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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219화 (219/281)

◈219화. 3. 대마법사와 악녀 메이커 (58)

“제가 시간을 얼마나 끌면 되나요?”

“…….”

잘만 설명하던 공녀 언니가 입을 다물었다.

이내 표독스럽던 얼굴에 혼란이 스쳤다.

“……이동 마법만 있다면 30분, 30분이면 돼요. 하지만 당장 고위 마법사를 어디서.”

“그렇군요, 알겠어요. 이동 마법은 제가 대마법사님께 부탁드려보죠.”

공녀 언니의 눈이 커졌다.

“허, 해주겠다고요? 아무런 대가 없이?”

“네.”

“왜요?”

“외람되지만 그건 제가 묻고 싶은 말이에요. 공녀님.”

나도 알고 싶다.

“왜 하필 저를 불러 부탁하시는 거죠?”

공녀에게는 수많은 사람이 있다.

비록 나보다 먼저 악녀로서 악명을 떨쳤다고는 하나, 그녀는 유능했고, 따르는 사람이 많다.

왜 하필 난데?

“……앞으로 주인이 될 나는 이 자리에서만큼은 내 허물을 보일 수 없어요.”

“저는 봐도 괜찮다는 건가요?”

그러자 공녀 언니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이내 자신의 얼굴을 감싸 쥐며 작게 중얼거렸다.

“……당신이라면, 내, 약한 모습을 보아도. 욕하지 않을 것 같으니까요.”

“…….”

“몰라요. 난 당신이라면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왜일까, 추수제 연회에서 수많은 영애들에게 우아하게 둘러싸여 있던 공녀 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지금부터 들을 말이 참으로 우습겠지만, 이 대단한 나라도 책에서만 배운 개념이 단 하나 있어요. 바로 ‘친구’예요. 당신은 친구로서 나를 도와줄 수 있나요?”

그럼 이 언니는 그 많은 사람 중에 마음 나눌 사람 하나 없었던 걸까. 어째서인지 이 늘씬한 공녀 언니 위로 래빗의 모습이 겹쳤다.

……으으, 왜 나는 고독한 사람에게 약해서는.

“네, 도와드릴게요.”

어차피 이 언니의 부탁이 아니어도 하려고 했던 일이지만, 이런 이야기를 듣고 나니 더욱 더 열심히 할 수밖에 없게 됐다.

“나쁘지 않네요, 곧 제국의 제일 가는 권력자 중 하나가 될 분께서 저를 친구로 여겨주신다면요.”

“……당신이 권력을 좋아하는 줄은 몰랐네요.”

내 산뜻한 농담에 언니는 잠시 놀란 듯 눈을 깜빡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하필 래빗을 겹쳐 보았기 때문일까. 이 모습이 어쩐지 귀엽다는 생각을 하면서 씩 웃었다.

“그럼요, 악녀는 돈과 권력과 남자를 사랑한다. 그리고 동시에 모든 것을 손에 넣으려 한다. 이건 제 스승님이 알려주신 거잖아요?”

“……나 참, 삶에 미련이라고는 없는 얼굴을 하고서는.”

공녀 언니가 나처럼 픽 웃고는 이내 내가 알던 얼굴로 돌아왔다.

“부탁해요.”

하지만 진지한 표정으로 내 손을 꾹 잡으며 부탁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하지만 지시는 내려주고 가세요, 공녀님. 솔직하게 말하자면 알겠다고 하긴 했는데 정확히 뭘 해야 하는지 모르겠거든요?”

“정말 모르겠어요?”

“…….”

“끙, 알 것 같긴 한데…… 내키진 않네요.”

히든 퀘스트에서 시킨 내용을 보긴 했지만, 정말 내키진 않았다.

내가 끙끙대면서 겨우 대답하자 공녀 언니는 소리 내서 웃기까지 했다.

“방법 좀 알려주세요.”

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덥썩 내 손목을 잡는 것이 아닌가.

“공녀님?”

“일단, 의상부터 이야기해볼까요?”

“……네?”

잠시 뒤, 나는 문을 열었다.

달칵, 열린 문 뒤로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도 삼각형 대형으로 서 있는 세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싸운 건 아닌지 서로 간의 거리는 꽤 멀었다.

세 남자는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나를 보았다.

“저기…… 세 분.”

나는 이 강렬한 시선들 속에서 어색하게 손을 흔들며 웃었다.

“저 좀 도와주실래요?”

* * *

공녀 언니가 떠났다.

나는 창문 밖, 어둠 속에서 발데르의 마법으로 은밀하게 사라지는 마차를 보며 후 숨을 내쉬었다.

‘이제부터 시작이구나.’

참으로 놀랍게도 공녀 언니는 정말로 공작 부인과 관련한 사정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다만 최측근에게는 자신의 등장이 조금 늦어진다는 언질 정도는 해두었다.

‘끙, 황태자한테는 말해도 좋지 않았나. 아니다, 나라도 말하기 싫겠다.’

가짜 연인 행세를 하는 중인 황태자에게는 도움을 요청해도 좋지 않았을까 싶긴 했다.

어차피 서로 돕기 위해서 맺은 협상 관계고 이것만 끝나면 쿨하게 헤어질 텐데, 괜찮지 않았을까 싶으면서도.

한편으로 황태자의 능글능글 뺀질뺀질한 얼굴을 떠올리니 하기 싫긴 하겠단 생각이 들었다.

다행스럽게도 공녀 언니는 누구보다 빠르게 공작 부인이 있는 곳으로 갈 수 있게 됐다.

