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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208화 (208/281)

◈208화. 3. 대마법사와 악녀 메이커 (47)

나는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공녀언니를 바라보다가 핫, 하고 정신을 차렸다.

나보다 신분이 높은 사람을 이렇게 보면 안되지, 참. 어느새 이 언니가 익숙해지기라도 했나보다.

‘하기야 거의 매일 같이 붙어 있었으니 말이지…….’

다행스럽게도 언니는 내 표정을 보지 못한 건지, 아니면 보고도 못 본 척해준 것인지 무어라 하지 않았다. 가까이서 보니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 아마 보고도 못 본 척해준 것 같다.

“역시 우는 남자가 여심을 사로잡는 모양이에요.”

대신 이런 말을 하긴 했지만.

“그래서 영애는 어느 쪽이에요?”

“……어느 쪽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아무 쪽도 아니에요.”

“어머나, 아주 훌륭한 자세네요.”

“네?”

공녀 언니가 박수를 짝짝치며, 예쁘게 웃었다.

“그 누구도 내 마음을 잡을 수 없다! 나는 악녀니까?”

“…….”

“좋아요, 원하는 역할에 아주 충실하게 잘 하고 있네요. 훌륭한 제자님이에요.”

그, 전혀 그런 뜻이 아닌데요.

내가 미약하게 항변해 봤지만 공녀 언니는 싱글싱글 웃을 뿐이었다.

그러다 문득 미소를 살짝 지우며 물었다.

“확실히 외양만 보자면…… 난 대공님이 취향이긴 해요. 덩치 큰 사람이 좋거든요.”

“으음, 외람되지만 덩치는 2황자님도 꽤 크신데요……?”

“잘 울고, 말도 잘 듣고.”

“울기는 2황자님도 잘…… 읍.”

아차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공녀 언니의 눈이 반짝였다.

약간 거대한 물고기에게 실수로 미끼를 투척한 어부가 된 기분이라고 할까.

“어머나, 벌써 울렸어요? 이거야 원, 내가 가르칠 게 없는 거 아니에요?”

공녀 언니는 이렇게 말하더니 이내 소리 내어 웃었다.

처음에 아 실수했다, 탄식하며 얼굴을 쓸어내렸는데. 왜일까, 언니의 웃음소리가 듣기 나쁘지 않았다.

왜 그럴까 생각해봤더니 정말 즐겁고 행복하다는 듯 웃고 있는 저 얼굴 때문인가보다.

사실 공녀 언니는 볼수록 자신의 지위에 걸맞은 사람이라고나 할까. 언제나 ‘완벽한 공녀’가 되기 위해 가면을 쓰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진짜 가면을 썼다거나 가식적이라는 말은 아니고, 어딘가 타고나길 고귀하게 태어나 평생을 노력한 사람의 티가 난다고나 할까…….

그러면서도 늘 말을 할 때 무언가 모를 표독스러움이 함께 느껴지곤 했다.

이런 말은 조심스럽지만 정말이지 ‘악녀’라는 이름이 잘 어울리는 분위기라고나 할까.

그러나 지금 내 앞에서 이렇게 웃는 모습은 어쩐지 지금까지 보아온 것과는 조금 다른 느낌을 풍겼다.

“아, 이런. 정말…… 이렇게 웃어본 게 언제인지.”

곧 공녀 언니가 장갑 낀 손으로 눈꼬리를 콕콕 찔렀다. 웃다 못해 눈물이 난 모양이었다.

그렇게 웃긴 일이었나? 내가 살짝 고민하는데, 어느새 나를 바라본 공녀 언니가 턱을 괴더니 씩 미소지었다.

“영애, 아까 말한 이상형 말인데요, 사실 반쯤은 거짓말이에요.”

“네?”

“꼭 덩치가 크지 않아도 상관없고 잘 울지 않아도 돼요. 오히려 부드럽고 산뜻하고 매너가 좋은 사람이 좋아요, 난.”

