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3. 대마법사와 악녀 메이커 (56)
‘상관없어. 당장 들키는 게 아니라면 빨리 대답해.’
나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어차피 ‘세계의 오류’가 헤벤 공작저 저택에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사야 후작이 갑작스럽게 세계의 오류로 나타났더라도 그리 놀랍진 않았다.
‘물론 아예 놀라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그렇다면 나는 여기서 요정 놈에게 무엇을 물어봐야 하는가.
‘요정, 세계의 오류는 목적이 뭐지?’
[요정은 대답할 수 없어요 ˚‧º·(˚ ˃̣̣̥⌓˂̣̣̥ )‧º·˚]
내가 막 발끈하려는 찰나, 다시 한번 창이 떠올랐다.
[하지만, 요정은 ‘예’와 ‘아니오’ 정도의 대답은 할 수 있을지도…….]
내 입술이 멈칫했다. 그 정도라면…….
‘세계의 오류가 가진 목적은 단순히 이야기를 망치는 거야?’
[요정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고 대답해요.]
‘뭐야. 더 정확히 물어봐야 해? 그럼, 걘 세계가 멸망하기를 바라기라도 해?’
[요정은 정확하진 않지만…… 그럴지도 모른다고 대답해요.]
이 또한 놀라운 사실은 아니었다.
이놈은 어떻게 보면 소설로 치면 악당보다도 더한 최종 악당 격의 존재다.
그런 존재가 세계를 멸망시키겠어! 라고 해본들, 내게는 이야기 속 악당이 으레 그러하듯 진부한 목적을 주장하는 것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아 물론 거기에 내 목숨이나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의 목숨이 달려 있으니 문제는 문제지만.
잠시 생각에 빠졌던 나는 고개를 불쑥 들어 올렸다.
……그러고 보니, 세계의 오류는 왜 세 번째 이야기를 망쳐 놓고 왜 헤벤 공작가에 있는 거지?
‘요정이 그랬지. 공녀 언니는 분명 새로운 세 번째 이야기 주인공, 악녀 후보라고.’
하지만 결국은 내가 주인공이 됐다.
‘가정해보자.’
만약, 세계의 오류가 지닌 특수한 능력을 통해 다음 주인공이 될 사람을 알 수 있는 거라면?
그러나, 이제 내가 주인공이 됐다는 사실은 모르는 거라면.
‘왜냐면 나는 빙의자라는 이질적인 존재니까. 아직 내가 주인공이 되거나 될 수 있단 사실을 모르는 거라면.’
그럼 세계의 오류는 공녀 언니가 주인공이거나 주인공이 될 거라 생각하고 곁에 있는 거고.
언니에게 나타날지 모를 남자주인공을 경계해, 지금까지 약혼자 혹은 결혼 상대가 되려고 했던 걸까?
‘그런 거라면 갑작스럽게 헤벤 공작이 이사야 후작을 결혼 상대로 내민 이유도 이해가 가.’
현재 공작의 상태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세계의 오류가 조금 전에 나에게 했듯이 세뇌라도 시킨 것이 틀림없다.
이번에는 바로 주인공을 죽이지 않는 건가?
왜 새로운 주인공 혹은 주인공 후보를 찾았는데 죽이지 않았을까.
‘아마도 주인공이 되기 전엔 사람을 죽이지 않거나, 죽일 수 없거나.’
[요정이 감탄합니다. 요정이 그렇다고 대답해요!]
그리고 또 한가지.
‘……새로운 남자주인공까지 찾은 뒤에 죽이려고 했거나?’
[요정이 그렇다고 대답해요!]
야, 이 XX…… 넌 뭐가 다 맞다고 난리야? 다 맞다는 거야, 뭐야.
다 맞으면 그게 더 문제라고. 나는 요정의 창을 째려보다 입을 가로막았다.
그럼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주인공임을 들키면 안 돼.’
조금 전 능력을 보아서는 저놈은 사람을 세뇌시킬 수 있고, 그 능력은 내게도 통한다.
