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3. 대마법사와 악녀 메이커 (54)
내 주변에 능글거리는 사람이 없는 건 아니지만 사람 살살 긁는 능글맞음과 뻔뻔함에 있어선 이 인간이 갑이었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개소리냐는 듯 쳐다보자, 황태자가 실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농담이니, 쓰레기 보듯 하는 그 시선은 거기까지 해주시지요. 눈으로 욕을 하는 솜씨가 아주 제법입니다. 영애.”
“무슨 소릴 하시는 건지 모르겠네요.”
“뭐. 그렇다면야. 하긴, 나도 공녀와의 결혼은 여러모로 생각할 문제가 많지요. 볼수록 동족인가 싶을 만큼 잘 통하지만 공작씩이나 된 그녀가 나와 결혼을 할지 모를 일이고…….”
황태자가 턱을 잡은 채로 고개를 우아하게 기울였다.
“황권 강화엔 너무 좋겠지만 공녀가 순순히 수락할 사람은 아니지요.”
“……결국엔 황태자 전하의 이득만 생각하신 거 맞죠?”
“아, 티가 납니까?”
황태자가 뻔뻔하게 대꾸했다. 공녀가 자신이었다면 그녀도 이와 비슷하게 생각했을 거라 주장하면서.
물론 그럴 것 같긴 한데, 굳이 동의를 표하지는 않았다.
“사랑은 분명 훌륭한 감정이지만 인생은 사랑이 전부는 아니지요.”
“그런가요? 그러니까…… 공녀님과의 결혼을 생각해도 사랑만은 아닐 거란 말을 하고 싶으신 거라 생각해도 될지요.”
“그렇지요.”
보통 귀족들의 결혼이 정략 결혼으로 많이들 이루어진다곤 알고 있다.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지내는지 모를 내 사촌 언니인 지젤 또한 정략 결혼의 희생양이 될 예정이었으니까.
나 또한 몸이 아프지 않았다면 부모님이 정해준 약혼자가 있었을지 모를 일이고.
“당신은 참 신기하게도 이 제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유명인사들과 엮이고, 기묘한 사건들에 휘말려 있기도 하더군요.”
“…….”
순간 긴장했지만, 황태자는 나를 물끄러미 볼 뿐 더는 파고들지 않았다.
“가끔 당신에게서는 내가 황태자라는 자리에 부담을 느꼈을 어린 시절의 모습이 보일 때가 있습니다. 이번에 가까이서 보니 더욱 그렇더군요.”
“…….”
“그 어깨를 누르는 짐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영애 스스로를 잃지 말길 바랍니다. 역할과 자리에 짓눌리면…… 가끔 소중한 걸 잊고 그대로 잃기도 하지요. 내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나처럼 말입니다.”
황태자의 무기질적인 눈에 처음으로 진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물론 공녀 언니가 그러했듯 그 감정은 나타난 것보다 빠르게 사라졌다.
“뭐 어쨌거나. 라이칸 그 애는 나와 다르게 사랑이 전부일지도 모를 아이인 듯하니. 하지만 그대는 어떨지 모르겠군요. 나와 비슷한 것 같다가도…… 막무가내인 점을 보면 아닌 것도 같단 말이지요.”
“저, 전하. 정말 솔직하게 공녀님과 비슷하단 말은 기분이 좋을 것 같은데 황태자 전하와 비슷하단 말씀은…….”
자세한 건 생략한다.
내가 슬쩍 삐딱한 반응을 보이자, 황태자가 픽 웃음소리를 냈다. 하지만 눈이 웃고 있지 않은데요, 이 사람아.
하여간 폭군을 가장 닮은 인간답게 권위적인 인간이었다. 슬쩍 장난스럽게 던진 작은 말대꾸 하나도 그냥 넘어갈 기세가 아니다. 이래서 이 사람을 안 좋아한다니까.
“그대는 후회하지 않길 바랍니다.”
그러나 이 순간엔 알 수 있었다.
저 남자는 여전히 나를 그리 좋아하지 않고, 마찬가지로 내가 자신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단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내게 무언가 조언해주고자 했다는 것을.
