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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202화 (202/281)

◈202화. 3. 대마법사와 악녀 메이커 (41)

나는 파올로의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난 있다고 생각해.”

주치의의 죽음은 이상했다.

만약 내가 약을 먹고 죽어가는 것이 주치의 혼자 벌인 짓이라면 지금 죽을 이유가 없다. 동기도 빈약하다.

물론 우연히 죽은 걸 수도 있지만, 공교롭게도 내가 쓰러지고 나서 바로 살해당했다고?

우연일 가능성은 몹시 낮다.

‘그리고 찬찬히 생각해보니까, 내가 쓰러졌을 때 외부에 있었지.’

나는 호수 공원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그때 정자 안에는 나와 발데르, 공녀 언니, 황태자, 그리고 뒤늦게 달려온 황태자의 측근들까지. 이렇듯 보는 눈이 꽤 있었던 데다 정자 주변엔 구경꾼들도 많았던 걸로 기억한다.

비록 거리가 꽤 떨어져 있긴 했지만 내가 쓰러지는 걸 보지 못할 거리는 아니었다.

‘오히려 보여주기식 데이트였으니, 사람들 보란 듯이 잘 보이는 자리를 준비했었지.’

그러니 더욱더 잘 보였을 것이다.

내가 쓰러진 순간 소문이 퍼졌겠지. 내가 쓰러졌다거나 죽었다는 식으로.

하지만 바로 옆에 대마법사가 있었고, 대마법사가 나를 이동시키는 장면이 목격되었기에 이 점마저 같이 퍼졌다면?

‘대마법사가 함께 있으니 높은 확률로 내가 살아있다고 생각했을 거야.’

만약 내 죽음을 사주한 사람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이때 그 사람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증거를 지우려 하겠지.’

내 웃음이 옅어졌다.

어쩌면 대마법사가 옆에 있으니 곧 진실이 밝혀지고 자신의 정체가 드러날 거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조금이라도 자신의 꼬리가 잡힐 것 같은 기미가 보이자, 바로 죽여 없앤 거라면?

‘아귀가 맞아 떨어지는데…….’

그럼 남은 건 하나다. 그리고 어쩌면 가장 중요할지도 모를 질문.

「‘달린’을 천천히 살해하려던 인물은 누구인가?」

이를 파악하려면 ‘달린 에스테’라는 인물을 다시 생각해봐야 했다.

나, 달린 에스테는 그리 특별할 것 없는 가문의 둘째다.

예쁘장하긴 하지만 절세미인은 아니며, 특별한 능력도 없는 사람.

딱 하나 특이한 점이 있다면 타고나길 허약하고, 불치병을 앓고 있다는 점. 시한부라는 점.

돈만은 많았던 집안의 힘도 달린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거의 다 써버려서 이젠 재력마저 볼 것 없는 집안이 된 지 오래다.

그렇다면 아픈 것 외에 특별할 것 없는 영애를 죽이려 든 이유는?

‘지금은 단서가 너무 없어.’

내게 나도 모르는 특별한 점이 있었다면 그걸 알아내는 게 먼저일 것 같았다.

내가 이렇게 얘기했을 때, 파올로가 짐작 가는 바 없다는 듯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걸로 봐서는 파올로도 특별히 생각난 게 없는 것 같으니까.

“일단 오빠만 알아줘. 난 지금부터 어떻게 된 건지 알아보려 하니까.”

“달린, 너 혼자? 안돼. 위험해.”

“혼자는 아니야.”

나는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시야에 잘생긴 대마법사님이 대롱대롱 걸렸다.

“……대마법사님이 도와주실 테니까? 아마도?”

“……왜 의문형인 건데?”

파올로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발데르가 도와준다는 말에 표정이 살짝 풀렸다.

“음, 어, 발데르. 도와주실…….”

“달린이 원하신다면.”

“……저기, 달린아.”

“뭐야, 뭐야! 왜 낯간지럽게 부르는 건데?”

나는 진저리 치면서 파올로를 소름 끼치는 눈으로 보았다.

남매끼리 다정하게 이름을 부르다니, 이건 육아물 오빠가 아니면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까지는 아니고, 평소랑 다르게 부르니 괜히 낯간지러운 기분이었다.

“상황이 계속 심각해서 묻질 못했는데…… 너 대마법사님과는 무슨 사이냐?”

“어? 어어?”

나는 잠시 당황했다.

