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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200화 (200/281)

◈200화. 3. 대마법사와 악녀 메이커 (39)

나는 숨을 삼켰다.

‘말을, 말을 해야 해…….’

이 순간 침묵이 길어질수록 내게는 좋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세상이 내 편이 아니며, 이 망할 요정마저도 내 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 언제나 나를 도왔던 것은 내 감이었다.

그러니 이 감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그으, 일단은 저기, 그게 말이죠. 다른 것부터 하나 물어도 될까요?”

“…….”

발데르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지금 막 고백… 크흠, 비스무리한 걸 했는데, 내가 대놓고 무시한 셈이 됐으니 심기가 불편하지 않을까.

‘마법으로 막 앙갚음하고 그러진…… 않겠지? 그러지 않게 해주세요…….’

슬쩍 뺨을 잡고 흘끗흘끗 발데르의 눈치를 연신 보자, 발데르는 천천히 시선을 내리깔더니 이내 나른한 날숨을 내쉬었다.

그 동작마저도 천사 그림에서 뚝 떼어 와서 현실로 만든 것처럼 우아해서 눈을 뗄 수 없는지라, 날뛰는 심장을 속으로 꾹꾹 눌러 참아야 했다.

“그래요. 궁금한 게 뭔데요?”

눈을 감았다 뜬 발데르의 눈은 신기하게도 조금 전에 보았던 깊디깊은 감정이 금세 갈무리되어 있었다. 평상시와 다를 바 없이 눈을 반쯤 감은 모습이었다.

졸린 듯 성의 없어 보이지만, 목소리만은 부드러운.

내가 익히 아는 모습이 나와서 나는 조금 안심했다. 오, 이제 대화가 가능해진 거지?

“일단은 제가 여기 누워 있다는 건 대마법사,”

“발데르요.”

“음, 네, 발데르가 도와주셨기 때문이라는 거죠? 감사합니다.”

자, 봐라. 난 살려줘서 고맙다고 인사도 한다고요. 그런데 내가 일부러 죽으려 했겠습니까?

보란 듯이 이 말부터 했지만 어째 발데르는 아무 감흥 없는 얼굴이었다. ‘그래서 뭐요?’ 하는 표정이랄까.

……씨알도 안 먹힌 것 같군. 대체 왜지?

‘내가 어딜 봐서 죽고 싶어하는 사람으로 보이냐고.’

아니, 정말 죽고 싶었으면 이 남자한테 처음 보자마자 연인이 좀 되어달라는 부탁 같은 걸 했겠냐고.

나는 속으로 꿍얼대면서 일단 표정을 가다듬었다.

“혹시 제 가족들이……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나요?”

조금 진정되니 자연스럽게 가족들이 떠올랐다.

부친이 병에서 회복한 지 오래되지 않았는데, 이번엔 딸이 거의 반죽음 상태로 나타났으니 얼마나 놀랐을까…….

발데르는 가족들과 저택 사람들이 신중하고 차분하다고 했다지만, 다들 너무나 놀란 것을 겨우 눌러 참았을 것이다.

아무리 내가 아픈 모습이 익숙하다고 해도 그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건 아닐 테니까.

“네, 다른 말은 없었습니다. 아, 주치의를 부르겠다곤 하더군요.”

“아…… 주치의.”

윽, 그 사람은 딱히 보고 싶지 않은데. 하지만 반드시 봐야 할 사람이었다.

“발데르, 가족들에겐 그 독에 대해선…….”

“아직 말하지 않았습니다. 당신과 대화가 우선이니까요.”

그 약을 만들었을뿐더러 준 사람이 다름 아닌 그 주치의니까.

‘달린’을 죽음으로 이끌어간 범인이다.

‘내가 빙의하기 전에도 달린은 그 약을 쭉 먹어왔을까?’

그렇다면 ‘달린’은 자신이 그 약 때문에 점차 죽어간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을까.

나는 고개를 살래살래 내저었다.

“나는 당신이 아닌 사람과는 딱히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아요.”

“어…… 감사합니다. 그래서 그 약에 대해서 좀 더 묻고 싶은데요.”

“제 말을 이렇게 자연스럽게 넘겨주시는군요.”