“그럼, 이만. 나도 내 피앙세에게 가 보아야겠군요.”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묘한 기분에 빠졌다.
미운 정도 정이라면 나 또한 저 남자가 죽거나 망하는 것보다야, 그냥 멀쩡히 잘 사는 게 낫겠다 싶겠지만.
비슷한 기분인 건가?
‘아니면 내가 위험해지면 래빗에게 영향이 오니까 조언해준 거 아니야?’
가능성 있어. 매우 커.
하지만 황태자의 눈에도 내가 퍽 아슬아슬해 보였단 건 알 수 있었다.
‘으음, 그나저나 래빗은 아직인가?’
황태자마저 사라진 덕분에 홀로 남게 된 나는 그제야 좀 더 연회장을 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다 날 쳐다보고 있었잖아?’
삼삼오오 모인 사람들이 나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나도 모르게 긴장감이 느껴졌지만 겉으로 티를 내지는 않았다.
“악녀가 되고 싶다면 어떤 상황에도 굴하지 말아요. 당황할 땐 오히려…… 웃어봐요. 가소롭다는 듯 오만하게.”
그들과 자연스럽게 시선을 마주하며 웃자, 오히려 몇몇 이들이 당황하며 시선을 피했다.
개중엔 더욱 흥미롭다는 표정을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어쨌거나 저들끼리 더욱 쑥덕거린다는 점에서 비슷하게 보였다.
[축하합니다! 훌륭한 악녀가 되기까지 단 한걸음! 99/100]
눈앞으로 푸르른 요정의 창이 떠올랐다.
이상하게도 악명 수치는 ‘99’를 달성한 뒤로는 여기서 더 오르지 않은 채 같은 창만 반복해서 띄우곤 했다.
‘수치가 100이 되려면 특정한 조건이 더 있는 건가?’
눈을 가늘게 좁히다 말고 숨을 꾹 참았다. 래빗이 얼른 오면 좋겠는데.
래빗을 생각하던 난 새삼스럽게 오늘 함께 할 뻔했던 세 남자를 같이 떠올렸다.
내가 주인공도 아닌 연회에서 문제라도 생길까 봐 일단 연회에서도 최대한 조용히 있어 달라고 하긴 했지만…….
신기하게도 아무도 눈에 안 띄네.
마치 숨어있기라도 하듯이…….
‘에이 설마, 숨어있을 이유가 있나.’
……아니면 래빗이 말한 것처럼 내가 안 보이는 곳에서 싸우고 있는 건 아니겠지?
아냐, 아냐 설마!
어쩐지 불길한 상상에 나도 모르게 속으로 식은땀을 흘릴 때였다.
“안녕하세요, 아리따운 영애님.”
낯선 목소리에 자연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그대로 멈칫했다.
‘이 사람은…….’
살랑거리는 검갈색 머리카락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 아래로 모양 좋은 눈썹과 날카로운 듯 다정함이 깃든 눈매가 보였다.
이사야 후작!
그는 긴 눈매를 그윽하게 접어 내렸다.
표정만 보아서는 그가 몹시도 반가워한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다정한 얼굴이었다.
‘왜 이렇게 반가워하는 거지?’
분명 내가 모은 초상화 컬렉션에 오를 만큼 잘생겼고 날카로움이 깃든 눈매였지만, 라이칸이나 휴고, 발데르와는 다르게 완전히 학자 쪽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우리 구면이지요? 반갑습니다.”
소문난 바람둥이라더니, 자연스럽게 말을 붙이는 솜씨가 아주 그냥 발군이었다. 나도 모르게 대답할 뻔했으니까.
‘뭐야, 미친 거 아니냐. 본인의 전 여친. 아니 전 애인도 아니랬지? 아무튼 자신이 차버린 사람의 작위 계승식에 오다니…….’
게다가 이야기를 들어서는 이 사람은 아주 수상한 인물이었다. 공작이 공녀 언니에게 돌연 이 남자와 결혼하라고 한 것도 그렇고.
참으로 놀랍게도 이 남자를 경계할 수밖에 없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이건 며칠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죽은 주치의를 조사하던 파올로가 말해줬었지.
