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3. 대마법사와 악녀 메이커 (55)
나는 속으로 숨을 삼켰다.
‘동요해서는 안 된다.’
머릿속에서는 연신 경고등이 울려퍼졌다.
지금까지 여기 살면서 이렇게까지 ‘눈치는 약에 쓰자’ 스킬이 선명하게 느껴진 적 없었다.
정확히는 ‘생존 감각’이다.
스킬이 올려준 생존 감각이 얼른 도망치라며 미친 듯이 울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바로 돌아서서 도망갈 수는 없어.
‘그럼 오히려 내 정체를 그대로 알려주는 꼴이지.’
어째서인지 저 남자는 처음 만났을 때 북부 영지의 뒤틀린 시간에서 만난 사람이 나라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고, 이제야 눈치챘다.
하지만 알았는데 떠보는 걸지도 몰라. 그저 확신하지 못한 거라면?
나는 순진하게 눈을 깜빡였다. 내 고개가 자연스럽게 갸웃 기울어졌다. 내 손은 어느새 부채를 펴고 입가에 살풋 가져다 댔다.
공녀 언니처럼, 공녀 언니처럼…….
“……죄송하지만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후작님.”
나는 그를 숫제 미친 사람 보듯이 훑었다. 내가 정말 관계없는 사람이었을 때 보일 법한 반응을 꾸며낸 것이었다.
‘자연스럽게.’
“고작해야 두 번쯤 만난 제게 어찌 이상한 소릴 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먼저 가보겠습니다.”
천천히. 최대한 태연하게 발을 옮기는 순간, 남자가 내 앞을 슬그머니 가로막았다. 그저 한 걸음 옮겼을 뿐이지만 내 앞을 막기엔 충분했다.
나는 부채를 쥔 손에 힘을 살짝 주었다.
“흐응, 그렇게 나오시겠다?”
“비켜주시죠?”
“신기한데……. 하는 행동이 로잘린과 비슷하잖아?”
이게, 언제 봤다고 반말이야? 나는 표정을 차게 가라앉히며 그를 보았다.
“하지만 전혀 다른 느낌이군요, 에스테 영애. 당신이 요즘 제국 사교계를 들썩이는 파격적인 인물임은 잘 알고 있습니다. 아, 오는 남자 막지 않고 가는 남자 잡지 않는다지요? 그런 부분이라면 저랑 잘 맞을 것 같습니다만.”
바람둥이에게 공감 간단 소릴 듣다니. 공녀 언니의 악녀 강좌가 성공해도 너무 성공한 것 같은데, 이 남자에게 이런 말을 듣자니 기분이 더러웠다.
“저도 그 목록에 한번 넣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느물느물한 목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더욱 더러워졌고.
“숙녀의 앞길을 막아서는 건 저도 취향이 아닙니다만 꼭 이야길 나누고 싶습니다. 잠시 시간 괜찮겠습니까?”
그가 슬그머니 허리를 숙였다.
퍼스널 스페이스를 침범하는 범위는 아니었지만 친분이 없는 남녀가 보이기에는 조금 미묘한 거리.
“은밀하게, 말입니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 XX, 세계의 오류 이거 이거, 완전 능글맞다 못해 음흉한 목소리잖아?
이사야 후작이 제국의 이름난 바람둥이라더니 정말이지 거기에 딱 맞는 목소리와 행동이었다.
물론 이 외피 안에는 세계를 망치기 위한 꿍꿍이를 가진 정체 모를 것이 있겠지만.
“……당신은 궁금하지 않나요?”
“비키세요.”
“이상하네, 당신도 운명의 장난에 당하지 않았나? 그랬을 텐데?”
와, 이 말에선 아주 잠시 동요할 뻔했지만.
그간 단련된 덕분인지 천연덕스럽게 넘기고 ‘이게 아까부터 대체 무슨 개소리야?’ 하는 얼굴로 쳐다볼 수 있었다.
그러자 아주 잠시지만, 이사야 후작의 얼굴로 미묘한 표정이 스쳤다.
“……뭐야, 착각인가?”
오냐, 그렇게 착각해주면 좋겠는데?
“흐음, 역시 더욱 한번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군요. 꼭 한번 시간을 내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저는 공녀님의 절친한 친우입니다. 당신과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고, 나눌 이유도 모르겠네요. 그러니…….”
