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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214화 (214/281)

◈214화. 3. 대마법사와 악녀 메이커 (53)

“세상에나, 이 제국의 빛. 고귀하신 황녀님을 뵙습니다.”

곧 나는 공녀 언니와 마주할 수 있었다.

공녀 언니는 래빗을 보자마자 마치 오래 준비한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황족의 진명과 예장용 인사를 읊었다.

“오늘 이 자리의 주인으로서 황녀님께서 참여해 자리를 빛내주어서 다시 없을 영광이옵니다.”

정작 래빗은 조금 심드렁한 표정이었지만.

하기야 두 사람은 내 저택에서도 자주 보았지만 서로에게 그리 큰 관심은 없어 보였다.

아니지, 래빗은 공녀 언니가 내 스승이란 점을 약간은 질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왜 자기한테 검은 배우지 않느냐고 나에게 묻기도 하더라고.

“어서 와요, 에스테 영애.”

공녀 언니의 인사에 반갑게 대답하려다 말고 나는 멈칫했다.

‘우와, 화려하다.’

언니의 어깨에 올려진 화려한 망토에 시선을 빼앗겼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그녀가 제복에 가까운 옷차림을 하고 있어서 조금 놀라기도 했다.

내 시선을 알아차린 듯 공녀 언니가 눈웃음을 지었다.

“후후, 이걸 보는 건가요? 초대 헤벤 공작님께서 둘렀던 것과 같은 망토랍니다.”

대단히 화려하고 길다란 망토는 공녀 언니가 걸친 붉은색 옷차림과 매우 잘 어울렸다.

이 순간 공녀 언니는 강인하게 핀 붉은 장미꽃 같으면서도 동시에 붉은색으로 칠해진 검을 떠올리게 했다.

“아, 죄송해요. 인사가 늦었습니다. 공녀님.”

“아니에요.”

“오늘 복장이 너무너무 잘 어울려요.”

공녀 언니가 잠시 놀란 표정을 했다가 이내 다시 웃었다.

“후후, 역시 영애라면 색다른 감상을 줄줄 알았어요. 그렇지 않아도 방금 막 오늘은 노출이 덜해서 아쉽다는 개소릴 들은 참이라.”

“……네?”

감히 이 공녀 언니에게 그런 말을 하는 사람도 있나?

내 표정에서 드러난 듯 공녀 언니는 물론 대놓고 말하진 않았지만, 귀족들의 화법을 동원하여 웃는 얼굴로 독설을 늘어놓았다.

“사람들 중엔 때로 스스로가 무례를 범한다는 인식조차 못 하는 사람이 있어요. 아무래도 못 배워먹었단 증거가 아니겠어요?”

“아하하하…….”

난 새삼스럽게 예전에 보았던 이 언니의 옷차림을 떠올렸다.

확실히 지금까지 보았던 이 공녀 언니의 옷은 어깨라거나 가슴골이라거나 노출이 꽤 있는 편이긴 했지만…….

그래도 무척 잘 어울렸기에 이에 대해 따로 생각해본 적은 없었는데.

“영애도 오늘 입은 옷이 아주 잘 어울려요. 머리 색이랑 맞춘 옷인가요? 더욱 화사해 보이네요.”

“아, 감사합니다.”

공녀언니의 웃음이 한순간 더욱 진해졌다.

언니가 한걸음 다가오더니 한 손에 잡은 부채 너머로 살그머니 속삭였다.

“하지만 지금 옷은 마치 분홍 장미처럼 청초해 보이는데, 영애가 추구하는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을지도 몰라요. 어때요, 내 옷이라도 빌려줄까요? 난 언제든 좋아요.”

“……아, 아뇨, 아뇨!”

이 언니의 옷 컬렉션을 떠올린 나는 사색이 되어 마구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그런 옷을 소화할 능력은 없어요. 아마 없을 거예요!

“어머나, 아쉬워라. 당신에게 딱인 옷을 아는데. 하지만 원한다면 언제든 말해줘요.”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지만…… 감사합니다.”

놀리는 말이겠지? 그런데 왜인지 저 언니 눈에서 진심이 보인 것 같단 말이지.

어쩐지 한기를 느끼며 한 손으로 팔뚝을 쓸어내리는데, 그동안에 공녀 언니는 래빗을 향해 예의상 안부의 말을 몇 마디 더 건넸다.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태연하게 받아주던 래빗이었지만 곧 뽀얀 미간을 찡그렸다.

