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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207화 (207/281)

◈207화. 3. 대마법사와 악녀 메이커 (46)

“…….”

나는 입술을 축였다.

어째서일까, 라이칸도 그러했지만 나는 나를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사람에게 약한 것이 틀림없다.

이제는 선명히 보였다.

내가 싫어할까 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많이 울었다는 대공님의 눈 밑은 왜 더 빨리 알아보지 못했을까 싶을 정도로 굉장히 발갛다는 걸.

“음……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신 건지 모르겠지만, 전 대공님이 우는 걸 싫어하지 않아요. 싫어한 적도 없고요.”

“…….”

그러자, 물기 어린 붉은 눈으로 오묘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휴고의 얼굴 위로 뜻을 알 수 없는 표정이 스치며 그 시선이 한참을 나를 향했다.

참으로 희한했다.

‘내가, 이 남자들을 그렇게 몰랐던 건가?’

언제나처럼 까칠한 듯 날카로운 얼굴로 그저 평온하게 말할 것 같던 라이칸은 내가 처음 보는 얼굴로 굉장히 서럽게 울다가, 끝내는 잊을 수 없는 미소를 선사하고선 돌아갔고.

서럽게 울 것만 같던 휴고는 북부 대공이란 이름에 걸맞을 듯한 모습으로 나타나, 끝끝내 울지 않고서 깊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모든 모습이 생소하게만 느껴졌다.

‘사랑이 사람을 변하게 만든다는 말을 들어본 적 있지만 이렇게나 몸소 느끼게 될 줄은 몰랐어.’

휴고와의 대화는 막바지에 다다랐다. 아니, 나는 막바지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저는…….”

“달린.”

휴고가 쇼파 뒤로 손을 짚고 상체를 기울였다.

나는 놀라지 않았다. 이미 북부 영지에서 그가 이렇게 다가오는 것이 익숙했을 뿐만 아니라 최근엔 발데르가 자주 했던 행동이었기에 낯설게 느껴질 시간이 없었달지.

“당신의 발밑에 엎드려 당신을 감히 위험에 빠트린 것에 대한 용서를 빌고 싶었어요. 엎드려 구할 수만 있었다면 평생을 그렇게 있어도 좋았을 정도로…… 당신이 좋습니다.”

“……대공님, 저는.”

“하지만 나는 당신의 앞에 엎드려 다시 한번 마음을 고백하기 위해 이 자리에 온 것은 아닙니다.”

가까워지는 거리에 따라 얼굴로 휴고의 그림자가 졌다.

나는 문득 내가 옆으로 자리를 옮기겠답시고 옮겼지만 그리 멀리 앉진 않았구나 깨달았다.

아니, 이 남자의 덩치가 커다래서 그렇게 느껴지는 걸지도 몰랐다.

“죽으려 했습니까?”

눈물을 매단 채 나를 내려다보는 남자의 눈은 내가 아는 시선이면서도 생소함을 자아냈다.

“삶을 포기하고 싶었던 겁니까?”

놀라운 질문은 아니었다.

이미 발데르가 몇 번이고 물었던 질문이었기에. 나는 아무런 놀란 기색 없이 조금 평온하게 대답했다.

“아니요. 왜 그런 오해를, 아니, 혹시 대마법사님께 뭔갈 들으셨다면 오해를 할 수 있는 정황이긴 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대공님.”

“그렇군요.”

어라, 왜인지 순순히 대답한다? 거기다 별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기색이었다.

도리어 의아하긴 했지만 믿어준다면 다행이긴 하지.

“달린, 믿겠습니다. 아니, 믿어요. 그러니 지금부터 할 질문에 진심을 다해 대답해줄 수 있겠습니까?”

“네? 어, 네… 그, 그럴게요.”

휴고가 의심 없이 끄덕였기에 다음 순간 이어진 그의 요청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어렵진 않은 일이었다.

‘휴고에게도 이미 내가 계시 같은 걸 받았다고 고백했으니까.’

휴고가 발데르나 라이칸처럼 의심을 제기해도 순순히 끄덕여줄 생각이었다.

라이칸처럼 다시 한 번 억지로 요정이란 놈의 농간에 선택당한 것에 대한 내가 줄 수 있는 보상이었다.

다른 얘기지만 눈 앞의 남자가 침울한 기색으로 진지한 눈을 하니, 나도 덩달아 진지해지는 기분이었다.