요정의 말을 봐서는 내가 스킬을 사용하면 막을 수 있는 모양이지만.
상대가 그 외에 또 어떤 능력을 가졌으며, 정확히 무슨 짓을 하려 하고 어떤 목적을 가졌는지 아직 완벽하게 모르는 상황에서 내 패만 공개되는 건 상당히 불리하다.
다행히 세계의 오류는 조금 전에 내 연기 덕분에 긴가민가한 모양이니까.
내가 정말 빙의자인지 의심하는 동시에 계속 공녀 언니를 주시하겠지.
“여기 있었네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팔랑 흩날리는 망토자락이 보였다. 발데르가 허공에서 우아하게 내려와 탁, 난간에 발끝을 디뎠다.
까만 밤하늘, 새파란 달을 배경으로 아슬아슬하게 서 있기 때문일까. 그는 인간이라기보다는 막 하늘에서 내려온 존재 같았다.
참으로 신기하지, 인간이 맞나 싶은 그 ‘세계의 오류’는 지극히 인간적인 욕망을 가진 존재처럼 보였고 행동거지도 아주 인간적이었는데.
오히려 진짜 인간인 여기 대마법사님이 세상에 초연한 인간 이상의 존재처럼 보인다니 말이야.
“발데르.”
“네.”
“계속 밖에 있던 거예요?”
“네, 맞아요.”
조금 전에 라이칸과 휴고가 연회장에서 나타났을 때, 왜 발데르는 없나 의문이 들었건만 연회장 내에 없었던 모양이었다.
“알아보고 싶은 것이 있어서.”
“알아보고 싶은 것이요?”
탁. 발데르가 바닥에 내려섰다. 그리고 내려서기 무섭게 성큼 내게 다가왔다.
나는 곧장 그에게서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나오리라 생각했지만, 웬걸 다가온 그가 부드럽게 빙긋 웃었다.
“나 추워요.”
“……네?”
“안아주면 추위가 사라질 것 같은데.”
고개를 갸웃 기울이는 꼴이 안아주지 않으면 답하지 않겠다는 모습이라 그저 얼떨떨했다.
이제 막 건드리지 않기로 약속은 했었지만…… 그래서 이젠 얼굴을 쓰는 건가?
‘허어, 통한다는 게 더 웃기네.’
그랬다.
달빛을 배경 삼은 이 남자는 흡사 달에서 뚝 떨어진 요정처럼 신비함을 자아냈다.
사르르 부드럽게 접히는 눈웃음도 이 남자의 예쁜 미모를 살리는데 한몫했는데, 이를 보고 있으려니 어떤 존재가 생각나는 것이.
‘둑스?’
어째 둑스랑 같은 종의 여우가 살랑살랑 꼬리를 흔드는 환상이 보이는 기분이랄까.
“……안 궁금해하면 안 될까요?”
“궁금해 해주면 좋겠는데요. 당신과도 관련한 이야기니까요.”
애써 날뛰는 심장을 가라앉히며 대답했더니, 돌아오는 건 더욱 긍금하게 만드는 대답이었다.
나는 고민 끝에 끄응 하며, 팔에 감고 있던 털로 된 숄을 벗었다.
그걸 발데르의 목에 둘둘 감았더니 졸지에 털 목도리를 하게 된 발데르가 눈을 깜빡였다. 나는 씩 장난스럽게 웃었다.
“자, 이제 됐죠? 안 춥죠?”
거, 마법 한방이면 뚝딱 따뜻해질 양반이 이렇게 수작 피우는 거 아니에요. 예?
물론 폭신한 숄을 내주는 바람에 바람이 조금 쌀쌀하긴 했지만 견딜 만했다.
나를 물끄러미 보던 발데르가 이내 피식 미소했다.
“내가 손해 볼 선택을 했어요.”
“네?”
“이 순간에 당신을 안아볼 수 없다니.”
“……꼭 안아보신 것처럼 이야기하시네요.”
“희망 사항인데.”