‘저건 래빗이 달갑지 않은 일을 맞이할 때 표정인데.’

아니나 다를까 황태자가 등장했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아아아, 우리 공주님!”

오, 씹혔다.

익숙한 일이라 나는 차게 식은 표정으로 래빗의 앞에 쪼그려 앉은 황태자를 쳐다보았다.

이미 제국의 여러 연회를 통해 황태자의 이런 행동거지가 널리 알려진 터라, 주변의 귀족들은 ‘또 저러는구나’ 하고 넘기는 사람과 ‘몇 번을 보아도 신기하다’는 듯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반반 정도로 나뉘었다.

“아, 이런. 영애도 있었군요?”

이 사람 분명 봤으면서 또 이러네. 나는 허허, 기가 찬 표정을 슬쩍 넘기면서 웃었다.

“황태자 전하께서도 계셨군요.”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내 피앙세의 너무나 중요한 날이니 말이지요.”

“어머나, 달링. 부끄러운 말씀을.”

순간이지만 공녀 언니 표정에 나처럼 차게 식은 표정이 지나갔던 것 같은데.

최근 계속 옆에 붙어있던 나 정도만 알아차릴 법한 아주 순간적인 표정이었다. 공녀 언니도 짜증이 났나 보네.

‘하기야 황태자도 이 자리에 있는 쪽이 좋겠네.’

공작이 이사야 후작과의 결혼을 강요했던 만큼 연인 행세 중인 황태자도 이 자리에 꼭 있어 줘야 하겠지. 어떤 일이 있을지 모르니 말이야.

모두가 생글생글 웃고 있지만, 내가 느끼는 분위기는 흡사 태풍 직전의 고요함과도 같았다.

“실례해요, 영애. 내가 인사 나눌 사람이 더 있어 먼저 가 볼게요.”

“아, 아니에요. 가보셔요, 공녀님! 부디 오늘이 뜻깊은 날이 되길 바랄게요.”

그러자 막다른 곳으로 가려던 공녀 언니가 멈칫하더니 나를 빤히 보았다. 그러더니 다가와 내 손을 살포시 쥐었다.

“고마워요, 영애.”

공녀 언니가 내 귓가로 속삭였다.

“며칠 전에 어머니를 설득해 오늘 맞춰 올라오시도록 했어요. 지금쯤 오고 계시겠죠. 모든 것을 알고 계시며 아버지가 나서도 어머니가 잘 막아 주기로 했어요.”

오오. 나도 모르게 긴장이 풀려서 어깨가 내려왔다.

공작이 어떻게 나올까 나도 걱정스러웠는데 잘된 일이었다.

‘이 언니는 다 생각이 있었구나.’

역시 걱정할 필요가 없는 인물이네…….

그러나 다음 순간 이어진 말에는 조금 놀랐다.

“영애, 당신이 무엇을 목표로 하는지 나는 잘 모르지만, 약속해요. 내가 공작이 되면 물심양면으로 돕죠. 이건 진심이에요.”

우리의 거래는 각자 내가 악녀가 되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과 이 언니의 가짜 연인을 찾아주고 도와주는 것에서 끝난 거라 생각했는데.

공녀 언니가 슬쩍 고개를 들더니 나를 슬쩍 껴안았다가 놓았다. 마치 언니가 여동생을 귀여워하는 듯한 시선이라 난 생경한 느낌에 눈을 크게 깜빡였다.

“나도 진심 어린 친구 하나 정도는 필요할 것 같으니. 아니, 당신이 나보다 연하였죠? 여동생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그렇게 말하며 웃는 공녀 언니에게서 처음으로 제 나이다운 맑음이 보였다.

고개를 돌려 연회장을 향하는 눈에는 곧 특유의 표독스러움이 차올랐지만.

나는 멀어지는 이 언니의 손을 덥썩 잡았다.

“어, 저도 마지막까지 잘 도울게요. 필요한 일이 있다면 맡겨만 주세요.”

참, 이건 내 성격인 건지. 나는 모든 이야기를 진행하면서 어쩔 수 없이 이야기의 등장인물들에게 마음을 주고야 마는 것 같다.

래빗이 그랬고 북부 성의 사람들이 그러했고. 눈 앞의 이 언니에게도 말이다.

주위를 의식해 목소리는 당연히 낮췄지만 최대한 또박또박 말했다.