“…….”

“내가 못됐거든.”

나는 눈을 깜빡이며 무어라 하는 대신 경청했다.

“이 자리쯤 되면 거짓말에 능해야 해요. 그럴 수밖에 없어요. 이 위치는 항상 진실만 말할 수는 없게 만들 거거든요.”

“네, 공녀님.”

“그러니 어쩌면 나랑 가장 비슷한 사람은 지금 내 ‘연인’이신 황태자 전하일 것 같네요. 그래서 서로 싫어하는 거지만, 사실 좀 동족혐오 같기도 하고.”

동족 혐오라기엔 두 분은 같이 모일 때면 환장의 케미를 보여주시던데요. 특히 날 놀릴 때.

나는 약간은 불퉁한 마음을 꿀꺽 삼키며 공녀 언니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런 나지만 놀랍게도 나도 진심 어린 사랑을 한 적 있죠. 참, 사랑은 사고 같은 거더라고요?”

“…….”

“당신도 추수제 날 보았기에 알겠지만. 나는 처절하게 사랑했고, 처절하게 실패했어요. 아니, 그렇다고 생각했죠.”

그러나 다음 순간 나온 말에 나는 장난스러운 생각은 모두 잊고 진지해질 수밖에 없었다.

“난 소꿉친구였던 이사야 후작을 짝사랑했어요. 아주 오래도록, 정말 오랫동안 말이죠.”

이렇게 말하는 공녀 언니의 표정은 놀랍게도 평온한 듯 보였다가 어딘지 모르게 씁쓸해 보이기도 했다.

“그토록 고고하게 자라온 내가, 손수건 하나도 함부로 줍지 못하게 길러진 내가 자존심도 모두 내려놓고 정신없이 빠졌던 사람이었죠. 결말은 좋지 않았지만. 그래서 솔직히 사랑이 좋은 거라고 말하진 못 하겠어요. 영애.”

“…….”

“당신은 그래요…… 내 제자 같은 사람, 아니 제자가 맞죠. 솔직히 내 사랑의 결말은 좋지 못했고 우습게도 나는 그 자식, 아니, 이사야 후작에게 멋대로 짝사랑의 끝을 고했어요. 그것도 두 번이나.”

예쁘고 좋은 것만 보았을 이 언니도 꽤 힘든 사랑을 했나 보다. 하기야 그건 추수제 정원에서 보았을 때도 느끼긴 했지만.

“그래도 나름 아름답게 끝을 맞이했다 생각했는데…… 이건 내 착각이라는 듯 어느 날 이사야 후작이 다시 찾아왔죠. 정확히는 내 아버지가 데려왔어요. 나의 약혼 상대로서.”

“음, 공녀님 저 주제 넘는 말이지만 혹시 그건 공녀님께는…….”

“좋은 일이 아니냐고요?”

공녀 언니가 눈치 빠르게 대답했고, 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짝사랑 상대가 약혼자로 나타났다, 우선 상대의 마음은 둘째치고 반가움도 들진 않았을까?

“뭐, 그렇죠. 한때는 날 사랑하지 않아도 그렇게라도 옆에 두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때도 있었으니까.”

공녀 언니가 장갑 낀 손으로 입술을 툭 두드렸다. 아주 잠시, 언니의 우아한 얼굴로 고민이 스쳤지만 빠르게 사라졌다.

“영애, 난 가짜 연인이 필요했어요. 대외적으로 알릴 만큼 연기를 잘 해줄 상대가. 그리고 나는 여태까지…… 당신에게 진정으로 연인이 필요한 이유를 알려주지 않았죠.”

“네?”

뭐야, 짝사랑 상대에게 보란 듯이 보여주려고…… 필요한 게 아니었어?

나도 모르게 고개를 기울이자, 이를 알아차린 듯 공녀 언니가 빠르게 입을 열었다.

