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3. 대마법사와 악녀 메이커 (37)
라이칸이었다.
그의 눈 속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이 담겨 있었다.
그중 알아볼 수 있었던 건 절망뿐이었다.
아이고, 지금 왜 여기 있는 건진 몰라도 하필 오해하기 딱 좋은 장면을 봤네.
그렇지 않아도 내 몸을 두고 심각하게 고민하던 사람인데…….
시선을 옮기면 나는 다시 한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휴고?’
여기서 보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라이칸보다도 더욱 놀랄 수밖에 없는 인물이 있었으니까.
아니, 북부에 있어야 할 대공님은 왜 저기 있는 거야?
내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세 번째 지령 ‘위기’ 달성 조건이 공개됩니다!]
[퀘스트(메인)- ‘필승! 새로운 세 번째 이야기에서 살아남기!’
3) 위기- 서브 남주 등장
달성 조건: ‘서브 남자주인공’을 선택해봅시다!]
나를 놀리기라도 하듯, 멈췄던 요정의 창이 띠리링, 익숙한 소리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내 시야가 가물어가는 것을 알기라도 한 듯 여느 때보다 더욱 크고 선명한 모습으로.
[여러 남성을 설레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악녀의 덕목!
남자주인공과의 애정이 무르익기 위해선 적절한 긴장이 필요하죠,
서브남을 골라봅시다. 선택! 당신의 서브남은?]
글자 하나하나가 내 눈에 그대로 박제되는 기분. 마지막 글자 하나까지 눈에 똑똑히 박혔다.
[※단, ‘나만의 로판’ 기능에 등록된 인물 중에서만 선택 가능합니다.]
……이건 또 뭐야.
‘XX, 요정들, 정말 이젠 욕할 힘도 없다…….’
그러나 이건 내가 지를 수 있는 마지막 내적 비명이었다.
이후로 몰려오는 수면에 속절없이 눈꺼풀이 감기도 말았다.
[이런, 죽지 않기 위해서는 푸욱 잠드세요, 빙의자님!]
* * *
달린이 스르륵 잠든 순간 모든 사람이 숨을 삼켰다.
‘죽었나?’
처음부터 지켜보던 황태자가 이리 생각할 만큼 평온하게 눈을 감는 모습이었다.
도리어 너무 평온하게 눈을 감아서 조용히 죽는 것처럼 보였단 소리다.
달린의 연약한 숨이 이어지자, 황태자의 등 뒤로 좀처럼 흐르지 않던 안도의 식은땀이 흘렀다. 그의 시선이 차례로 이 자리에 있는 남자들을 향했다.
억지로 모으려 해도 모으기 힘든 조합이다.
황자. 대공. 그리고 대마법사.
문제는 달린이 잠들기 무섭게 이들이 무섭도록 내뿜는 기운이 황태자는 몰라도 보통 기사들은 견디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죽을 맛에 가깝다는 점이었다.
황태자는 바로 옆에 있는 연약하기 그지없는 제 가짜 연인을 제 기운으로 보호했다. 그러고는 속으로 쯧 혀를 찼다.
제 동생이지만, 라이칸은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어떤 표정인지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눈이 맛이 갔군.’
동생의 새로운 모습이랍시고 즐거워할 때가 아니었다.
달린의 목숨이 위험하다는 건……
달린을 세상 그 누구보다 아끼는 여동생 유엘이 슬퍼할 일이었다.
혹시라도 달린이 죽기라도 했다간, 이제야 겨우 세상에 나오게 된 제 여동생이 어떻게 되어버릴지 모른다.
달린이 예상했던 것과 다르게 황태자는 생각보다 더 많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제 여동생이 자신의 유모이자 친구에게 가지는 비정상적일 정도로 맹목적인 애정 같은 것을.
달린 에스테가 죽거나 다치면, 유엘의 정신 또한 무사할 수 없다.
황태자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영애는 괜찮은 건가요?”