어느새 가까워진 거리에 나는 숄에서 슬그머니 손을 뗐고, 그는 쫓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주황빛 눈에 감도는 깊고도 묘한 기운을 눈치채기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이 저택은 이상해요, 달린.”
발데르는 나를 곤란하게 할 생각은 없다는 듯 선선히 본론을 꺼냈다.
“저택 전체에 걸쳐 마력장 왜곡 결계가 펼쳐져 있어요.”
“마력장 왜곡…… 음, 뭐라구요?”
“쉽게 말해, 펼친 사람의 의지에 따라 그 누구도 마나를 쓰지 못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겁니다. 마법사라면 마법을, 검사라면 검기를 쓰지 못하게끔 말이에요.”
헐, 그거 완전 필살기 봉쇄하는 위험한 결계 아닌가? 내 얼굴이 심각해졌다.
“거기다, 이상하더군요. 이 결계의 원천이 마법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해요. 처음 보는 미지의 힘 같은…….”
발데르의 말이 이어지자, 내 얼굴은 더욱 심각해졌다. 미지의 힘. 당연히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으니까.
세계의 오류.
‘그놈의 짓이다. 분명해.’
그렇지 않아도 공녀 언니가 강행한 이 계승식이 어떤 이유로든 분기점이 되리라 생각하고 있던 참인데, 아무래도 저쪽도 비슷하게 여긴 모양이었다.
“발데르, 혹시 그거 발데르의 힘으로 없앨 수 있나요?”
“가능 여부를 묻는다면, 가능할 것 같지만 들켜도 괜찮은가요?”
끙, 그럼 저쪽이 더욱 경계하는 결과를 낳으려나? 이러다 공녀 언니부터 살해하겠다 나서기라도 하면 곤란해진다.
‘차라리 공녀 언니가 잠시 자리를 비운다면 모를까.’
내가 주인공이 된 걸 모른다면 발데르가 남자주인공이 됐다는 것도 모르지 않을까?
설사 발데르를 노린다고 해도…… 이 남자가 쉽게 당할 것 같지는 않고.
‘내 옆에 계속 붙여두면 같이 대응도 할 수 있을 테고 말이지.’
일단, 제일 중요한 건 세계의 오류가 대체 어느 정도의 무력을 가지고 있을지가 관건이네.
허공을 보았지만 요정은 대답이 없었다.
“짐작 가는 것이 있나요?”
“……으음.”
발데르에게 솔직하게 세계의 오류에 관해서 털어놓으려던 찰나였다.
발데르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저는 짐작이 가요. 모를 수가 없죠.”
“네?”
“내 친구를 죽인 자가 남긴 흔적과 정확히 같은 힘이니까요.”
나는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이 남자, 세 번째 이야기의 남자주인공, 즉 자신의 친구를 죽인 사람을 쫓고 있었지.
나는 숨을 삼켰다.
그 전까지 전혀 느끼지 못했던 살벌한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찾았나 봐요.”
나를 향한 기운이 아니었음에도 절로 오싹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당신이 내게 행운을 가져다줬나 봐요, 달린.”
나른한 듯 웃고 있는 표정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힘이었지만 나는 천천히 끄덕였다.
“마침 잘됐네요. 우린 같은 적을 두고 있는 것 같으니까요.”
발데르와 시선을 마주하고서 다시 한번 세계의 오류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려 할 때였다.
달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고개를 돌리면, 문을 열다 말고 그대로 멈춘 휴고가 보였다.
휴고는 발데르를 보는 동시에 표정을 굳히며 그를 노려보는 것 같았다.
“달린, 급한 일입니다.”
“……대공님?”
“공녀의 하녀가 당신을 급히 찾고 있더군요.”
그의 말과 동시에 휴고의 옆으로 살짝 누군가 보였다.
다급한 표정의 하녀는 나를 보자마자 입을 뻥긋 움직였다. 헤벤 공작가에 왔을 때 한번 봤던 얼굴이었다.
공녀 언니의 전담 하녀 아닌가?
“에, 에스테 영애님. 공녀님께서 영애를 급히 찾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