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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218화 (218/281)

◈218화. 3. 대마법사와 악녀 메이커 (57)

공녀 언니가 나를?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하긴 여기 도착해서 시간이 조금 지나긴 했지?’

황태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그 무례하기 짝이 없는 이사야 후작, 아니, 세계의 오류와 실랑이를 벌이고. 거기다 테라스로 나와서 발데르랑 이야기를 나누기까지.

생각해 보니 시간이 꽤 흐른 참이었다.

‘하지만 곧 메인 행사인 계승식이 시작할 때가 아닌가?’

한창 준비하느라 바쁠 사람이 나를 왜 부른단 말인가. 혹시 무슨 문제가 생겼나 싶어 내 얼굴이 굳어졌다.

“발데르, 혹시 저택 내에서 사고 난 거 있어요? 사람이 다쳤다거나 어디가 부서졌다거나.”

“아뇨, 돌아봤지만 그런 일은 없었어요. 마력의 파동도 딱히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나는 자연스럽게 휴고를 보았다.

휴고는 여전히 발데르를 사납게 노려보고 있었지만 내 시선이 닿기 무섭게 순식간에 온순해졌다.

“저도 낯선 기운이라거나 심상치 않은 것은 느끼지 못했어요, 달린.”

“대공님께서도 뭔갈 느끼지 못하셨다는 거죠?”

혹시나 세계의 오류가 뭔갈 저지른 건가 싶었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공녀님은 어디 계시죠?”

곧 나는 하녀의 뒤를 따라서 공녀 언니가 있는 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길에 휴고와 발데르가 함께 가겠다고 해서 두 사람은 문 앞에 남았다.

‘눈에 띄어서 좋을 것 없을 것 같아 발데르는 투명 마법을 쓰고 왔지만.’

문이 닫혔다.

나는 흘끗 닫힌 문을 보았다. 사실 서 있는 사람은 휴고와 발데르 말고도 한 사람 더 있었다. 라이칸이었다.

복도를 걷는 길에 함께 가겠다며 같이 왔지 뭔가.

심지어 래빗과 함께였는데, 래빗은 남자들의 면면을 보더니 ‘잘 해보라며’ 엄지를 들어주었다. 뭘 잘 해보라는 거야.

끙, 난 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마침 의자에 앉아있던 공녀 언니가 나를 보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왔네요. 영애.”

“공녀님.”

생각보다는 다급해 보이진 않는데?

이렇게 생각한 것도 잠시, 가까이 다가갈수록 깨달았다.

‘식은땀?’

이 언니의 이마가 식은땀으로 가득했다. 내 손목을 살짝 잡았는데 손바닥도 식은땀으로 가득했다.

표정은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공녀님, 혹시 어디 편찮으세요? 의사, 의사를 부를까요? 아, 혹시 의사를 부를 상황이 안되시는 건가요? 그럼 대마법사님을…….”

“진정해요, 영애. 좋은 추리였지만 틀렸어요.”

공녀 언니가 살짝 웃었다.

“그리고 몰래 의원을 들이는 거라면 나도 할 수 있답니다.”

하기야 그건 그렇지. 이 파티의 주최자이자 강력한 권세를 가진 공작가의 공녀님인데.

심지어 이제는 유일한 후계자로서 공작이 될 사람이잖아?

“그럼 대체 무슨 일…….”

“그러게요.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공녀 언니가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문제가 생겼어요. 제 어머니가 여기에 오시는 길에 큰 사고가 났다고 해요.”

“……네?”

나는 그대로 멈칫했다.

공작 부인이라면, 오늘 이 자리를 위해 요양하던 곳에서 어렵게 모셨다는 분 아니야?

언니의 말에 따르면 이 자리에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었다.

“다행히 다치거나 부상을 입으신 건 아니라고 하셔요. 다만 어머니는, 하아. 내 어머니는 겁에 질리면 그 자리에서 절대 움직이지 않으시는 분이에요. 어머니가 정말 극도의 패닉 상태에 접어들었다면 진정시키고 데려올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에요, 영애.”

