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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211화 (211/281)

◈211화. 3. 대마법사와 악녀 메이커 (50)

‘단 한 번도 내가 이 세계에 있어 진정 다행이다 생각하지 않았는데…….’

첫 번째 이야기에서 분명 래빗을 돕게 되어서 기뻤지만, 내가 없었더라도 래빗은 평생 홀로 고독할 수는 있어도 그 애에게 손 댈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강한 힘과 강한 영혼을 가졌기에 오히려 고독할 뿐 생존엔 지장 없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 무색하게.

내가 없었다면 언젠가 세계의 오류가 래빗에게도 손을 뻗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 애가 평생 자아를 잃고 죽은 것처럼 살 뻔했었다니.’

래빗만큼은 내가 이 세계에 없었어도 사는 덴 문제가 없었을 거라 생각했는데…….

두 번째 이야기 주인공인 휴고는 폭주라는 위험을 안고 있었다.

자기 자신의 파멸은 물론 주변까지 멸망하게 만드는 힘은 너무나도 위험했다.

두 번째 이야기가 좀 힘겹게 느껴질 때가 있긴 했지만 그래도 한편으로는 첫 번째 이야기에서 만난 래빗에겐 이런 위험 요소가 없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는데…….

“달린.”

나는 흠칫 어깨를 떨며 시선을 들었다.

정신 차리고 보니, 발데르의 얼굴이 조금 전보다 가까웠다.

그의 얼굴로 염려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아픈 건가요?”

“……아니요.”

“무엇이 당신을 불편하게 했죠? 뭐든 지워드릴게요.”

“아뇨, 아뇨……. 그냥, 이야기가 조금 충격적이어서요.”

발데르는 어떻게 해석한 건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하기야 발데르 이야기 자체로도 충격을 받기엔 충분했다.

내 입장에선 내 아버지가 인간 실험까지 자행했던 의사에게 딸의 건강을 의뢰하고 전적으로 맡긴 셈이었으니까.

그것도 아주 오랜 기간 동안.

‘내가 충격 받은 건 그 뒤에 숨겨진 진실 때문이지만…….’

요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참으로 이상하지.

정말, 정말로 이해하기 싫고 어떤 일이 있어도 이 XX들을 이해할 날이 오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내게 있어 이놈들은 어느 날 낯선 세계에서 약한 몸이란 굴레를 뒤집어 쓰고 눈을 뜬 나에게 강제로 미션을 준 나쁜 새끼들이었으니까.

그런데 처음으로 놈들이 내게 강제로 래빗을 돕게 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요정이 옳았다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니다.

그건 내가 죽더라도 인정 못 할 사실이지만…….

래빗과 휴고는 내가 없다면 결국 자아가 소멸되거나 죽었다.

‘두 번째 메인 퀘스트에서 설명되었던 베드 엔딩.’

이것도 그냥 나온 말은 아니었을 거다.

어쩌면 휴고를 그대로 두었다면 언젠가 그의 최종 폭주가 몰고 올 결말이었을지도 모르지.

이미 내가 진행하고 있는 세 번째 이야기는 주인공의 죽음이라는 강제 결말을 맞이하지 않았던가.

“그냥, 사실 정해진 운명 같은 거 전혀 믿지도 않고, 그런 건 내겐 없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흐릿하게 웃었다. 왜일까 이유 없이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악연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지나고 보니 고마운 일을 만들어줬는데, 생각해보면 참 나쁜 놈들이고, 좋아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요정 저놈이 나를 이끌어 래빗을 만나게 해주었다.

래빗을 구원하게 해주었다.

돌이켜보면 내가 죽을 만큼 힘들게 뛰어 다니게 만든 것은 요정이었다.

닭이 먼저인가, 알이 먼저인가.

나는 숨을 푹 내쉬었다.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나를 이 세계로 데려온 것이 누구인가, 까지 가야 할 것 같은데.’

허공을 흘끗 보았다.

이것도, 너냐?

나는 속으로 물음을 삼켰다.

대답을 듣지 않아도 왜일까 알 것 같기도 했다.

“달린, 대마법사는 보통 법칙을 거스르는 자로 불리기도 합니다. 당신은 나와 비슷한 점이 많지요. 특히나 이곳이 평범하지 않다는 점에서.”

발데르가 자신의 가슴 위 심장이 있을 법한 부근을 툭툭 두드렸다.

자신도 나도 늘 생존을 위해 애쓰는 시한부란 말을 하고 싶은 걸까.

“그러니 정해진 운명이란 건 당신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운명이 되고, 아니라면 그저 우연히 겹친 일이 되겠죠.”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건가요?”

“그렇죠.”

발데르가 입술을 끌어올렸다.

그는 내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놓더니 나지막하게 말했다.

“너무 복잡할 필요는 없잖아요?”

당신은 생각이 많아요, 하고 그가 덧붙였다.

“당신의 고민 중 과반수 이상을 해결해줄 사람이 옆에 있는데, 왜 안 써?”

“…….”

[현재 세 번째 이야기 ‘남자주인공’의 집착 지수는 다음과 같습니다. 90/100]

나는 그의 옆으로 보란 듯이 떠오른 푸르른 창을 빤히 보다가 시선을 그에게로 옮겼다.

그렇지, 사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왜냐.