“……하지만 여기서 일일이 얼굴이 빨개지면 제가 묻고 싶은 걸 묻지 못하잖아요?”

이 말을 하는 동안 뺨에 또다시 알 수 없는 열기가 오르는 것도 같았지만, 무시했다.

내 말에 발데르는 나를 빤히 보는가 싶더니 보일 듯 말 듯 작게 미소했다.

“그렇군요. 당신은 자신이 어떤 얼굴을 하는지 모르는구나.”

“네?”

“아니에요. 그래서요? 질문은?”

“……으음.”

뭔가 찝찝하지만 일단 넘어가자.

“그 독 말인데요, 내가 몰랐다면.”

“모를 수가 없는 독인걸요.”

“……그래요, 알았다고 치고 내가 그 독을 누군가에게 받았다면요? 그리고 만약에 그 독이 약이라고 알고서 쭉 먹어왔다면요.”

“……먹을 때 느끼는 고통마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 셈인가요?”

“그 고통마저, 병이 낫는 과정으로 알았다면요?”

사실 약이 독인 줄은 까맣게 몰랐고, 먹을 때 아픈 것도 느끼지 못했지만.

일단은 대충 진실을 얼버무리며 물었다.

나를 부드러이 내려다보는 눈은 어째서인지 여전히 내 말을 믿지 않는다는 기색이 느껴졌다.

그럼에도 발데르는 입을 천천히 열었다.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가요, 달린? 나는 딱히 당신을 추궁할 생각이 없어요.”

“……조금 전에 그렇게 무섭게 다그치시고요?”

“다그친 기억은 없지만 설명한 기억은 있군요. 그리고 앞으로도 그 독을 먹더라도 난 상관없습니다.”

“네?”

발데르의 손이 느릿하게 뻗어 내 머리카락에 닿았다.

마치 닳는 것을 만지듯 보드랍게 머리칼을 만지던 손이 툭, 내 뺨에 닿았다.

“당신을 죽게 둘 생각이 없으니까요.”

“…….”

“당신은 이제 숨을 거두지 못해요. 당신의 의지로도.”

얇게 지어지는 눈웃음에서 눈을 떼어낼 수 없었다.

“내가 그렇게 두지 않을 테니까.”

……이거 좋아해야 하는 거지? 더는 어, 그 뭐냐 상처도 나지 않게 해주고 죽지도 않게 해준다는 것 같은데. 좋아해야 하는 거 맞지?

근데 왜 나는 소름이 쫙 돋냐……. 왜죠.

“어, 크흠, 치, 치료를 해주신다니 너무 감사하네요. ……공짜죠?”

“당신이 그렇게 생각한다면요.”

뭐야, 뭔가요. 그 찝찝한 대답은? 내가 대가가 뭐냐고 물었다면 뭐든 대답했을 것 같은 느낌인데.

“그래요. 음, 그럼 어쨌거나 내가 내 의지든 의지가 아니든 이 독을 이미 먹은 상황에서 해독은 할 수 있을까요?”

“불가능해요. 이미 독은 오랜 시간 당신의 몸을 망쳤어요. 달린.”

발데르의 눈으로 아주 잠시 날카로운 빛이 스쳤다.

이상하게도 대체 왜 스스로의 몸을 그렇게 망쳤느냐는 원망처럼 느껴져,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나는 억울하다고.

“당신의 몸은 뛰기만 해도 아플 것이며 언젠가는 숨만 쉬어도 아프게 될지도 몰라요.”

아, 그거 이미 잘 알지. 내가 막 이 몸에서 눈을 뜰 때 느꼈던 상태다.

“아이러니하게도 당신의 몸을 생존하도록 만드는 건 오직 당신의 영혼에 담긴 의지와 정체를 모를 힘이에요.”

정체를 모를 힘. 나는 바로 요정을 떠올렸다.

“그럼에도 당신은 이 모든 것을 몰랐다고 할 생각인가요?”

“…….”

나는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그럼 방법이 없다는 거죠?”

아쉽긴 했다. 뭔가 마법으로 어찌할 수 있는 거라면 더는 건강 수치에 연연하지 않아도 될 줄 알았는데. 앞으로도 열심히 건강 수치를 올리면서 살아야 한단 소리잖아?