“그럼…….”

“네. 자리를 비워야 한다는 거죠.”

나도 모르게 문을 응시했다.

아래층에는 수많은 사람이 공녀 언니를 기다리고 있었다.

“공작 부인께서는 따로 부상은 없으시고 당장은 위험한 것도 아니신 거예요?”

“네, 일단은요. 다만 마차에서 절대 나오지 않으려 하시는 거죠.”

나는 숨을 삼켰다.

“혹시 정말 실례되는 말씀이지만 공작부인 없이 계승식을 치르는 건…….”

“아뇨, 어머니는 반드시 이 계승식에 계셔야 해요.”

“…….”

공녀 언니가 설명했다.

이 계승식에서는 반드시 가주의 인장을 상징하는 가주의 반지가 필요하다.

그건 보통 가주가 가지고 있지만, 가주가 지극히 사랑하는 공작 부인에게 주어서 현재 그 반지는 공작 부인이 가지고 있었다.

“만약 어머니가 가지고 계신 그 반지가 없다면 현 공작이 직접 나서서 작위를 계승해야 해요.”

“공작님은…….”

“방에 틀어박혀서 여전히 나오지 않고 계시죠.”

내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사실 어차피 이사야 후작과 결혼하라는 공작의 뜻을 거부하고 계승하기로 결심한 이상 문을 부수고 들어가서 공작을 협박이라도 할 순 없나.

그간 생존하기 위해 데굴데굴 구른 머리가 좀 험악한 대안을 내놓았지만 말로 꺼내지는 못했다.

이 언니에게 그럴 수 없는 이유가 있겠지. 그리고 쉬운 일도 아니었다.

‘하기야 그랬다가 이 사람이 다 모인 연회에서 문제가 커지면 가문 망신이겠지?’

만약 나라면 일단은 당장의 문제 해결에 최선을 다할 것 같지만 말이다.

“……방에 공작님이 계신 건 확실하죠?”

“네. 확실해요. 어머니가 제 시간에 오기만 하면 되셨는데…… 어쩐지 연회가 시작하고도 오지 않으시더라니. 아무튼 간에 영애, 나는 반지를 위해 직접 어머니를 모시러 갈 거예요.”

“네? 이 상황에서요?”

아니, 이 상황을 해결하려고 그러려는 건 둘째치고 그걸 왜 날 불러서 얘기하는 건데?

그 순간이었다.

[빠라빰빰! 축하합니다! 마침내 빙의자님의 소문이 이웃 나라 왕실까지 닿았군요! 훌륭한 악녀가 되었습니다 100 / 100]

[악명도를 모두 달성했습니다!]

[서브 퀘스트-‘내가 바로 악녀의 계승자!’ 가 완료되었어요!]

[퀘스트 보상이 주어집니다.]

[건강 수치가 오릅니다!]

[빙의자님의 매력이 오릅니다!]

푸르른 요정의 창이 연이어 떠올랐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정보들은 아니었다.

‘그래서 이 언니가 난 왜 불렀는데?!’

그러나 다시 언니의 얼굴을 가리면서까지 요정의 창이 새로 등장했다.

[보상으로 ‘히든 피스’가 주어집니다!]

[※히든 피스- ‘고생 끝에 주어진 방패’

그 어떤 공격이든 단 한 번 막을 수 있는 스킬! ‘퍼펙트 실드’를 드립니다. (단, 1회성입니다.)]

‘허어?’

당황하기도 잠시 요정의 말은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히든 퀘스트가 도착했습니다!]

[퀘스트(히든) - ‘진정한 이야기의 종결!’

※서브 퀘스트 ‘내가 바로 악녀의 계승자!’를 100% 완벽하게 달성 시 도전 가능한 퀘스트입니다]

심상치 않은 문구에 나는 잠시 읽는 걸 멈출까 싶었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공녀 언니가 이상하게 여기지 않게 최대한 빠르게 요정의 창을 읽었다.

