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3. 대마법사와 악녀 메이커 (51)
* * *
시간이 흘러 공녀 언니가 말했던 계승식이 다가왔다.
그 사이에 뚜렷한 사건은 없었지만, 나는 발데르의 도움을 받아 세계의 오류가 이전에 가진 신분으로 추측되는 ‘대신관’이라는 자를 추적했다.
발데르는 내가 원한다면 연인 행세를 하지 않고도 결말을 보고 싶다는 내 말을 들어주겠다고 한 뒤로 정말로 담백하게 행동했다.
물론 완전히 달라진 건 아니고, 이따금 씩 전과 다를 것 없는 행동을 하기도 했지만 확실이 이전과 비교하면 달라진 것이 눈에 보였다.
그런가 하면 현재 추적 중인 ‘대신관’의 행적을 쫓는 데는 때로 휴고나 라이칸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내가 주도한 건 아니고 그들이 내 저택을 방문했고, 무어라 도우려 애쓴 결과였다.
사실 방문을 받지 않고 문 앞에 세워두는 게 더욱 눈에 띄다 보니…….
들여서 이야기를 나누기는 했지만.
덕분에 의도치 않게 악명 수치가 대폭 올라서는.
[축하합니다! 훌륭한 악녀가 되기까지 단 한걸음! 99/100]
이렇게나 달성하고 말았다.
내게 나쁜 일은 아닌데 말이지…….
‘악명도가 높아지는 것에 따라 내 심리 상태도 막 바뀌고 그러는 걸까?’
세계의 오류에 대해서 조사도 하고, 우리 공녀 언니 가짜 연애도 열심히 돕고 나름대로 바빴지만, 그 와중에도 머리를 떠나지 않는 생각이 있었다.
“녜가 됴금씩 이상해지눈 고 같댜고?”
“네.”
시간이 지날수록, 정확히는 악명도가 쌓일수록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고 할까.
“막, 그, 어 진짜 듣고 웃으시면 안 돼요?”
“그로게따.”
결국엔 내 모든 비밀을 알고 있는 어린 친구 래빗에게 털어놓고 말았다.
“막 제가 요즘…… 나 좀 이용해달라는 남자들의 그, 엄, 구애를 받고 있거든요?”
“인기가 많운 고야 알고 있어찌. 그런데?”
“그…… 진짜, 이상하게, 전과는 다르게, 아니 전에는 부담스럽고 안 그랬으면 좋겠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요즘은…… 이용해도 될 것 같고, 이용해도 뭐 어때? 하는 생각을 했다가 화들짝 놀란다니까요.”
“…….”
“아니 무슨 제가 희대의 팜므파탈이라도 된 것처럼 퍼진 소문도 어처구니없는데, 여기에 제 생각까지 막, 그래도 될 것 같은…… 아! 안 웃으신다면서요!”
나는 품속에 안긴 아기 황녀님의 몸이 부들부들 떨고 있음을 깨닫고 말을 멈췄다.
아니나 다를까 래빗은 웃음을 참느라 바쁘다가 이내 맑은 웃음 소리를 터트렸다.
분명 듣기 좋은 아이의 웃음 소리였지만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아니, 이야기가 웃낀곤 아니고, 그, 달린 네 표죵이 너무 심각해소 웃겨따.”
“아니, 저는 심각한 거 맞거든요?”
이미 감정이 통제되지 않은 감각을 충분히 느낀 참이다.
여기서 사람까지 변하는 느낌이 드는 게 얼마나 무서운지 알긴 아시나. 허 참.
“그래서 네가 말한 문제로 드로가 보쟈고. 일단 그로묜 안 되눈 고냐?”
“네?”
“네가 요줌 헤벤 공녀에게 이것저것 배운댜는 말운 직접 해줘소 알고 있댜. 악뇨가 되눈고.”
그렇지, 그건 래빗에게 털어놨었지.
“어차피 이본엔 악뇨가 되어야하눈 고 아니더냐? 그럼 흐름에 몸울 맡기눈 것도 나뿌지 않다고 생각한댜.”
