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199화 (199/281)

◈199화. 3. 대마법사와 악녀 메이커 (38)

* * *

[인물 ‘라이칸’이 서브 남주 후보로 입후보합니다!]

[인물 ‘휴고’가 서브 남주 후보로 입후보합니다!]

‘으음, 시끄러워…….’

푹 잠이 든 것 같은데, 연신 시끄러운 소리에 방해를 받았다.

얼른 꺼버리고 다시 잠들고 싶건만 고장 난 자명종처럼 집요하게 쫓아오는 소리에 결국 난 눈을 뜨고 말았다.

“으음……. 끙, 낮인가.”

눈을 뜨자마자 눈부신 햇살이 눈꺼풀을 간지럽혔다.

볕을 가리며 얼른 눈을 비볐다. 시야가 흐릿해서 앞이 분간되질 않았다.

‘뭐야…… 얼마 기절하지 않은 건가?’

기절했을 때 한낮이었던 것 같은데 아직 햇살이 보이다니. 그렇다면 아마 한 시간 정도를 기절했던 게 아닐까?

“일어나셨습니까?”

이어 들려오는 부드러운 목소리에 순간 나는 꿈을 꾸는 줄 알았다.

그만큼 솜이불처럼 보드랍고 다정한 목소리였다.

쿵쿵, 심장이 기다렸다는 듯이 뛰는 걸 느끼고서야 꿈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아, 대마법사님. 같이 계셨군요?”

이제야 기절하기 직전의 일이 실감 나는 기분이었다.

맞다, 나 피 토하다가 쓰러진 거였지?

거기다가…… 그 피는 사실 내가 삼킨 마법 독 때문이었다고 하고.

기절하기 직전 보았던 요정의 창 내용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시야가 가물가물했던 것 같은데, 신기할 정도로 명확히 내용이 떠올랐다.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띠리링 소리가 들렸다.

[‘나만의 로판’ 기능이 활성화됩니다! ˚✧₊⁎(˵⚈ε⚈˵)⁎⁺˳✧༚]

[인물의 역할에 관여합니다. 나만의 로판 기능이 활성화될수록 소재가 변할 가능성이 존재합니다! 세 번째 이야기 ‘메인 퀘스트’에 영향을 미칩니다!]

으음? 그러고 보니 계속 시끄럽게 울리지 않았나?

내가 눈을 뜨기 직전까지 울렸던 걸 생각하면 무언가 창이 더 떠올랐던 것 같은데.

“저, 대마법사님.”

“발데르. 이렇게 부르기로 했지요?”

“어, 음. 네. 발데르. 제가 얼마나 잤나요? 1시간? 2시간?”

“음, 달린의 상태는 보통 잤다라기 보다는 기절했다라는 표현을 써야 할 것 같지만, 하루입니다.”

“아하, 네 하루 꼬박 기절…… 네에?!”

뭐야. 하루나 잠들었어?

그러나 나는 곧바로 수긍했다.

‘하기야, 피를 그렇게 토했는데 하루 꼬박 기절할 법하지.’

오히려 이 세계에서 처음 눈을 뜨고 나서 얼마 안 가 픽픽 기절하던 시절엔 이보다 더한 시간을 쓰러져 있다 일어나곤 했다. 한 사나흘 기절했을 때도 많았지?

“당신 저택 사람들은 많이 놀라긴 했습니다만, 생각보다는 신중하고 차분하게 대처하더군요.”

“아, 네. 음…… 가족들과 하녀들에겐 익숙할 테니까요.”

그들은 아마 내가 이 몸에서 눈을 뜨기 전부터, 그리고 눈을 뜬 후에도 계속 내 아픈 모습에 익숙했던 사람들이다.

물론 익숙하다고 해서 놀라지 않은 건 아니겠지만, 처음 접하는 사람보다야 침착했으리라.

“……아프지 않았습니까?”

“네? 네, 뭐. 음……. 따끔하긴 했는데, 사실 그리 아프진 않았던 것 같아요.”

“아프지 않았다고요?”

왜, 아프지 않다는 말에 이런 표정을 짓는지 모르겠다.

정말 아프지 않아서 아프지 않다고 한 건데……?

‘사실 지금까지 정말 아팠던 걸 꼽으라면 첫 번째 메인 퀘스트랑 두 번째 메인 퀘스트에서 퀘스트 깨다 말고 칼을 맞았을 때 정도지 뭐.’

다른 건 몰라도 칼 맞는 건 진짜 아프더라.