날카로운 검이 충돌하기라도 하듯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헤벤 공녀, 로잘린이 단호한 얼굴로 물었다. 이 날카로운 기운 사이에서도 홀로 평온한 표정이었다.
“……죽진 않았습니다. 내 마력 덕분에요.”
“그 말인즉…….”
“달린 양이 죽으려 했던 날이 과연 오늘인지는 알 수 없지만. 고비는 넘겼단 말입니다.”
느긋하게 달린의 이름을 담자, 라이칸과 휴고 두 사람의 시선이 발데르를 향했다.
결코 살갑지 않은 시선이었다.
‘……이거, 생각보다 더 심각하게 맛이 간 얼굴들인데?’
자신의 사랑은 망했을지언정 인간 관계 및 남들의 애정 관계사에 있어서만큼은 몹시도 눈치가 빠른 로잘린은 세 남자의 시선에 담긴 함의를 정확히 파악했다.
“그럼 달린을 쉬게 하는 것이 먼저겠군요.”
명료하게 말을 던진 사람은 다름 아닌 휴고였다.
달린 앞에서 쩔쩔매던 얼굴은 온데간데없이 차갑게 식은 얼굴만이 자리했을 뿐이었다.
“달린은 본래 몸이 약하여, 이런 식으로 쓰러지는 일이 없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옆에 있는 이가 잘 챙길 시에는…… 분명히 막을 수 있는 일이기도 하지요.”
서릿발 같은 음성을 뱉는 휴고의 옆으로는 휴고를 보좌하기 위해 함께 나왔던 북부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의 얼굴엔 하나같이 달린을 향한 걱정이 가득했다.
“내 약혼녀를 보내 드릴 때에는 분명 주변에 좋은 사람이 가득하리라 믿었건만…….”
휴고의 붉은 눈이 어둠 속의 붉은빛처럼 낮게 번뜩였다.
“아니었나 보군요.”
북부 사람들은 며칠 전, 달린이 이곳을 산책할 것이라는 소문을 접했다.
어렵게 접한 소문도 아니었다.
헤벤 공녀가 직접 자신이 달린과 함께 어디로 갈 건지 동네방네 소문을 퍼트렸으니까.
‘대공님, 대공비, 아니 에스테 영애께서 분명 여기로 오신다고 했다니까요?’
‘중요한 건 우연! 우연을 가장한 만남입니다!’
‘옳소!’
그저 수하들의 이야기에 솔깃하여 단 한 번이라도 얼굴을 마주하고 싶었을 따름이었다.
많은 욕심도 아니었다. 그저 얼굴을 보고 싶었을 따름인데…….
휴고의 손이 꾸욱 쥐어졌다.
그의 발밑으로 땅이 움푹 패였다. 달린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북부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놀라 제 주인을 향했다.
“……에스테 영애는, 정말로 스스로 죽으려 했던 건가?”
고요해진 틈을 통해 라이칸의 단조로운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터질 것 같은 감정을 꾹꾹 눌러 담은 목소리에 발데르의 시선이 라이칸을 향했다.
“모릅니다.”
“…….”
“하지만, 이렇게 독을 먹어왔다는 건, 보통의 경우에는 이렇게밖에 해석이 되지 않습니다.”
“……모르고 먹어왔을 가능성은?”
“먹을 때마다 분명 뱃속을 칼로 헤집는 것처럼 괴로웠을 텐데. 그토록 괴롭기 위해 약을 먹는 사람도 있습니까?”
“…….”
그러나 이들이 몰랐던 사실 하나.
달린은 낯선 세계에서 눈을 뜬 순간부터 이 고통과 함께 했다.
죽음을 앞둘 정도로 약한 몸은 걸음 하나에도, 한숨 한번에도 고통과 체력 소모를 호소했다. 달린은 이러한 고통이 본래부터 존재해왔을지, 혹은 약으로 인한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시달렸다.
“이렇게 망가진 몸은 처음 봅니다.”
달린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고통에 익숙해졌다.
“아주 오랫동안 정말 오랫동안 스스로를 괴롭혀 왔을 겁니다. 고통이 없는 날이 단 하루도 없었겠지요.”
