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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213화 (213/281)

◈213화. 3. 대마법사와 악녀 메이커 (52)

승자라니. 나는 애매한 표정으로 래빗을 보았다.

분명 우리 황녀님이 평범한 아이처럼 자라길 바라던 때가 있었던 것 같은데.

정신 차리고 보니 그건 이미 저 멀리 강 건너 가버렸을뿐더러, 어느새 팝콘이라도 주어지면 신나서 먹을 것 같은 방청객 모드가 된 구 대륙 황제 현 아기 황녀님만 계셨다.

“……잠시만요, 너무 신나 보이시는 거 아니세요?”

“신나다니. 그곤…… 사실이지. 미안하디만 달린, 너무 재밌군.”

“너무 산뜻하게 인정하지 마시구요.”

그러자 래빗이 조그만 양손으로 턱을 괴더니 방긋 밝게 웃었다.

“하디만 달린 네 얘기가 아니었다묜 전혀 관심 없었울 얘기다.”

하 참. 이렇게 말하면 또 반칙이지. 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일단 그 에스코트 신청은 셋 모두에게 받았어요.”

“오호, 그로탄 마리지?”

이미 황태자에게 들으셨다면서 모른 척하시긴. 나는 입을 슬쩍 내밀었다가 동시에 생각에 빠졌다.

‘확실히 곤란하긴 곤란했었지…….’

라이칸, 휴고가 내 저택에서 나를 만나고 간 이후로 우리 저택은 뭐랄까.

한 마디로 더욱 살벌한 공간이 되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2황자와 북부 공작이 찾아오는데 태연할 수가 있겠나. 심지어 마법사의 탑에서만 볼 수 있다던 대마법사는 내 옆에 매번 서 있지.

베키를 포함한 사용인들의 입장에선 재앙도 이런 재앙이 없었을 거다.

셋 다 시종인들 입장에서는 한없이 높은 사람일 뿐 아니라 다들 소문을 달고 있는 사람들이니까.

문제는 라이칸과 휴고가 나를 찾아오는 날에 자연스럽게 나와 마주할 수 있었느냐. 그건 또 아니었단 거다.

‘발데르가 저택 정문에 마법을 걸어두었지…….’

라이칸과 휴고가 매일 방문을 시도하고, 발데르의 마법에 막혀 들어오지 못하는 그들의 모습이 심심찮게 보이곤 했으니까.

나는 래빗에게 이 사실을 설명했다. 특히 라이칸과 휴고가 마법에 가로막혀 들어오지 못하자 어떤 행동을 취했는지 말이다.

“오오, 흥미롭꾸나, 그래소? 그래소 어떻게 되찌? 싸운고냐?!”

“……싸우긴요. 아니, 그보다 싸움 얘기에 눈을 그렇게 빛내시기예요?”

누가 전생에 전쟁 천재 대륙 황제님 아니랄까 봐.

“으음, 일단 라이칸 황자님은 마법에 가로막힌 그대로 찡그리고만 있어서 제가 소식을 듣고 발데르 님을 불러 풀게 했고요…….”

라이칸은 예상외로 자신을 가로막은 마법을 앞두고 가만히 서 있는 등 반응이 온건했다.

발데르를 불러 마법을 풀어준 뒤 그를 만나 왜 가만히 서 있었냐고 물어봤더니.

“대마법사는 마음에 들지 않지만, 혹시나 이 마법이 달린 그대를 위한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매번 손댈 마음이 들지 않더군.”

이런 말을 해서, 내가 그럴 일은 없다고 답변을 주었지만 그럼에도 태도에 변함이 없더라.

그에 비하면 휴고는.

‘시무룩한 얼굴로 마법을 바라보다가 이내 생글 웃으면서 결계를 검으로 갈라버렸다지.’

그래놓곤 나와 만나고서는 안심한 표정을 짓곤 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엔 바로 울상을 지었다.

“……다행이에요. 혹시 그 미친 대마법사가 감금이라도 한 줄 알고…….”

정말 너무너무 걱정했다고 하는데, 거기에 대고 ‘발데르 그 사람이 자꾸 왜 이러는지 저도 모르겠어요, 아니, 아는데 말려도 듣질 않는 것 같아요’ 할 수는 없어서 손수건만 열심히 쥐여 주었다.

“그래서 그럼 대공 쪽운 그 다움부터는 결계룰 아무렇지 않게 베어 버린다눈 고냐?”

“네, 그렇죠.”

“어느 쪽이둔 비봄하긴 한데……. 달린, 너눈 어쩌다가 하나같이 우움, 쉽찌 않운 상대룰 만난 거 같다만운.”

“하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아무튼 간에 이번 헤벤 공작가에 방문하는 일을 두고 나는 셋 모두에게 에스코트 제안을 받았지만…….