눈앞이 새하얗게 탈색되는 기분이랄까. 다시 느끼고 싶진 않은 감각이지.

‘그나저나 내가 깨기 직전에 마구 떠올랐던 요정의 창은 뭐였지? 그 내용이 궁금한데……. 게다가 내가 쓰러지기 직전에 보았던 것들도 다시 보고 싶은데 말이지.’

이렇게 생각하기 무섭게 띠리링 소리가 들려왔다.

[빙의자님이 원하신다면! 요정은 기꺼이 봉사합니다! 따라란 ҉ ٩(๑>ω<๑)۶ ҉ ]

따라란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난 눈앞에 주르륵 떠오르는 창을 응시했다.

[세 번째 지령 ‘위기’ 달성 조건이 공개됩니다!]

[퀘스트(메인)- ‘필승! 새로운 세 번째 이야기에서 살아남기!’

3) 위기- 서브 남주 등장

달성 조건: ‘서브 남자주인공’을 선택해봅시다!]

[악녀의 덕목은 이성을 애태우는 것에도 있지 않을까요?

남자주인공과의 애정이 무르익기 위해선 적절한 긴장이 필요하죠!

이를 위해 서브남을 골라봅시다. 위기의 순간, 나타난 당신의 서브남은?]

‘아, 그래 이런 내용이었지.’

서브 남주.

이 네 글자에서 시선을 떼어낼 수가 없었다.

사실 낯선 단어는 아니었다.

‘두 번째 메인 퀘스트에서도 라이칸이 서브 남주로 나타났었잖아?’

본래 두 번째 메인 퀘스트가 이어지는 공간인 북부에는 다른 이야기 주인공이 들어올 수 없지만, 당시엔 라이칸이 나만의 로판 기능으로 특별히 역할을 부여받아 들어올 수 있었던 것으로 이해했다.

곧이어 기절하기 직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내용 또한 다시 한번 떠올랐다.

[※단, ‘나만의 로판’ 기능에 등록된 인물만이 선택 가능합니다.]

서브 남주로는 나만의 로판 기능에 등록된 인물만 된다라…….

‘아니 그럼 후보가 딱 정해져 있는 셈이잖아?’

라이칸과 휴고. 두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다.

두 번째 메인 퀘스트에서 서브 남주, 라이칸은 휴고의 애정 지수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렇다면 이 세 번째 메인 퀘스트에서 ‘서브 남주’는 어떤 역할을 하는 거지?

‘그리고 내가 서브 남주를 선택만 하면 세 번째 지령은 통과하는 건가?’

아니, 두 번째 지령 당시 벌어졌던 일을 생각했을 때 그럴 확률은 낮다.

애정을 표현하라기에 시키는 대로 했더니, 요정이 생각한 애정 표현과 내가 해석한 애정 표현이 서로 다르지 않았던가?

이 지령에서도 서브 남주를 ‘선택’하라는 말 자체에 다른 이면의 의미가 있을 확률이 높았다.

[인물 ‘라이칸’이 서브 남주 후보로 입후보합니다!]

[인물 ‘휴고’가 서브 남주 후보로 입후보합니다!]

으음, 그리고 이게 바로 내가 깨기 직전에 떠올랐던 요정의 창 내용인가 보네……?

나만의 로판 기능에 있는 남자는 단 둘, 그래서 예상은 했지만 둘 모두가 후보로 등록되어있는 걸 보면서 조금 착잡해졌다.

‘차라리 래빗을 여기 넣어주지.’

그럼 망설임 없이 선택한다.

서브 남주라서, 남자만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래빗은 나랑 같이 공동 주인공 자리를 줘도 오케이라고. 우리 귀여운 황녀님…….

‘……현실 도피는 여기까지 하고.’

나는 고개를 돌렸다.

“발데르, 제가 음, 기절하기 직전에 2황자님이랑 북부 대공님을 뵌 것 같은데 그건 꿈이 아니죠?”

“네. 꿈이 아니에요.”

“으음…… 그렇죠…….”

피를 열심히 흘리는 모습을 보았다니, 다음에 만났을 때 어떻게 해명해야 하려나.

아니, 그보단 이 남자랑 먼저 풀어야 할 이야기가 있지.

“발데르, 그 마법독이란 것 말인데요……. 먹어서 축적된 것이 맞죠?”

“네. 맞아요. 그리고 먹을 때마다 아주 괴로운 고통을 유발하기 때문에 보통은 천천히 자살하는 사람들이 애용하는 방법이죠.”