“사람을 이용하는 건데도요?”
“그놈둘이 이용해댤라고 찾아온 고 아니더냐?”
“…….”
래빗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잠시 고민했다.
그러고는 다시 조막만 한 입을 열었다.
“그롬 반대로 말해소, 네가 이용하지 않울 고니까 찾아오지 말랴구 하면 안 찾아올 인물이도냐?”
“…….”
“아니지?”
나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끙, 신음을 흘렸다.
“글쎄, 댤린, 내가 젼생에 수없이 많운 전투 속에서 때로눈 속고 속이구 뒷통수룰 치기도 하묜서 치열하게 살아소 그론지는 모루겠지만…… 냉뎡하게 말해소 사람운 결국 모둔 사람이 서루룰 이용하고 살아갼다.”
“……윽, 정말 냉정한 말인데요.”
“하디만, 그곤 너도 그로치 않우냐? 처움에눈 목적울 가지고 내 앞에 나타냤자나.”
“…….”
다시 한번 할 말이 없어졌다.
내가 입을 열지 못하자, 래빗이 씩 웃으면서 단풍잎 같이 조그만 손으로 나를 토닥였다.
“턋하려눈 것이 아니다. 이 몸이 말하고 싶운 곤, 시쟉이 그렇다고 해소 과졍이, 결과가 그로치는 않울 거라눈 말이다.”
“과정과 결과요?”
“구래. 어차피 지굼 구애하눈 놈둘운 대략이나마 네 사뎡울 아는 게 아니더냐?”
그렇지. 라이칸은 최근에 일부나마 이야기했고, 휴고는 이미 북부에 있을 때 계시에 대한 걸 털어놓았으며, 발데르에겐 솔직하게 다 불기까지 했다.
“구로묜 너도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말구 지켜봐라. 사실 감뎡이란 게 사람 마움대로 되는 곤 아니지 않우냐.”
“그건 그렇죠…….”
“사실 답운 몰리 있는 게 아닐지두 몰라.”
이 말은 무슨 말인지 몰라 눈을 깜빡였다.
“한본 가까워져 바라.”
“그, 구애하는 분들을 얘기하는 거라면 충분히 가까웠던 것 같은데요……?”
“아니, 넌 마움울 열지 않쟈나. 이번 기회에 너두 네 마움울 알아본댜고 생각하고 흐룸에 몸울 타보라눈 고다.”
래빗이 조금 안타깝다는 듯이 내 옷자락을 꾹 쥐었다.
결국 당장은 그것을 따를 수밖에 없는 처지라면 그 안에서 이용할 방법을 찾자고.
그건 내가 지금까지 역경을 해치워온 방식과 비슷했다.
“끙, 감사해요…….”
“네가 변하눈 고 같운 곤 너무 신경쑤지 마로라. 이 몸이 보기에 넌 그대로야.”
“…….”
“그저, 상황에 따룬 너의 위기 의식이 상황에 맞게 대쳐하고 있눈 골로 보인다.”
래빗이 내 옆 쇼파에 발딱 일어서더니 까치발을 들고 손을 뻗었다.
조그만 손이 내 머리를 토닥토닥 두들기더니 이내 쓰다듬었다.
“너눈 잘하고 이쏘.”
“……감사해요.”
“오냐.”
나는 래빗을 꼭 끌어안았다.
래빗은 간지럽다는 듯이 꺄르륵 웃다가 이내 내 머리카락을 슬그머니 잡아당겼다.
“너무 위홈한 짓운 말라눈 소린 안 할 테니 아푸묜 빨리 빨리 이야기해라. 이 몸이 얼마나 놀랐눈 줄 아누냐?”
“아야, 죄송해요.”
“거기다가 네가 제국 제일 가눈 악녀라고 갑자기 소문이 나질 않나. 네 삶도 참, 다채롭꾸나, 심심하진 않게쏘.”
“……반어법이죠?”