결과적으로 셋 모두 거절했다.

래빗 표현을 빌리지만 그 누구도 승자가 되지 못했다고 할 수 있겠다.

“……유혈사태가 일어날 것 같아서 말이죠.”

“뭐…….”

반쯤 농담으로 한 말이었는데, 래빗이 심각한 얼굴로 끄덕여서 나도 덩달아 진지해졌다.

“아니, 저 농담이었어요. 그렇게 진지하게 끄덕이지 마세요. 무섭게.”

“웅? 하지만, 그로치 않겠누냐? 아, 물론 달린 네 앞에서 유혈사태눈 일우키지 않울 것 같다먄. 뒤에서 누구 하나눈 죽오나지 않겠느냐?”

“그게 더 무서워요!”

래빗이 안됐다는 듯 조그만 손으로 내 무릎을 토닥토닥 두들겨 주었다.

“쯧쯔, 이래소야 아주 완뵥한 악뇨가 될 수 있겠느냐?”

“…….”

아니, 한 번도 원한 적 없었거든요.

새삼 웃기고 서러운 마음이 들어 웃지도 울지도 못하고 있는데, 래빗이 돌연 고개를 들었다.

“그론데, 달린. 내 좀 더 지켜보려고 했다만운…… 혹시 너눈 오늘까지 단 한 번도 그둘에게 마음이 끌린 적이 없누냐?”

“네?”

“그냥, 궁굼해소 물어봐따. 나는 네 친구니까. 네 마움이 궁굼하댜.”

래빗의 말에 나는 얼굴을 쓸어내리려다 멈칫한 자세 그대로 눈을 깜빡였다.

내 마음이라…….

사실 사람인지라 그들만큼 뛰어난 미모의 미남들의 공세에 끌린 적이…….

“잘 모르겠어요. 아니, 정말로요.”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만약 끌렸더라도 그걸 내가 제대로 느꼈을지 잘 모르겠고, 확신할 수 없을 뿐더러 지금은 끌렸더라도 그 감정이 진실로 내 마음이 맞을지 잘 모르겠어요.”

담담한 내 대답에 래빗이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가, 이내 표정을 흐렸다.

어째 어린 황녀님께 짓게 만들 표정은 아닌 것 같아 조금 미안해졌다.

‘하지만 그놈의 ‘눈치는 약에 쓰자’ 스킬 때문에 사실 잘 모르겠단 말이지. 지금은 발데르를 향해 심장이 뛰도록 만들어져 있기도 하고.’

난 내 가슴에 손을 슬쩍 올렸다.

‘……일단은 스킬이라도 꺼지면 뭔가 더 명확해질 것 같은데. 그럴 기미는 보이지 않으니.’

래빗은 나를 조금 안타깝게 보면서도 내 말이 무슨 말인지 궁금해하는 기색이었다.

나는 잠시 허공을 보았다가 이내 스킬에 대한 걸 래빗도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해주었다.

“그로니까, 네게는 생죤 눈치가 매우 커지눈 능력이 있다눈 고지? 대신에 네 감뎡에 둔해지눈 거고? 그롬 달린, 만약에 그 능력이란 게 잠시 사라지묜?”

“네?”

“만약 그래소 갑작스럽게 네 진심울 마주하게 된다묜? 너눈 괜찮운 고냐?”

“어…….”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라 잠시 대답하지 못했다.

동시에 오래 전 북부에서 갑작스럽게 ‘눈치는 약에 쓰자’ 스킬이 꺼졌던 때를 떠올렸다.

“……그론 능력이 아니라도 사람운, 때때로 자신의 진심울 모르고 살기도 한댜.”

래빗은 이제는 나를 조금 염려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론데, 달린, 만약에.”

어쩐지, 그 눈은 더는 내 어린 아기 친구가 아닌 전생의 경험 많은 황제로서 무언가를 헤아리고 나를 보는 것만 같았다.

“너의 진심이…… 네 목표와 네가 반두시 행해야 하눈 계시와눈 반대 방향을 가리킨다묜 너눈 어떡할 고냐?”

* * *

헤벤 공작저에 도착했다.

나와 래빗이 마차에 내렸을 즈음엔 저녁이었고 하늘엔 푸른색과 함께 어스름한 어둠이 깔려있었다.

어둑해진 덕분에 공작저 주변을 장식해 둔 마법등이 더욱 눈에 띄었다.

게다가 공작저는 홀로 태양처럼 환한 샹들리에 빛을 발하고 있었으니 절로 감탄을 자아냈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크긴 엄청 크네…….’

어두워지고 보니 더욱 커 보이는 느낌이었다.

물론 저기보다 훨씬 크고 웅장한 곳에 사는 우리 래빗은 별 감흥이 없어 보였지만.