“제 눈을 한 번만 바라보세요.”
찡그리며 눈을 마주한 순간 나도 모르게 몸이 멈칫했다.
[경고! 경고! 요정이 경고합니다! 위험합니다! 스킬을 쓰세요!]
[요정이 알립니다! 세계의 오류가 ‘빙의자’님을 세뇌하려 하고 있어요!]
내 눈앞으로 그것도 평소와 비교해 희미하기 짝이 없는 요정의 창이 나타났다.
세뇌? 하지만 스킬이라니, 그건…….
‘쓰는 순간 연기한 보람이 없이 내 정체가 들킬 거란 소리잖아?’
그건 안 된다. 감이지만 이 순간에 이 남자에게 정체를 들켜서 좋을 게 없단 생각이 들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 상황을 어떻게 타파한단 말인가?
주변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많았지만, 이 남자가 어떤 수작을 부리는지는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 순간 처음으로 그림자처럼 붙어있던 발데르의 존재가 아쉬워졌다.
아냐, 아니야. 발데르가 있었다면 문제가 더 커졌을지도 몰라. 그럼 대체 이걸 어떻게…….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싶었다. 역시 스킬을 쓰는 수밖에 없나?
찡그리며 입술을 여는 그 순간이었다.
“여기 있었군, 달린.”
어깨 위로 부드러운 감촉이 스쳤다. 이와 동시에 밧줄에서 풀린 것처럼 시원하고 통쾌한 감각이 들었다.
‘아, 감각이 돌아왔다!’
뱀 앞의 개구리처럼 움직이지 않던 몸이 움직여진다.
나는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라이칸 황자님?”
놀랍게도 내 어깨를 쥔 사람은 다름 아닌 라이칸이었다.
그는 차갑고도 까칠한 표정으로 이사야 후작을 노려보고 있었다.
“숙녀가 원하지 않는 제안을 강요하는 것이, 후작이 아는 예의범절인가?”
“……이런, 오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창공의…….”
“듣기 싫다.”
이사야 후작의 얼굴로 난감한 표정이 스쳤다.
어째서인지 조금 전 나를 강제하려던 것과 다르게 더는 이상한 수를 쓰려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쉽게 포기하려는 사람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이런, 정말 오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만, 저는 영애에게 의사를 묻고서 함께 하고자 하는 참이었습니다. 전하.”
“의사는 후작처럼 묻는 게 아니지.”
라이칸의 등장으로 그렇지 않아도 몰려있던 시선이 더욱더 몰렸다.
하지만 나는 이 시선들이 썩 반가웠다. 그래, 봐라, 봐. 어차피 악녀로 소문이 자자한 거. 내 평판이야 그렇다 치고, 보는 시선이 늘었는데 저 자식이 또 이상한 능력을 쓰진 못하겠지.
이사야 후작 또한 이 기류를 느꼈는지 슬그머니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이상하게도 그저 약간 물러났을 뿐인데 한결 숨쉬기가 편해졌다.
목을 쓰다듬다 말고 시선을 들었다가 그대로 후작과 눈이 마주쳤다.
‘아, 또……!’
나는 몸이 굳기 전에 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이미 조금 늦었는지 삐거덕거리던 몸이 그대로 뒤로 기우뚱 넘어갔다.
아, 안돼. 안돼. 여기서 넘어지면 내 악녀 이미지가……!
눈을 질끈 감는 순간, 단단한 것이 먼저 등에 닿았다. 어라, 익숙한 감각인데.
“괜찮으신가요? 달린.”
그윽하고 낮은 동시에 모순적인 순진함이 어린 목소리.
시선을 들면 나를 향해 휘어지는 눈이 보였다.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휴고?’
살짝 볼을 물들이며, 수줍은 미소를 짓는 사람은 분명 휴고였다.
넘어지려는 날 그가 붙잡아준 듯 나는 휴고에게 백허그 자세로 안긴 채였다.
다리에 힘이 빠지려는 찰나, 그가 조심스럽게 나를 고쳐잡더니 날 가뿐하게 일으켜 주었다.
‘와, 깜짝이야.’
다행스럽게도 몸이 딱딱해지고 세뇌가 잠식할 것 같은 기분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아니, 오히려 휴고를 본 순간 더욱더 숨쉬기가 편해진 기분이랄지.