“그러니까, 음, 한번 스승님은 영원한 스승님이란 말도 있잖아요? 물론 부끄러움 없는 제자도 되도록 노력할게요.”

공녀 언니는 그런 나를 보더니 이내 귀엽다는 듯 픽 웃었다.

곧 답이 들려왔는데, ‘그래요’ 하는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기뻐 보였다.

“그럼 가 볼게요. 조금 뒤에 봐요.”

언니가 사라졌지만 어째서인지 황태자는 가지 않고서 남았다.

래빗이나 나나 둘이서 ‘넌 왜 안 따라가냐?’ 하는 시선으로 황태자를 본 것 같다.

눈치 빠른 이 남자는 이를 알아차렸음에도 모른 척 싱긋 웃을 뿐이었지만.

“오, 이런 세상에. 저건 제국 수도에 단 하나밖에 없는 제과점 ‘롱바르템’에서 나온 한정판 과자 아닌가? 에스테 영애, 그대가 저걸 무척이나 좋아한다는 소릴 들었는데 마침 있군요?”

“네?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으려다 말고 멈칫했다. 나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글쎄요, 좋아했던 것 같기도 하고.”

“모? 달린, 저런 과자를 좋아했느냐?”

“세상에, 우리 공주님! 설마 몰랐던 거야? 오, 그럴 수 있지. 아주 친한 친구 사이라도 가끔 서로를 모를 때가 있으니까. 그럼 우리 사랑스러운 공주님이 직접 가서 가져다주면 어때? 여기 있는 내 비서관과 함께 말이지! 하하하!”

래빗이 인상을 찡그렸다.

어쩐지 충격받은 표정이라 내가 슬쩍 ‘사실 좋아하는 건 아니다’ 하고 말해주려는데, 래빗이 ‘조금만 기다려랴!’ 하고서는 순식간에 달려가 버렸다. 붙잡을 새도 없이 말이다.

‘……아니, 진짜 빨라.’

나는 당황한 표정을 짓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참으로 귀여워, 아아, 너무 귀여워. 이런 사랑스러운 아이가 있을까! 후우… 참, 너무나 아쉽게도…… 내 여동생은 그대의 앞에서만 진정 어린아이가 되는군요. 에스테 영애.”

“…….”

난 헛웃음을 삼켰다. 순식간에 황태자의 분위기가 변했다.

겉으론 웃고 있지만 차분하고 서늘한 눈동자를 보며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네, 황녀님을 만난 것이 제 최고의 행복이라 생각한답니다. 그래서 전하, 황녀 전하를 이렇게 눈에 띄게 따돌리고서 하고 싶은 말씀이 무엇이지요?”

“아, 별거 아닙니다.”

가짜 연인 행세를 위한 장소를 제공했다 보니 의도치 않게 황태자를 자주 보면서 이 남자의 표정도 읽을 수 있게 됐다.

‘달가운 능력은 아니지만 말이지.’

특히 공녀 언니와 수신호를 하도 많이 나눠서 곁에서 지켜보다 외운 것뿐인데, 그걸 나한테 써먹을 줄은 몰랐다.

“그냥 당신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말이지요.”

여기서 난 너랑 할 얘기 없다, 라고 하면 황족 모독죄로 잡혀가려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황태자가 씩 웃었다.

“그리고 당신 옆에 오래 있으면 분명 라이칸이 화를 낼 텐데, 난 그 애가 화를 내는 걸 보는 게 즐겁거든요.”

“……악취미를 가진 형님이네요.”

“아, 물론 나는 동생들을 모두 사랑합니다. 유엘을 가장, 매우, 제일 아낄 뿐이죠.”

자신의 편애를 당당히 밝힌 황태자가 제 가슴을 장난스레 두드렸다.

“영애, 그대를 만나고서 내 삶이 조금…… 아니, 정정합니다. 아주 윤택하고 행복해졌음을 부정할 수 없군요.”

그는 잠시 한곳을 쳐다보았다. 난 그 시선의 끝이 공녀 언니가 갔던 방향 쪽임을 알아보았다.

“이번 일 또한…… 꽤 즐겁습니다. 흐음, 실로 너무 즐거워서 헤벤 공녀와 정말 혼인이라도 할까 고민할 만큼 말이지요.”

“……농담이시죠?”

“농담일까요?”

이 인간이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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