“영애의 생각대로 언젠가부터 나를 거절하던 과거를 까맣게 잊기라도 하듯 내 주변을 맴도는 그 자식, 이사야 후작에게 보이기 위해 가짜 연인이 필요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진정한 이유는 따로, 아니 하나 더 있었죠.”

공녀 언니가 자신의 턱을 짚더니 일순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이상하죠…… 지금 말한 것처럼 이사야 후작은 어느 날 갑자기 내 주변에 나타나 호감을 표했어요. 나는 그 사람이 나를 매몰차게 거절했던 일을 기억하고 있으니 장난치는 건가 싶었죠. 무엇보다 그 얼굴은…… 나를 사랑하는 얼굴이 아니었어.”

“…….”

“더 이상한 건, 그 전에 나는 헤벤 공작가의 후계자예요. 알고 있나요?”

“네? 네……. 어, 공작 가의 유일한 후손이란 건 잘 알고 있었어요.”

헤벤 공작 가에는 이 언니 말고는 다른 자식이 없다.

요정이 이전에 말하길 만약 세 번째 이야기에서 ‘주인공’이 죽으면 이 언니가 가장 유력한 ‘악녀’ 후보라고 했다.

“유일한 자식이고 적녀라 해서 반드시 후계자 자리를 손에 넣을 수 있는 건 아니에요. 아버지에겐 방계 자식을 입양해 작위를 물려주는 수단도 있었으니까. 아니면 내 남편에게 작위를 물려줄 수도 있겠죠. 어느 쪽이든 거지 같, 아니, 두고 볼 생각은 없지만.”

가늘게 떠오른 표독스러운 미소에 나는 숨만 꼴깍 삼켰다. 와, 언니 눈으로 빔을 쏠 수 있을 것 같아요, 너무 멋져요.

“중요한 건 내가 내 힘으로 후계자의 자리를 쟁취했다는 사실이고, 이건 그 어떤 일이 일어나도 변함없을 절대적인 사실이었어요. 난 확정된 후계자였으니까.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이사야 후작을 약혼자로 데려온 날, 그러더군요.”

언니의 눈이 깊어지며, 기억 어딘가를 헤매는 것 같았다. 동시에 그녀의 가느다란 손이 꾸욱 주먹을 쥐었다.

“이사야 후작과 혼인을 하라고, 작위는 그에게 물려줄 것이고 그와 결혼하지 않으면 작위조차 물려주지 않겠다고.”

“……네?”

생각지 못한 이야기에 나는 입을 살짝 벌렸다. 이 언니의 후계자 쟁취기를 흥미롭게 듣고 있던지라 더더욱.

‘공작가 후계 자리가 이렇게 쉽게 바뀌는 거야? 아닌 것 같은데…….’

아무것도 모르는 타인인 내가 들어도 이상했다. 거기다 언니가 노력해서 쟁취한 자리라면 후계자가 되는 데에도 여러 가지 자격이 필요하다는 소리 아닌가?

“노력해서 얻으신 거라면…… 공작님께도 보시는 기준이 있었던 것 같은데…….”

“맞아요, 아주 힘든 시험들을 거쳤죠? 거기서 사람도 몇 죽었지만 그건 둘째치고.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결정에 가신들도 혼란스러워 했어요. 당연하죠, 내가 그 사람들을 포섭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고 마침내 그들이 나를 인정했으니까요.”

언니의 말에 따르면 갑작스러운 공작의 결정에 가신들은 이상하게 여겼지만 공작의 위세에 아무도 말을 하지 못했다.

“……이상하게도 그 후로 부친께선 나를 만나주지 않아요.”

“네?”

어느새 깊어진 공녀 언니의 눈이 나를 향했다.

“아버지가 모든 말씀을 이사야 후작을 통해서만 전해요. 그게 이상하단 거예요.”

그래서 자신은 우선은 혼인을 막기 위해 만나온 연인이 있는 척 하는 것이 첫 번째였다고.

언니가 차분하게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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