“달린 당신은, 이 몸이 아픈 동안에 삶을 포기하고 싶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까?”

“어…….”

순간이지만 말문이 막혔다.

음, 처음 눈 떴을 때라거나 검에 맞았을 때라거나.

겁나 아팠을 때 아주 잠깐은 이대로 콱 뒤져버려도 좋겠다, 생각한 적은 있는데…….

이거도 해당되는 건가?

이처럼 잠시 헷갈렸기 때문이었다.

나도 사람인데 그럼 모든 순간 마냥 좋았겠나.

‘어찌 되든 간에 살아남고 싶으니까 이 악물고 버틴 거지.’

그러나 되새겨볼수록 묘한 기분이긴 했다.

생각해 보니 내가 어떻게 견뎠나 싶기는 하네.

그러나 대답 시간을 놓친 순간에 휴고의 표정은 시시각각 하얗게 질려갔다.

“……대답이 없으신 걸 보니 긍정하신 거군요.”

“엄, 굳이 선택하자면 없진 않아서요……. 근데 그건 보통 사람도 그럴 것 같아요. 힘들면 콱 죽고 싶단 생각하기도 하잖아요?”

“보통 사람은 달린 당신과 같은 일을 겪지 않으니 상황 또한 다르지 않을까요?”

“아…….”

일리가 있어.

나처럼 개복치 몸에 태어나 숨 쉬는 것만으로도 죽을 수 있겠구나 하는 심정을 겪어본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달린, 당신을 그렇게 만든 사람을 죽여줄까요?”

……그렇게 무구한 얼굴을 하고서 물을 질문은 아닌 것 같은데.

어느새 눈물이 맺힌 눈으로 진지하게 중얼거리는 휴고의 눈으로 어둡게 느껴지는 무언가 스쳐 지나간 것 같았다.

‘무엇보다 나를 이렇게 만든 건 사람이 아닌데. 요정 그놈을 죽여주겠다고?’

확실히 혹하는 제안이긴 한데…….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그자를 죽이면 당신은 나를 미워할까요?”

“저를 이렇게 만든 사람은 없어요, 대공님.”

“알아요. 당신이 움직이게 만든 계시를 한 존재를 말한 거니까요.”

“…….”

나는 잊었던 숨을 삼켰다.

“달린, 당신이 쓰러지던 순간에 찰나지만 당신이 죽는 줄로만 알고……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

나는 휴고의 입술을 막았다.

안돼, 안돼. 이 이상 들었다간 감당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하지 마세요, 대공님. 저 그거 감당 못 해요. 보답받지 못하실 거고요.”

“……달린.”

휴고가 내 손을 잡고 다정하게 들어 올렸다. 단정하게 올라가 있던 머리가 스르륵 풀어져 흘러내렸다.

검은 머리카락 사이에서 깊은 붉은 눈이 보였다.

“어제, 당신의 걱정으로 눈물을 쏟으며 밤을 지새우던 시간에 생각했습니다. 당신이 정말 죽고 싶었던 거라면, 삶에 미련을 가지게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저는.”

“죽으려 한 게 아니라는 말을 믿지만, 동시에 당신은 사람에도, 물건에도, 감정에도, 이 모든 것에 미련이 없지요.”

“…….”

“아니, 아마도 당신의 어린 친구인 황녀님을 제외한다면.”

어쩐지 심장에 화살이 꿰인 것만 같았다.

처음으로 누군가 나조차도 생각하지 못했던 아주 깊은 마음, 무의식 속에 들어와 불을 비춘 기분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굳이 알고 싶지 않았던 것을 억지로 마주하게 된 기분이기도 했다.

어째서 휴고가 거기까지 꿰뚫어 볼 수 있게 된 것인지 알 순 없었지만.

휴고는 평소와 같은 눈 그대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천천히 내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달린, 나는 당신이 죽고 싶었던 거라면, 삶을 포기하고 싶다면 나 때문에 살게 만들어 주고 싶었습니다.”

“…….”

“내가 싫어서라도 살게끔 당신이 나를 증오하게 만들 일을 저지르면 어떨까. 나는 전쟁과 피와 살육과 사냥에 익숙하니. 그 능력을 발휘하면 내가 미워서라도 오래 살까? 하고서.”

휴고가 슬픈 미소를 지었다.

