. 하지만 눈을 내린 것이 잘못일까요? 아주 낮은 가능성의 우연과 우연, 또 다른 우연이 겹쳐 만들어낸 결과에 누가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요.”
“…….”
“그러니 달린, 나는 이 우연이 겹쳐온 일들에 더는 이유를 찾지 않기로 했어요.”
고개를 숙여 작게 속삭이는 말에, 어쩐지 등골이 오싹해지는 건 왜일까.
발목으로 새카만 물이 밀려 들어와 밧줄처럼 은근히 붙잡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