결국엔 고통에 익숙해진 채, 무엇이 자신을 고통스럽게 한지조차 알지 못했다.
약을 보는 순간마다 느꼈던 찝찝함이 사실은 고통의 신호였다는 것조차 알지 못할 만큼.
달린의 몸은 본래 느껴야 할 정도보다 고통을 약하게 느끼는 대신 감각이 무뎌지고 무너졌다. 이 무뎌진 감각은 요정이 의도하고 이렇게 만든 것이기도 했다.
“…….”
모든 이야기를 듣던 라이칸의 표정이 무너져내렸다.
이 순간 그는 사형선고를 받은 사형수라도 된 것처럼 숨을 쉴 수 없었다.
“그, 그런…….”
라이칸은 지금까지 보아왔다.
마치 봄인 양 웃던 달린의 얼굴이 어느 순간 초연해지며 허공을 보던 순간들을.
그러한 때의 달린은 마치 이 세상에 있는 것 중 그 무엇도 필요 없는 사람처럼 굴거나, 그렇게 보이곤 했다.
설마하니, 그것이 세상을 놓을 의도였음을 알지 못했다 생각하니 스스로가 몹시 어리석게 느껴졌다.
라이칸은 잠든 달린을 보며 속으로 눈물이 흐를 것 같은, 그 눈물이 사실은 뜨거운 용암과도 같아서 자신을 태워버릴 것 같은 감각을 조용히 견뎠다.
“……이상하군요. 왜 그녀가 벌써 죽기라도 했다는 듯한 얼굴들인 건지.”
이 모든 순간을 보고 들어온 휴고가 고요하게 말했다.
“내 전 약혼녀께서 정말로 죽기를 결심한 것인지, 여기 있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지만. 정말 그러하다면.”
휴고의 시선은 더없이 낮고 진지했다.
“지금부터라도 살고 싶게 만들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의 입꼬리가 차갑게 올라갔다.
오만하기 짝이 없는, 달린은 보지 못한 그의 대공으로서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 순간 그 누구도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한 것 같으니. 그럴 자격은 없는 것 같군.”
지금까지는 그저 달린에게 부담이 될까, 저 가녀린 사람이 심적 부담으로 인해 아프기라도 할까 귀해서, 너무나 귀해서 차마 손조차 뻗지 못했다.
그러나 남의 손에서 아픈 모습을 보려고 놓아준 것이 아니다.
“덕분에 잘 알겠소.”
자신이 보호할 수 있다. 그 어떤 시련과 재앙 앞에서도 인내할 것이다.
“내가 물러날 이유는 없었던 것 같으니.”
휴고가 앞으로 나서려는 찰나, 누군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라이칸이었다.
휴고가 미간을 찡그리기도 잠시, 라이칸은 휴고에겐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발데르를 향했다.
“대마법사, 당신이라면 이동 마법을 사용해 에스테 영애를 곧바로 저택으로 데려다줄 수 있겠지? 어서 영애를 저택으로 데려가도록. 이 순간 에스테 영애에게 가장 필요한 건 휴식일 테니.”
“……황자님, 저자가 영애에게 안전한 사람이리라 생각하시는지요?”
“그렇다고 나나 대공이 데려갔을 때 더 빠르게 데려갈 자신이 있는가?”
“저자가 무슨 수작을 걸지 모르는 일이지요.”
발데르는 이 모든 대화를 들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순간 그는 단 하나를 깨달았다.
아, 나는 달린, 이 사람을 아무에게도 주고 싶지 않다.
발데르의 부드러운 시선이 잠든 달린의 얼굴을 담았다.
그는 분명히 경고하고, 또 경고했다.
대마법사에게 ‘처음’을 주지 말라고.
그 맛을 맛본 대마법사가 어떻게 되는지, 그녀는 결코 알지 못했으리라.
‘이건 내 탓이 아니에요. 달린.’
발데르의 혀끝에 그녀를 향한 말이 맴돌았다.
당신을 가지려면 어떡해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