덕분에 얼마나 속시끄러운데 말이죠.
더군다나 심심하기는커녕 제발 심심 좀 해봤으면 좋겠다 싶을 만큼 스토커처럼 따라다니는 요정이란 놈도 있는데 말이죠.
“끝우로 네가 변한다고 하도라도, 너눈 내 유일무이한 친구고, 은인이며, 달린이다. 그곤 변하지 않아.”
어쨌거나 내가 변한다는 불안함은 여기 이 아기 황녀님께서 아주 간단히 가라앉혀주었다.
래빗에게서 나는 아기 특유의 포근한 향기를 맡으며 나는 싱긋 웃었다.
“와, 덕분에 저 정말 멋진 제국의 악녀가 될 수 있겠는데요?”
“……허어, 그로게. 내 너와 가장 어울리지 않눈 단오가 있다면 딱 그거일 고라 생각했는데.”
내 농담에 래빗은 웃는 대신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요, 황녀님?
“소문울 둗다 보니 고개가 끄덕여 지도라.”
“그 소문, 과장된 게 많은 거 아시죠? 황녀님까지 믿기 없으시기에요.”
“물론 나눈 내 눈울 믿눈데, 너눈 아주 자질이 있눈 것 같댜. 스승울 잘 둔 곤가?”
“……그런 말 하지 마세요.”
그렇게 래빗과 이야기를 한참 나누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문 사이로 나타난 건 베키였고, 날 향해 고개를 숙이며 준비할 시간임을 알렸다.
“황녀님도 헤벤 공작가 계승식에 가실 거죠?”
“가야지. 내 첫째 오빠놈도 가눈 곳 아니냐?”
“맞아요. 아, 황녀님은 처음 보시겠구나. 공녀님이랑 연인이신건 알고 계시죠? 황태자 전하의 조합이 되게 뭐랄까, 생각지 못하게 잘 어울리세요.”
특히나 날 놀릴 때만큼은 아주 환장의 케미를 자랑하시지. 암.
래빗이 고개를 끄덕이며 ‘구래, 가짜 연인치고눈 연기룰 아주 잘하지.’ 하고 대답했다.
“정말 오빠 놈이 연기에 불과한 곤지는 모르겠지만.”
“허어? 간과할 수 없는 말인데요?”
래빗은 어깨를 으쓱할 뿐 더는 말하지 않았다.
뭐야, 공녀 언니랑 황태자 사이에 뭐가 있어?
혹시 황태자가 래빗에게는 무언갈 얘기했나?
‘둘이 정말 사귀기라도 하면 와, 제국 내에 어마어마한 권력을 가진 커플 아닌가.’
나는 작게 감탄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날 저녁, 나는 치장을 마친 채로 헤벤 공작가로 향하는 마차에 올랐다. 내가 탄 마차에는 래빗도 함께였다.
나와 함께 가고 싶다며 본인도 옷을 갈아입고 오더니 다시 우리 집으로 왔다.
물론 래빗이 혼자 온 건 아니고, 폭군의 걱정과 애정이 가득 느껴지는 어마어마한 호위부대와 함께였다.
래빗은 성가셔하는 표정이 가득했지만, 그렇다고 쫓아내진 않더라.
다각다각, 편안하게 달려가는 마차 안에서 래빗이 막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아, 듣기로눈 오눌 에수코투 하눈 걸로도 싸웠다고 들었눈데.”
에스코트.
래빗의 말에 생각나는 것이 있어 어색하게 웃었다.
“누구한테요?”
“첫째 오빠놈한테.”
아……. 황태자 그놈은 입이 가볍기도 하지.
아니, 래빗 한정해서는 깃털같은 입을 가진 인간이겠지.
그랬다.
‘오늘 에스코트 말이지…….’
격식 있는 자리에 숙녀는 에스코트할 신사를 대동하기도 한다.
의무는 아니지만 대체로 그러하니…… 내게도 그런 신청이 들어왔다.
그 세 남자에게 말이다.
“그래소, 승자눈 누구더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