‘결국 중요한 건 살아남는 거잖아?’

메인 퀘스트를 성공하고, 주어진 미션을 해결하고 보상을 받는다.

내가 아무리 고민해봐야 할 일은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생각이 아예 없는 로봇처럼 행동하고 싶진 않아.’

생존을 위해 퀘스트 해결에만 집중한다?

그럼 요정 저 망할 놈의 노예가 되는 것과 다를 게 뭔가.

그러니까…….

이것부터 의문을 해결해볼까.

“발데르.”

“네, 달린.”

“당신은 나를 좋아하나요?”

우리 사이에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발데르는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대답했다.

“당신을 온전히 가지고 싶고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고.”

“…….”

“또 한 번 죽음에 이르는 모습을 볼 바엔 차라리 내 성에 안전하게 두고 싶은 마음은.”

“…….”

“보통 애정이라고 지칭합니다. 죽은 내 친구가 연인에게 그러했듯이……. 네, 그렇네요. 달린.”

발데르가 내 손을 부드러이 잡고 자신의 얼굴로 가져왔다.

그대로 뺨을 가져다 대는 모습이 낮잠을 자고 막 깨어난 고양이처럼 나른하게 보였다.

그가 눈을 감고 속삭였다.

“난 당신을 좋아해.”

긴 속눈썹이 햇볕을 받아 희게 빛났다.

나는 입술을 축였다.

두근두근. 마치 이 순간을 반기는 듯 더욱 거세게 뛰는 심장을 가라앉히면서.

“……고마워요. 그런데, 한 가지만 더 물어봐도 되나요?”

“얼마든지요.”

“그건 정말로 애정인가요? 집착이 아니라?”

발데르가 그대로 시선을 들었다.

웃음기가 조금 사라진 주황빛 눈동자가 나를 빤히 보았다.

“나는 애정과 집착을 구분할 수 없습니다. 무엇이 애정이고 무엇이 집착인가요?”

“…….”

“나는 감정이 결여된 사람이라, 잘 몰라요. 처음엔 가지고 싶었던 감정이 이렇게 차차 포근해지는 이 순간을 무어라 부르는지 모르겠거든요.”

나는 입술을 달싹였다.

그건 사랑이 아닐까요? 어쩐지 이 말은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왜요, 미지의 존재가 내가 당신에게 집착한다 알려주던가요?”

아주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이건 발데르에게 충분한 대답이 된 것 같았다.

“……재단 당하는 것이 결코 유쾌하지는 않지만, 뭐. 좋아요. 그 미지의 존재 말고 당신의 생각은 어떤가요?”

“잘 모르겠어요. 그래서 물어본걸요?”

“그럼 판단은 당신에게 맡길게요. 당신은 집착이 싫은가요?”

나는 그를 보았다가 천천히 날숨을 내뱉었다.

아니, 이건 한숨이었다.

“네. 솔직하게 말하자면 집착은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그럼 집착이 아닐 겁니다.”

“…….”

“당신이 싫어하는 행동은 하고 싶지 않거든. 강제할 생각도 없으니까.”

[현재 세 번째 이야기 ‘남자주인공’의 집착 지수는 다음과 같습니다. 95/100]

상반된 말과 메시지가 각자의 주장을 담고 내 귀와 눈을 덮었다.

나는 과연 무엇을 믿고 판단해야 할까.

발데르가 나른하게 눈을 뜨며, 눈을 살살 휘었다.

“당신이 이름 붙여준다면 맹약처럼 따를게.”

“…….”

“그 이름 붙여준 감정이 영원토록 이 심장에 남을 테니까.”

……와, 이건 정말 내 심장이 억지로 뛰지 않더라도 한번은 흠칫했을 것 같은 대단한 유혹이었다.

나는 숨을 삼키며 내 손을 살그머니 빼냈다.

무엇을 믿고 판단하느냐, 기준은 당연히 나.

내가 생각하고 믿는 바를 따를 거다.

“발데르, 당신이 말한 미지의 존재는 당신이 위험한 인물이라고 경고했지만.”

흘끗 요정의 창을 보았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어요.”

“…….”

“그러니 솔직하게 말할게요. 나는 꼭 해야 할 일이 있고, 그 일은 당신과 반드시 연인 행세를 해야만 가능한 일이었어요.”

두 번째 이야기 내내 마음이 불편했던 점.

나는 꼭두각시는 되고 싶지 않다.

이야기가 끝나면 마치 모두 거짓이었다는 양 헤어지는 게 싫다.

“나는 굳이 당신과 억지로 가짜 연인이 되지 않고도 결말을 맞이하고 싶어요.”

“…….”

발데르가 나를 물끄러미 보았다.

[현재 세 번째 이야기 ‘남자주인공’의 집착 지수는…… 치지직- 다음과…… 치직! 같습……]

발데르의 손이 요정의 창을 지워내 버렸다.

그렇기에 나는 떠오르려던 내용도 숫자도 볼 수 없었다.

“당신이 원한다면 그렇게 해줄게.”

번개가 튀며 사라지는 동시에 발데르가 빙긋 웃었다.

“난 당신을 위해 세상을 바꿔줄 수도 있어.”

왜일까, 그 모습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잘됐다고 생각했다.

그가 허락했으니 이용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마치 진짜 악녀라도 된 것 같은 생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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