만약 세 번째 메인 퀘스트까지 무사히 완수하면 이제 남은 이야기는 하나뿐. 여정의 끝이 멀지 않았지만, 현재 같은 몸 상태로는 무리니 이제 건강까지 다시 챙겨야 할 때가 온 거다.

‘그럼 이제 뭐가 문제인지 알았으니까 약을 더는 먹지만 않으면 나빠지진 않는다는 거네?’

손을 쥐었다가 펴보면서 몸을 점검하는데, 고개를 드니 발데르가 묘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역시 당신은 언제라도 죽을 줄 알았던 거군요.”

“으음? 말이 왜 그렇게 되는 건지 모르겠지만…… 네, 맞아요.”

하지만 그 마법독인지 뭔지, 정말 몰랐다고 말을 하려는 순간이었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고 난 저택 사람 중 하나겠거니 하는 생각으로 빠르게 입장을 허락했다.

문이 열리고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다름 아닌 베키였다. 사색이 된 낯이긴 했지만 나는 반가움에 얼른 손을 들려 했다.

“아, 아가씨…… 일어나셨군요!”

베키도 일어난 나를 보고 몹시 반가워하는가 싶더니, 이내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따뜻한 차와 부드러운 스튜를 준비했습니다. 얼른 드셔보세요.”

“어? 응, 으응. 그런데 베키. 부…….”

“그럼 저는 푹 쉬실 수 있게 나가보겠습니다. 시킬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불러주세요!”

“어? 잠깐, 그!”

그러나 베키는 고개를 숙이는 동시에 바람처럼 사라졌다.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우리 하녀 언니 왜 저래? 꼭 누군가의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여기서 베키가 나를 제외하고 눈치를 볼 사람이 누가 있단 말인가.

……아.

“발데르, 혹시 이제 마법으로 모습을 숨기지 않는 거예요?”

저택에서 나와 있을 때 발데르는 나에게만 자신의 모습이 보이도록 마법을 걸곤 했다.

그런데 베키가 노골적으로 눈치를 본 사람은 내가 아니었다.

“네. 영애를 이곳으로 들이고 줄곧 치료한 사람이 누구죠?”

“어, 발데르 맞죠?”

“네. 그러니 모습을 숨길 필요가 있을까요? 치료하던 사람이 갑자기 보이지 않으면 저택 사람들이나 달린의 식구들이 오히려 더 당황스럽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네…….

“사실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생각했지만 누군가 당신에게 억지로 마법독을 먹이거나 주입했을 가능성도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치료의 목적으로, 나를 제외한 타인은 이 방에서 1분 이상 머무를 수 없도록 이 저택의 주인과 협의했어요.”

“아, 아버지와요……?”

어쩐지 베키가 얼른 할 말만 하고 사라지더라. 나는 눈을 깜빡였다.

‘생각해보면 나도 순간이지만 마법독 얘기를 듣고 부모님이랑 연관이 있진 않은지 생각하긴 했지. 금방 그만두긴 했지만.’

부친과 모친이 나를 천천히 죽어가게 둘 리 없었다.

그것도 먹을 때마다 고통스러운 약이라니, 부모님이 그런 악독하고 치밀한 사람이었다면 메인 퀘스트를 이끌어가는 동안 모를 리가 없었다.

“아, 그리고 협의한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뭔데요?”

발데르가 순간 근사하게 웃었다.

부드러운 미소에 나도 모르게 주춤했다. 내 멈칫거리는 몸짓을 알아차린 듯 발데르가 성큼 다가와 굳이 상체를 숙여 내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왜인지, 당신의 방문을 자꾸 두드리는 날파리가 있었어요, 달린.”

날파리요? 나는 정신이 조금 아찔해졌다.

하필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가 생각보다 더 나른하고 근사했던 탓이다.

“병문안을 핑계로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허가할 수 없죠.”

“그, 누, 누가요?”

얼떨떨하게 겨우 묻자, 발데르에게서 두 사람의 이름이 나왔다.

익숙한 이름이었다. 다름 아닌 라이칸과 휴고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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