잠깐, 라이칸이 등장한 뒤 숨쉬기가 편해졌고, 휴고가 등장하고서 호흡이 더욱 편해졌다면 뭔가 관계가 있는 건가?
휴고가 내 옆으로 서는 동시에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이사야 후작이었다.
“모두 지켜보았네만, 나는 내 눈앞에서 무례한 짓을 벌이는 걸 좋아하지 않아. 더 하겠다면 친히 장갑을 던져주지.”
더 말을 걸었다가는 결투로 끝장을 보자는 말이었다.
명실상부 제국 최강자의 한마디에 이사야 후작이 한 걸음 더 물러났다.
“이런, 아무래도 오해가 풀리지 않은 것 같지만…… 오늘은 날이 아닌 것 같군요.”
그는 압박 속에서도 아무렇지 않은 듯 꾸벅 우아하게 허리를 숙였다.
“그럼 또 뵙겠습니다. 에스테 영애.”
마지막 순간 찰나지만 그의 표정이 가라앉으며 남긴 시선이 너무나 강렬해서, 난 몰래 부채를 꾹 잡아야 했다.
‘우와, 이거 요정 그놈들에게 협박받으며 산 세월이 아니었다면 진짜 동요했겠다.’
내가 누구인가. 요정이라는 정체 모를 놈들에게 반강제로 끌려다니며 살아남기를 몇 개월, 나는 미지의 존재가 주는 압박에 상당히 강해져 있었다.
‘다시 보긴 뭘 봐. 엿이나 먹어라, 이 XX야.’
아, 단점이랄지 부작용이 있다면 몇 개월 사이 입이 매우 험해졌달까.
사소한 부작용이라 할 수 있겠다.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황자님, 대공님.”
나는 자세를 바로 하고 빙긋 웃었다.
아아, 주변에서 더욱 노골적인 시선이 느껴졌지만 속으로 주문을 외며 외면했다.
나는 돌이다, 돌이다, 돌이다…….
아무것도 안 보여, 안 보인다…….
“……괜찮은 건가?”
“괜찮아요?”
라이칸과 휴고 두 사람이 동시에 같은 질문을 묻고는 서로를 쳐다보았다.
어쩐지 서로 다른 표정인데, 그 사이에 불꽃이 튄 것 같기도 했다.
“아하하……. 네, 괜찮아요. 별 일 없었어요.”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덧붙였다.
“아니, 별일이 있을 뻔했는데 적절한 타이밍에 도와주셨어요.”
이제 웬만해선 이 남자들에게도 속이는 것 없이 말하고 싶었던지라 진솔하게 털어놓았다.
동시에 두 남자의 시선이 각기 다른 듯 비슷하게 가라앉거나 변했다.
“……쫓아가서 눈이라도,”
“아하하, 아뇨아뇨아뇨아뇨. 그런 걸 원해서 드린 말씀은 아니고요.”
무슨 말인지 몰라도 그런 예쁜 얼굴로 살벌한 말 뱉지 마세요, 대공님.
“음, 일단은…….”
나는 주변을 살짝 둘러보고는 부채로 살짝 입을 톡 두드렸다.
“잠시 테라스에 가서 좀 쉬다가 올게요…….”
세계의 오류를 만나서일까, 어쩐지 대번에 기운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라이칸에게 곧 나를 찾아올 래빗에게 사정을 설명해달라고 말한 뒤, 휴고의 에스코트를 받아 테라스로 가서 커튼을 닫았다.
휴고는 잠시 혼자 있고 싶다는 내 말에 조금 시무룩해 하긴 했지만 흔쾌히 테라스 밖 커튼 앞에 머무르기로 했다.
그는 아마 저 커튼 너머로 계속 서 있겠지.
나는 커튼에 가려진 문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야, 나와, 요정.’
허공을 노려보았다.
‘나와서 해명하라고, 이 XX야.’
그러나 허공에는 아무것도 뜨지 않았다.
내가 포기하지 않고 허공을 노려보자, 곧 띠리링 평소보다 작은 소리와 함께 요정의 창이 등장했다.
[요정은 지금 대화하는 건 위험하다고 알려요! ˚‧º·(˚ ˃̣̣̥⌓˂̣̣̥ )‧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