“보통 그런 걸 본인이 있을 때 물어봐?”

“아니, 본인이 없을 때 묻고 싶어도…… 어제부터 그런 때가 있어야지?”

“엄…….”

그건 그렇네. 심지어 내가 눈을 뜨고도 발데르는 계속 내 방에 있었으며, 방에 하녀들이 다녀가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으음, 일단은 지금…… 내 애인?”

“……뭐? 아니, 심상치 않다고는 생각했는데 이미 두 사람 마음이 통한 관계야?”

그렇게 낯간지럽게 표현하자니 조금 그런데. 일단은 연인 행세였으니까.

하지만 이 부분까지도 파올로에게 밝혀도 될지는 좀 고민이었다.

“사실 애인이라기보단 서로 협의 하에 가짜 연애를 하고 있어.”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럼 진짜 연인이 아니라고?”

“진짜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쪽이 맞겠네요.”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발데르가 대답했다.

지금까지 내 질문이나 내 설명에 덧붙여 설명하는 것 외엔 거의 말을 하지 않던 발데르가 처음으로 파올로의 질문에 답한 셈이었다.

“난 진짜가 되고 싶으니까요.”

그의 말에 내 심장이 또 주책없이 뛰기 시작했다. 망할, 주인은 난데 왜 제멋대로 반응하고 난리인지.

나는 의지와는 상관없이 뛰는 가슴을 꾹 부여잡으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파올로는 나를 한번, 발데르를 한번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쌍방이었군.”

“아니거든?”

“곧이겠구나.”

“아니라고.”

“대공님과의 파혼은 이거 때문…….”

“-도 아니라고! 아니, 아니라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관련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그건 저 망할 요정의 창과 퀘스트 때문이지, 발데르 때문은 아니었다.

애초에 나는 저 남자가 세 번째 이야기의 남자주인공이라곤 생각도 못 했으니까.

“……그래 뭐. 어쨌거나 네 뜻은 잘 알겠어. 너도 나름 생각이 있는 거겠지. 달린, 나는…….”

파올로가 머쓱한 웃음을 지우며 그 위로 다정한 미소를 덧그렸다.

“네가 아프거나 죽는 일만 아니면 뭐든 해도 괜찮아. 그렇지만 나나 부모님을 생각해서 너무 위험한 일은 하지 말아주라. 응?”

“…….”

“아니면 날 믿고 일을 좀 나눠주든가.”

커다란 손이 내 머리를 북북 문질렀다. 어쩐지 기분이 이상해져서 난 손을 툭 치워냈다.

퉁명스러운 척했지만 나를 얼마나 염려하는지는 충분히 느껴졌다.

위험한 일을 하지 말아 달라는 부탁은 지켜줄 수 없지만, 그래도 앞으로는 이야기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하고 싶어서 위험한 일을 하는 건 아니니까.

“주치의 쪽은 나도 한번 알아볼게. 공개 수사는 원치 않는 거지?”

“응.”

“좋아, 그럼 알아보고 다시 말해줄게.”

좋아, 황실 기사인 파올로가 나서면 알아낼 수 있는 것이 많을 터였다.

파올로가 알아낼 수 없는 건…… 저기 계신 대마법사님의 도움을 받으면 되지 않을까?

‘내가 몰랐던 나에 대한 비밀 같은 것도 같이 알아내면 뭔가 알 수 있지 않을까.’

저 사람은 요정의 창도 알아봤으니 말이다.

“그래, 그럼……. 음, 나는 이만 나가봐야 하는 거냐?”

“응?”

파올로가 뒷목을 긁적였다. 몹시도 머쓱한 표정이었다.

“뭐야, 나가면 나가는 거고 있는 거면 있는 거지. 표정이 왜 그래, 오빠?”

“아니, 뭐…… 그 뭐냐, 연인들의 시간을 방해하는 거 아냐? 내가.”

“아니라니까? 그냥 함께 해야 할 일이 있어서 같이 하는 거고…….”

“그래? 뭐, 흐음, 그래. 여기선 그렇다고 믿어줘야지.”

어째 요즘 내가 영 신뢰를 받지 못하는 느낌인데.

파올로를 아니꼬운 눈으로 봤더니, 파올로에게서 ‘거울이나 보고 그런 소릴 해라.’ 하는 말을 들었다. 내 얼굴이 어쨌다는 건지.

“……그, 야. 그게.”