“……그, 딴지 걸려는 건 아니고 자살하려는 사람이 왜 굳이 그렇게 괴로운 방법을 택하죠?”

“세상엔 스스로에게 괴로운 고통을 주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 있던데요. 게다가 그런 사람이 대부분 두려움 때문에 대번에 죽진 못하니, 천천히 자신을 죽여가더군요.”

“……당신은 제가 그런 사람이라 생각했다는 거죠?”

“아닌가요?”

네, 아닌데요. 난 아픈 게 세상에서 제일 싫은 사람 중 하나라고요.

내가 무엇 때문에 고생고생하면서 건강 수치를 올렸는데!

‘살아남으려고 얼마나 발버둥 쳤는데, 자살이라니 나랑 제일 어울리지 않은 단어라고요.’

“뭐, 그래요. 그건 아니니까 대충 넘어가고.”

“…….”

“이거 해결 방법이 있을까요?”

“……글쎄요. 이미 몸을 그 정도로 망가트려 놓고서 그런 얘기를 하는 것 자체가 신빙성이 없네요.”

발데르가 내 손을 가벼이 잡고 손가락으로 내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

“내가 달린의 손등에 불어넣었던 내 마력을 기억해요?”

“네? 네.”

“그 마력이 미리 당신의 영혼을 붙잡지 않았다면, 당신은 정자에서 사망했어요.”

“…….”

“이런데도 당신이 죽음을 준비하지 않았다고요?”

부드럽지만 단호한 시선 안으로 금색 아지랑이가 휙휙 물결을 일으킨다.

나는 숨을 잠시 참았다.

……이런. 상황이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이 남자는 내가 죽으려고 했다는 걸 확신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확신이 가득한 시선이었다.

보통 이런 눈을 한 사람은 설득하기 어렵지? 나는 설득을 포기하고 다른 이야기를 꺼내 보려 했다.

예를 들면 하루 전에 공녀 언니와 황태자까지 있던 자리는 어떻게 된 건지.

앞으로 내가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이외에도 궁금한 건 또 하나 있었다.

이건 이 남자가 아닌 요정에게 궁금한 것이다.

‘야, 요정. 이번 세 번째 지령이 서브 남주를 ‘선택’하는 거라면, 만약 아무도 선택하지 않는 것도 선택이라고 할 수 있나?’

[요정은 가능하다고 답해요! ◕‿◕✿ 이런, 하지만 그 선택지는 추천하지 않아요!]

‘왜?’

잠시 방안으로 침묵이 짙게 내리깔렸다. 발데르도 나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곧 요정의 창이 스르륵 떠올랐다.

[세 번째 지령은 다름 아닌 ‘빙의자’님을 위해 추가된 지령이니까요!]

‘그게 무슨 말이야? 설명해.’

[흐음, 요정은 이번 한 번만 특별히 팁을 방출하기로 해요! 간단한 내용이랍니다.]

미묘하지만 요정의 말투가 바뀐 것 같았다.

[여기서 빙의자 님이 ‘서브 남주’를 택하지 않으면…… 눈 앞의 남자주인공의 집착이 눈덩이처럼 커질 텐데, 그걸 빙의자 님이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요?]

……뭐?

[세상에서 가장 강한 대마법사의 집착은……]

“달린.”

그 순간 요정의 창이 이지러지며 눈앞에서 사라졌다.

나는 천천히 눈을 들어올렸다.

나를 관찰하듯 빤히 바라보는 미남이 앞에 있었다.

마치 나를 위해 태어난 듯, 내 취향이 모두 집약되어 있는 얼굴을 보며 숨을 삼켰다.

쿵쿵, 심장 소리가 절로 커진다.

천천히 다가온 발데르가 내 옆을 자연스럽게 짚었다.

이 남자가 가까워진 건 하루 이틀 있던 일이 아니지만…… 솔직히 이 순간에 처음 알았다.

불쑥 다가온 것보다도 이렇게 도망갈 틈을 주듯 느릿하게 다가오는 쪽이 더욱 긴장을 유발한다는 것을.

“당신 생각이 끊이질 않는데, 어떡하면 당신도 날 생각해?”

느릿하게 감겼던 눈이 다시 뜨였을 때, 내 숨이 멈췄다.

깊어진 눈동자 안으로는…….

무뎌진 나마저 알아차릴 만큼의 감정이 가득 담겨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건 분명, 내가 감당하지 못할 것이었다.

[빙의자 님 당신을 위한 선택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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