[축하합니다! 희귀한 확률을 뚫고 완전한 악녀가 되는 데 성공했군요!

하지만 이런, 당신의 정체를 알아채면 망설임 없이 죽일 ‘세계의 오류’가 호시탐탐 목숨을 노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물 ‘로잘린 헤벤’을 도울 시 세계의 오류가 새로운 세 번째 이야기를 망칠 수 없습니다.

이 기회를 이용해 이야기의 결말을 지으세요!

내용: 1) 악녀로서 남자주인공과 서브 남자주인공을 이용해 인물 ‘로잘린 헤벤’을 대신해 30분 동안 연회의 주목을 이끌 것

2) 1시간 이내로 결말을 볼 것

성공 시: 새로운 세 번째 이야기에서 ‘세계의 오류’를 쫓아낼 수 있다, 생존, 새로운 세 번째 이야기의 빠른 결말

실패 시: 사망, 영혼의 소멸]

“…….”

난 입을 뻐끔거렸다.

‘정리하자면, 이건가?’

‘세계의 오류’는 반드시 새로운 주인공의 목숨을 노릴 거다.

그 새로운 주인공은 나다. 주인공인 동안 언젠가는 나를 노릴 테니까,

히든 퀘스트로 이야기를 빠르게 끝내게 해주겠다?

‘현재 메인 퀘스트의 지령은 어디까지 왔더라.’

이번 세 번째 이야기 메인 퀘스트는 이야기의 서사 구조를 따라가고 있었다.

발데르가 남주인 것을 알게 되는 첫 번째 지령 ‘발단’.

남자주인공에게 첫눈에 반해 애정을 말하게 하는 두 번째 지령 ‘전개’.

서브 남주를 선택하는 세 번째 지령 ‘위기’.

그렇다면 보편적으로 생각해서 남은 지령은 총 ‘절정’ , ‘결말’이다.

[본 히든 퀘스트는 거절이 가능합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Y/N]

앞선 세 개의 지령들은 하나같이 쉽지만은 않았다. 나는 요정에게 내 감정까지 내어주며 내 것이 아닌 감정을 참아내야 했다.

내가 내가 아니게 되는 기분은 아무리 생존을 위해 견뎌온 나라도 쉽게 참아 넘길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지령은 얼마나 더 고약할까.’

그런데 이런 메인 퀘스트를 더 빨리 깰 수 있게 만들어주다니?

‘해야지.’

나는 속으로 수락한 뒤, 고개를 돌렸다.

요정의 창을 무수히 보아온 탓에 실제로 시간은 얼마 흐르지 않았다.

“영애? 왜 갑자기 멍해져서는, 무슨 일 있어요?”

“아뇨, 죄송해요. 너무 놀라서……. 그런데 공녀님, 그렇다면 이 자리에 왜 저를 부르신 거죠?”

“그건.”

공녀 언니가 잠시 망설였다. 이 언니와는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표정이었다.

“하아, 솔직하게 말할게요. 이러려고 당신을 가르친 건 절대 아니지만…… 당신이 도와주면 좋겠어요.”

“제가 말인가요? 어떻게 말씀이시죠?”

“네, 내가 없는 사이에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줄 수 있겠어요?”

공녀 언니가 마치 짜 맞춘 것처럼 히든 퀘스트와 같은 내용을 읊었다.

이건 정해져 있던 내용일까?

아니면 설마 공녀 언니도 요정에게 조종당하고 있는 건가?

하지만 지금 고민해봐야 소용없다.

“혹시 제 소문을 이용해 저 밖의 사람들에게 음, 일종의 쇼를 보여주고 있어 달라, 그런 말씀이신가요? 만약 한다면…… 공녀님이 등장하지 않더라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아주 파격적으로 뭔가 일을 벌여 달라 말씀하신 거겠네요.”

“……그렇게 심하게 말하진 않은 것 같은데. 네, 맞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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