눈물이 일렁거리는 눈이 점차 깊어지더니, 이윽고 묘한 미소가 곁들여졌다.

“비뚤어진 마음이죠.”

“…….”

“사랑하다 못해 비뚤어진 마음은, 차라리 당신의 증오를 받아서라도 시선을 받고 싶은 충동이 들게 해요.”

[잘 하고 계세요, 빙의자님! 애정을 나눠주셨습니다!]

[서브남 ‘휴고’의 애정도가 대폭 오릅니다. (*⌒∇⌒*)]

……아니,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하지만 내가 정말 죽으려 했던 거라면 차라리 자신을 미워하게 만드는 한이 있더라도 살게 하겠다는 말은, 예고했던 대로 감당하기 어려운 마음이 담겨 있었다.

마음이 숨 막히도록 무겁게 느껴졌다.

“……죽으려 한 게 아니니까, 그런 생각하지 마세요. 미련이 없는 것도 아니에요. 저 미련 많아요, 엄청 많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나는 휴고의 손에서 손을 떼어냈다. 휴고는 손을 순순히 놓아주었다.

난 그 손 그대로 옷자락을 꾹 부여잡았다.

생각지도 못하게 푹 찔린 정곡에 정신이 없었고 혼란스러웠다.

‘내가 래빗에게 말고는 아무것도 미련이 없다니 그게 무슨…….’

그럴 리가 없지.

“그리고 대공님, 스스로를 나쁘게 말하지 마세요. 제가 비록 그 마음을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사랑하는 게 나쁜 게 아니란 것쯤은 알아요. 그 마음이 너무 무거워서 받지 못해 죄송하지만, 잘못되었다고도 느끼지 않고요.”

나는 작게 웃었다.

“오히려 저도 살면서 그런 사랑을 꼭 한번은 느껴보고 싶네요.”

그때가 되면 나는 당신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을까?

어쩐지 차라리 우리가 만나지 않는 게 이 사람에겐 더 나았던 걸까 생각하다가도, 매번 광증에 시달렸던 모습을 생각하면 그런 말은 차마 나오지 않았다.

내 간곡한 거절은 끝끝내 그렁그렁한 눈을 결국 울리고 말았나 보다.

하얀 뺨으로 눈물이 가로질러 흘러내렸다.

휴고는 고요하게 눈물을 흘리더니, 그 얼굴 그대로 내 손을 다시 잡고 손 끝에 입을 맞췄다.

그 행동 하나가 많은 것을 말해주었다.

[남자를 울리는 것이야말로 훌륭한 악녀의 자질이죠! ٩(•̤̀ᵕ•̤́๑)૭✧]

그가, 나를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 * *

“영애, 울렸어요?”

휴고가 돌아간 뒤, 이제야 쉬는가 싶었더니 나는 갑자기 찾아온 다음 손님을 받아야 했다.

아니, 꼼짝없이 받을 수밖에 없었다.

다름 아닌 아주 주요한 인물인 공녀 언니였으니까.

그리고 그 언니가 내 응접실에 앉은 지 단 1분 만에 난 그녀를 여기 들여보낸 걸 후회했다.

“대공님이 아주 그냥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나가시던데. 멋져요, 영애. 아주 훌륭하게 울렸군요?”

“……아니, 언제 보셨어요?”

“들어오는데 바로 보이던걸요? 아, 여기 하녀와 시종들은 입 무겁나요?”

공녀 언니가 예쁜 두 눈을 깜빡이면서 곧 재밌다는 듯 표독스러운 얼굴 가득 미소를 띄웠다.

조금은 안됐다는 눈을 하면서.

“곧 수도 전역에 당신이 대공님을 대차게 울렸다는 소문이 퍼질지도 모르겠네요. 참, 내가 가르쳤지만…… 아주 훌륭한 자질이에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곧 언니는 내 어깨를 톡톡 두드려 주더니 작게 속삭였다.

“그래서 영애는 누가 좋은 거예요? 개인적으로 난 우는 남자가 좋더라. 대공님 밀어도 되나요?”

“……네?”

“전 2황자님 보다는 대공님이 더 취향이네요. 아 물론 당신이 주인공인 이야기에서 말이에요. 둘이 외적으로 아주 잘 어울린달까?”

……아니, 이 언니는 왜 여기서 주식을 사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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