“음? 왜 그래? 할 말이 있는 얼굴인데. 그냥 편하게 말해.”

파올로는 뭔가 할 말이 있는지 한참을 끙끙댔지만 끝내 말하지 못하고 고개를 저었다.

발데르를 열심히 쳐다본 걸 봐서는 발데르와 관련한 말인 것 같은데…….

“난 나가볼게. 너도 푹 쉬어라.”

“응.”

이미 부모님은 1시간 전에 본 상황이었다. 나를 얼싸안고 거의 울다시피 하셨지. 역시 그런 분들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은 건 잘한 일인 것 같다.

“그리고 리제, 아니 트리샤 양도 네 걱정 많이 했어. 꼭 연락하고.”

“뭐야, 그냥 이름 불러. 왜 아닌 척해? 오빠야말로 연애하면서 아닌 척 하기는.”

“뭐? 아니, 아니. 나는 트리샤 양과…….”

“그래그래. 어서 가봐.”

파올로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대체가, 저런 토마토 같은 얼굴을 하고서 뭘 숨기겠다는 건지.

조만간 후작가나 우리 저택에서 결혼식이 열리려나? 아니면 수도의 신전에서 하려나?

대신전은 첫 번째 메인 퀘스트에서 대신관 및 고위 신관이 그렇게 된 후로 황실 소유가 됐다. 그래서 거기가 요즘 결혼식장으로 아주 핫하게 쓰인다고 하던데.

‘여기선 국수 먹는단 관용어를 어떻게 표현하더라…….’

그렇게 파올로가 막 문을 열었을 때였다.

“아, 아가씨!”

열린 문틈으로 빼꼼 튀어나온 사람은 다름 아닌 베키였다.

뛰어왔는지 조금 숨이 차 보였는데, 날 보자마자 어쩔 줄 몰라하며 말을 꺼냈다.

“그, 손님이 오셨어요…….”

“손님?”

나는 창문을 바라봤다. 초저녁이었다.

손님이라니, 이 시간에?

“리제 아니야?”

“……트, 트리샤 영애?”

혹시 리제인가? 이 시간에 찾아올 손님이라고는 한 사람밖에 없었다.

리제는 평소에도 시간을 가리지 않고서 찾아오곤 했으니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그렇지 않아도 나도 보고 싶었는데, 잘됐다.

그러나 베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어서 발데르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 영애는 아닌 것 같군요.”

“아, 아가씨. 2황자님께서 찾아오셨어요……!”

발데르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베키가 뱉은 사람은 의외의 인물이었다. 라이칸이 이 시간에?

나는 베키의 얼굴 한번, 창문을 한번 보았다.

“음, 들어오시라고 해줘.”

황족의 방문이라니, 밑에 세워두는 것만으로도 불경이다. 거기다가 그의 방문을 거절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발데르, 부탁이 하나 있는데 괜찮을까요?”

“네. 뭔가요?”

“잠시만 자리를 비워주세요.”

왜인지 발데르가 라이칸이고 휴고고 병문안을 거절했다고 했으니. 만났다간 분위기가 별로 좋지 않을 것 같았다.

일단은 나를 걱정해준 사람이었다. 아마 지금도 많이 걱정하고 있을 테니 차분히 이야기를 나눌뿐더러 그에게 해야 할 말도 있었다.

‘발데르가 순순히 들어줄진 모르겠지만…….’

말을 하며 나도 모르게 발데르의 눈치를 보았다.

어쨌거나 이 사람에겐 많은 신세를 졌으니까.

“알겠습니다. 자리만 비워주면 되죠?”

“……대화는 들으시려고요?”

“그럴 생각은 없는데, 혹시 들어야 하나요?”

“아뇨, 아뇨. 그런 건 아니고요.”

자리만 비워준다고 말하니까, 왠지 마법으로 귀는 여기에 열어두고 그럴 것 같잖아요.

내가 너무 깊게 생각한 것 같아 어색하게 웃으며 사과했다.

“사과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발데르가 빙긋 웃었다.

그러나 어쩐지 그의 눈은 웃지 않는다고 느낀 순간. 눈앞으로 푸르른 창이 떠올랐다.

[이런, 빙의자님 요정은 분명 조언했습니다. ‘남자주인공’의 집착을 조심하세요!]

이모티콘도 없이 조금 다급해 보이는 창이었다. 화르륵 빠르게 나타났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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