‘설마하니 본인이 직접 마법도 걸어주고, 자기 휘하의 마법사까지 붙여줄 줄은 몰랐지만.’

흘끗 뒤를 돌아보려다가 마음을 다잡았다.

“후…….”

잘하자, 할 수 있다.

나는 몸에 감고 있는 털로 된 숄을 꾹 잡았다가 놓았다.

현재 내가 온몸에 걸치고 있는 것은 모두 다 공녀 언니의 것이었다.

“고, 고, 공녀님!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해요?!”

“어머나, 할 거면 확실히 할 거 아니었어요?”

“그건, 그, 그렇지만…….”

덕분에 나는 이곳에 도착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서 있었다.

이게 정말 잘 하는 일인지 몰라…….

시간이 촉박하다면서 나를 꾸미는 일만은 몹시 즐거워했던 공녀 언니의 모습을 떠올리며 나는 걸음을 옮겼다.

내가 있던 곳은 2층으로, 1층 연회장과 이어진 공간이었다.

1층 연회장으로 내려가는 길은 총 세 곳인데, 두 곳은 양 끝에 있는 계단으로 일반 손님들이 이용하는 곳이고.

나머지 하나는 오직 허락된 자들, 혹은 이 저택의 주인만이 사용할 수 있는 중앙 계단이었다.

중앙 계단에 서 있던 기사가 나를 보고 흠칫 놀라더니 이내 고개를 숙였다.

“공녀님께 이야기 전달받았습니다.”

나는 부채를 펼친 채로, 부채로 슬쩍 얼굴을 가린 채 보일 듯 말 듯 끄덕였다. 이내 부채를 슬그머니 내리면서 싱긋 눈을 휘었다.

“고생 많아요, 힘내요.”

시험 삼아 공녀 언니에게 배운 대로 웃어봤는데, 이게 웬걸? 눈이 마주친 기사가 움찔하더니 그의 뺨이 발그레해졌다. 내가 더 놀랐다.

그러나 기사는 왜인지 내 뒤쪽을 보는가 싶더니 화들짝 놀라 자세를 바로 했다. 그러고는 계단 아래쪽을 정중히 가리켰다.

나는 하하 속으로 어색한 웃음을 참으며 내려갔다. 내 뒤에서 무엇을 본 건지 대충 예상이 가니까.

나는 곧 표정을 가다듬었다.

‘자, 이제 시작이란 말이지.’

악명도 100, 요정의 창이 나를 진정한 악녀로 인정했다.

달리 말해 이 제국 수도에서 내 악명이 너무나 유명해져 나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는 소리였다.

또각또각, 무슨 재질인지 모를 새하얀 계단 위로 구두 소리가 우아하고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이제 성큼 다가온 이 세 번째 이야기의 마지막을 맞이할 때였다.

아니, 히든 퀘스트라는 엄청난 기회로 빠른 결말을 맞이할 수 있게 된 이상 반드시 성공하겠다. 어차피 이렇게 되나 저렇게 되나 실패는 죽음뿐.

계단으로 내려가는 내 모습에 사람들의 시선이 한데 모였다.

조금 전 래빗이랑 이곳에 입장해 파티 한구석에 있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압도적인 인원이 바라본다.

압력이 느껴졌다.

“잊지 말아요, 무엇을 하든 당당하게.”

나는 나를 응시하는 사람들을 보며 빙긋 미소했다.

부채를 접어 입술에 가져다 대고 다른 한 손은 느릿하게 계단 손잡이를 쓸며 계단을 내려왔다.

어느새 내 뒤로 뚜벅뚜벅 날 따라잡은 발소리가 들렸다.

그 발소리는 나를 앞질러 나가는 걸로 모자라 나보다 먼저 계단을 내려오더니, 내게 손을 내밀었다.

한 손은 등 뒤에, 다른 한 손은 내게 우아하게 내민 남자는 다름 아닌 발데르였다.

나는 속으로 실소를 흘렸다.

‘이 역할을 하려고 세 명이서 싸웠지.’

발데르와 휴고, 라이칸이 눈싸움하던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래서 어떻게 고른 거냐고?

가위바위보 시켰다.

마법금지, 검기 사용 금지, 권위 내세우기 금지.

그렇게 승자가 된 게 발데르였다.

남은 두 사람은 아마 먼저 내려와 이 공간 어디에 있을 거다.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하기 위해서 말이다.

나는 마치 다정한 연인인 양 내게 손을 뻗은 남자를 보다가 손을 내밀었다.

발데르는 이 순간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가 된 것처럼 그 모습을 훌륭하게 연기해냈다.

“내 달링.”

엄마야. 나는 눈을 크게 깜빡였다.

“당신의 이름과 비슷한 하나뿐인 호칭을 허락해줘서 고마워요.”

“…….”

“아, 이게 아닌가? 자기야?”

하마터면 할 말을 잃을 뻔했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분명 애칭을 부르자고 합의를 보기는 했는데, 우리가 합의한 이름은 ‘허니’ 아니었나? 거기서 거기이긴 한데.

그리고 대마법사님의 호칭은 우리를 지켜보던 이들의 흥분과 관심, 그리고 열렬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성공했다.

허어, 나는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소문과 스캔들을 좋아하는 건 이전 세계나 여기나 다르지 않다니까…….

우리의 첫 목적은 최대한 크게 관심을 이끄는 것. 지금 이제 막 첫 단추를 끼우는 데 성공한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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