“달린, 곧 정리해서 네게 전달할 거지만, 급히 말할 게 따로 있어.”
“응? 뭔데?”
“……아무래도 네 죽음을 사주한 그 주치의 뒤에 어떤 세력이 있고, 거기에 유력한 귀족이 하나 있는 것 같아.”
“……유력한 귀족?”
이미 발데르를 통해 주치의 뒤로 있던 내막을 알게 된 상황이었다.
그런데 파올로는 또 다른 공범을 언급했다.
“아직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네 죽음에 개입한 귀족은 이사야 후작인 것 같다. 말했듯 정확하지는 않아. 그도 그럴 게…… 그 남자와 넌 아무런 관계도 아니야. 계기도 동기도 없으니까.”
모든 범죄엔 동기가 있다.
설사 아무 이유 없이 즐거움을 위해 살인을 하는 쾌락범이라 해도 그저 ‘죽이고 싶었다’는 이유 자체가 일종의 동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사야 후작은 ‘달린 에스테’의 죽음에 관여할 이유가 정말 전혀 없던, 접점조차 없던 인물이었다.
그래서인지 전달하는 파올로의 표정도 매우 혼란스러워 보였다.
어쨌거나 파올로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은 이상 난 이 남자를 경계할 작정이었다. 물론 대놓고 경계해서 의심을 받을 생각은 아니지만.
“……반갑습니다. 이사야 후작님. 그런데 죄송하지만 제가 지금 가볼 곳이 있어 애석하게도 대화를 나눌 시간은 없겠네요. 부디 즐거운 자리 되시길 바…,”
“이런 아쉽군요. 저는 영애처럼 아리따운 분과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만.”
후작이 내 말을 끊고서 훅 치고 들어왔다. 졸지에 말을 씹힌 내가 미간을 찡그리자, 미안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무례를 용서하세요. 최근 제 정혼자이신 로잘린 님과 친한 친우가 되었다고 들어 몹시도 궁금해 조급한 마음이 앞섰나 봅니다.”
“…….”
허어, 정혼자? 나는 기막힌 단어 선택에 말을 잃었다.
아무래도 이 인간 결코 녹록한 인간이 아니다.
더군다나 살짝 뭐랄까, 광기라고 해야 하나? 똘끼마저 보이는 기분인데.
왜일까, 조금 전부터 목 뒤가 저릿저릿한 기분이었다.
마치 생존 감각이 당장 여기서 도망치라고 외치는 듯이.
[스킬 ‘눈치는 약에 쓰자’가 발동 중입니다.]
이상했다.
……헤벤 공작저에서 이 남자를 처음 맞닥뜨렸을 때는 이런 기분을 느끼지 않았는데.
천천히 고개를 든 순간 왜일까.
나는 심장이 멈추는 기분을 느꼈다.
조금 전에 우아한 듯 학자같이 반듯한 미소는 온데간데없이, 처음 보는 표정으로 웃는 남자가 있었으니까.
“이런, 혹시나 했는데 말이죠. 그저 확인차 왔을 뿐인데……. 정답이었네?”
시간과 공기마저 멈춘 기분이 느껴졌다.
평범한 색처럼 보이던 남자의 눈이 더욱 깊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 아래로 보인 검푸른 색이 어쩐지 요정의 창이 가진 색과 비슷하다고 느낀 순간이었다.
“우리 구면이지?”
반말이 흘러나왔다.
솜털이 곤두섰다.
왜일까, 조금 전과는 전혀 달라진 이 말투를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았으니까.
“당신도 특별한 사람이구나. 나처럼.”
“…….”
남자의 눈이 더욱 깊고 진하게 휘어졌다. 늪 같은 것이 눈동자 안에서 일렁인다.
“북부 영지에서 보았던가?”
“…….”
“반가워. 그땐 얼굴이 보이지 않아서 이제야 알아봤네.”
두 번째 메인 퀘스트, 틀어진 시간에서 보았던 세계의 오류.
그자가 지금 눈앞에 있었다.
[조심하세요! 당신은 다시 한번 이 세계의 진정한 ‘오류’와 조우했습니다!]
원작을 뒤틀고 주인공을 죽일 수 있는 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