“고귀하신 황녀님을 뵙습니다.”

우리를 반긴 기사가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러더니 나를 향해 말했다.

“함께 계신 분은 황녀님의 유모이신 에스테 영애이십니까? 공녀님께 미리 명 받았습니다.”

“그렇네.”

따로 에스코트할 사람을 데려오지 않았기에 나는 말을 건 공작가 기사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려왔다.

‘파올로라도 함께 오면 좋았을걸.’

그러나 내 오라버니께서는 현재 황실에서 야근 중이었다.

한동안 리제도 못 봤다고 시무룩해하던데, 돌아가면 위로라도 해줘야겠다.

‘분명 조만간 내게 정리해서 말해줄 게 있다고 했지?’

자연스럽게 떠오른 파올로의 얼굴을 지워냈다.

그러자 이번엔 마치 세트메뉴라도 되는 양 리제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째서인지 리제가 우리집에 오질 않는다.

편지를 보내도 답변이 늦고…… 오늘 일이 끝나면 트리샤 후작가에 한번 가보거나 해야겠다.

생각을 차분히 정리하며 부지런히 걷는 동안 회장 앞에 도착했다.

“달린, 오눌운 공녀가 작위를 이어받는 날이라고 해찌?”

“네, 황녀님.”

시종이 우리의 등장을 알리러 간 사이 래빗이 내게 물었고 나는 살짝 끄덕였다.

헤벤 공녀 언니의 작위 계승을 둘러싸고 공작과 공녀 사이에 영문을 알 수 없는 문제가 발생했고, 나는 언니에게 모든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내게 이야기를 한 뒤 공녀 언니는 결단을 내렸던 모양이다.

‘공작 없이도 계승식을 강행한다고 말이지.’

이게 어떻게 가능한지 나는 잘 모른다. 공작 가의 내부 사정을 모두 다 아는 건 아니니까.

그저 대략 전해 들은 사정만으로도 공녀 언니가 리스크를 감수하고 큰 결심을 했다는 것만 알 수 있을 뿐.

오늘 이 자리는 그 언니가 자신만의 싸움을 하는 자리이며, 나도 나만의 싸움을 하는 자리가 될 거다.

다만, 중요한 건 오늘 이 자리에서는 정말 조심해야 할 거란 거다.

‘이곳에…… 세계의 오류가 있으니까.’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

세계의 오류는 세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들을 살해했다.

그리고 앞선 첫 번째와 두 번째 이야기에서도 원작을 방해하는 계략을 일삼았다.

그렇다면 오늘 이 자리에서도 그 누군지 모를 세계의 오류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공작가의 상황을 곱씹어볼수록 오늘 이 ‘작위 계승식’ 자리는 중요한 분기점이 될 거란 생각이 드니까.

“황녀님.”

“웅?”

“혹시 제가 오늘 위험해지면요……. 저보다는 사람들을 도와주세요.”

멀리서 시종이 돌아오는 것이 보였다. 동시에 내 손을 잡고 있던 래빗이 나를 올려다보는 것이 느껴진다.

만에 하나 오늘 이 자리에서 세계의 오류가 뭔가를 저지른다면 무고한 사람들이 휘말릴 수도 있다.

존재를 확신할 수는 없는 위험이지만, 혹시 모르니 강한 힘을 가진 래빗에게도 말해두고 싶었다.

“저는 어떻게든 잘 살아남을 자신 있으니까요.”

“……너눈 온제나 예상치 못한 순간에 이 몸울 놀라게 해. 약속운 못 하게찌만 노력해보게따.”

래빗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뾰로퉁한 표정 사이로 진지한 시선이 스며들었다.

“……로아탸 황제눈, 지킬 것이 너무 많아소 때로 선택해소 버려야 해땨. 가장 아끼눈 기사 대신에 나라룰 선택해야 할 때두 있었찌.”

“…….”

“하디만 지굼 나, 래빗운 지켜야 할 것이 하나뿐이야. 달린, 나눈 네 일울 방해하진 않게찌만 네가 죽눈 곤 실타.”

사람들은 지키겠지만, 내가 정말로 위험해졌을 때 그 순간엔 널 택할 거라는 말. 나는 작게 미소지었다.

“네. 그거면 충분해요. 고마워요. 황녀님.”

생각해보면 내가 참 이곳에서 인복이 좋은 것 같기도 하다.

래빗에서부터 다정한 가족들, 오빠인 파올로와 늘 세심했던 리제.

그리고 나를 사랑해주는 남자들까지.

“그럼 가 볼까요?”

거대한 문이 열렸다.

저기, 문틈 사이로 보이는 거대하고 화려한 연회장에서 오늘 무슨 일이 있을진 모르겠지만.

나는 우리 아기 황녀님과 발을 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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