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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220화 (220/281)

◈220화. 3. 대마법사와 악녀 메이커 (59)

말이야 이렇게 하지만 현재 내 속은 속이 아니었다.

겉으로는 웃고 있는 한편 눈으로는 티가 나지 않게 사람들 반응을 살펴보고 있으니까.

사실 전생에서부터 지금까지 나는 사람의 시선을 즐기는 성향은 절대 아니었다.

고로, 지금 이 역할은 단언컨대 내가 이 세계에서 깨어나 맡았던 ‘역할’ 중 그 어떤 것보다도 나와 맞지 않는 옷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어.

‘주사위는 던져졌어.’

나는 싱긋 웃으며, 발데르 손 위로 내 손을 올렸다.

평소 내 모습이라면 감히 이 손을 제가 잡아도 될깝쇼, 하는 경건한 태도는 어디에도 없이 당연하다는 듯 감흥 없이 걸었다.

‘후, 옷이 정말 편하지는 않다.’

현재 내가 걸친 의상으로 말할 것 같으면, 한마디로 누가 내게 돈을 준다고 하더라도 입지 않을 스타일이었다.

어깨는 물론 과감하게 가슴골까지 살짝 드러낸 오프 숄더 드레스. 그렇다고 노출 부위로만 시선이 가지는 않게끔 잘 만든 고급스러운 디자인의 드레스였는데, 동시에 등이 아주 시원하게 파여 있었다. 앞을 이렇게 가려놓고 뒤를 뚫어버리면 무슨 소용이지? 싶은 옷이랄까.

아마 내가 지금 팔에 걸친 눈토끼 마수의 털인지 모를 이 털 모피 숄을 벗으면 등이 아주 시원해질 거란 건 알고 있다.

“기왕 ‘악녀’가 될 거라면 사람들이 원하는 이미지에 맞춰 등장하는 것이 좋겠죠? 시선몰이. 의상이 얼마나 중요한데요.”

후후후, 예쁜 거 입자며 웃는 공녀 언니의 웃음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선명했다.

그랬다, 내 취향이라고는 단 1퍼센트도 반영되지 않은 이 붉은 드레스는 공녀 언니의 것이었다.

그 짧은 시간 내에 어떻게 치수까지 맞출 수 있었느냐. 마법이란 치트키가 있으니 어떻게든 되긴 되더라.

‘볼수록 마법이란 거 되게 편해 보인단 말이지. 못하는 게 없고.’

어쨌거나 우리의 등장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발데르의 손을 잡고 걷는 내내 나를 향해 짜릿할 정도로 따라붙는 시선들을 느꼈으니까.

사람들은 현 제국 최고의 뜨거운 감자를 두고, 주인의 부재도 잊을 만큼 내게 관심이 쏠렸다.

자, 이걸 이제 어떻게 요리를 하느냐 이건데.

“흐응? 흥미롭기는 한데, 정말 그렇게 해도 괜찮겠어요, 영애?”

부디 내 계획과 시나리오가 잘 맞아 떨어져야 할 텐데.

“무슨 생각 해요, 달링?”

“…….”

오, 상념을 깨우치는 데는 아주 제격인데.

나는 발데르의 호칭 한 번에 대번에 잡생각을 날려버렸다.

이 남자, 뭘 잘못 먹은 것 같진 않은데.

얼굴이 작정하고 풀어진 낯이었다. 헤실헤실 웃는 얼굴이 참 맑았다.

……이 남자가 이토록 눈웃음을 잘 짓는 줄은 몰랐지.

아니, 눈웃음이야 여러 번 봤지만 정말이지 컨셉에 이렇게까지 잘 맞는 미소를 지어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마법이 있으면 편하겠다는 생각?”

내가 공녀 언니를 흉내 내듯 나른하게 대답하자, 주변에 있던 남자가 흠칫했다. 시선을 마주하자 그 남자의 얼굴이 주책없이 발그레 붉어졌다.

‘오, 공녀 언니가 공들여 만들어준 화장이 잘 먹히는가 본데?’

나는 피식 눈을 휘어주고는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내 주변에 접시들이 두둥실 떠올라있었다. 발데르가 가져온 듯 그의 주황빛 마력이 얼핏 보였다.

숨기려는 생각도 없는 듯 그가 내 앞에 샴페인 잔을 내밀었다.

“마법은 편리하죠.”

“그건 알아.”

내 대꾸는 단조롭고 성의 없었다. 게다가 반말. 내 대답에 숨죽이는 사람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그래, 느껴라. 느껴.’

일부러 가장 중심부로 들어온 거니까.

감히 한낱 백작가 영애 주제에 제국의 고귀한 대마법사를 성의 없고 함부로 대하는 모습이라니.

‘여기서 발데르가 안달을 좀 내줘야 하는데…….’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마법은 편리하고, 나는 더욱 편리할 거예요. 달링.”

“…….”

“그러니 절 가지면 다 가진 거나 마찬가지인데.”

발데르가 내 손을 잡고 있던 손을 살짝 힘주어 잡더니, 이내 손등에 입술을 꾹 눌러 붙였다.

“나 데려갈래요?”

‘꺄아!’ 주변에서 작은 탄성을 들은 것 같기도 했다.

……엄청 잘 하시네.

나는 발데르 걱정은 하는 게 아니란 교훈을 얻었다.

오히려 내가 밀리지 않게 속으로 남몰래 숨을 삼켜야 하는 심정이었다.

“당신을 가져가야 한다구요?”

“이런, 말은 편히 해주기로 했으면서?”

“불편하면 다시 존대로 돌아간다는 말도 기억하죠?”

나는 부채로 슬그머니 입술을 가리면서 눈을 가늘게 휘었다.

“딱히 당신이 사라져도 미련 없는데?”

그 순간 잠깐이지만 발데르의 눈이 낮게 가라앉았다.

잠깐, 잠깐. 당신 지금 한순간 진심이었지?

왜 진심으로 화를 내는 건데?!

이 순간에 내가 아주 적절하게 연기를 할 수 있는 건 어떻게든 이 메인 퀘스트를 오늘 내로 끝내겠다는 초인적인 의지 덕분이었다.

게다가 한 가지 더 보조를 받은 게 있다면…….

[스킬 ‘사기꾼의 혀(lv.3)’가 활성화 중입니다!]

[일반 스킬- 사기꾼의 혀(lv.3)

등급: 에픽

사용자의 긴장을 완화시키고, 떨림을 지워주며 말솜씨를 평소의 1.5배 향상시켜 준다.

어떤 상황에서도 입을 멈추지 않을 수 있다. 설득에 큰 도움이 될지도?

사용자의 피나는 노력으로 등급이 상승되었다.]

놀랍게도 나조차 잠시 잊고 있던 스킬이었다.

폭군 앞에서라거나, 북부 영지의 힘을 앞세우던 몇몇 이들 앞에서 열심히 입을 터는 데 도움을 주었던 스킬.

설마하니 지금 상황에서도 도움이 될 줄은 몰랐지.

덕분에 평소와 다른 대사를 읊는 나임에도 목소리나 행동이 내 것처럼 자연스럽기 그지없었다.

‘큽, 저기 래빗이 있는데…….’

심지어 나를 가장 잘 알 게 분명한 래빗은 눈을 깜빡이면서 나를 보고 있었다.

눈을 비비는 표정이, 쟤가 내가 아는 걔가 맞나 하는 표정이었다.

그러고 나서 갑자기 들고 있던 과자를 열심히 먹기 시작했는데, 하필 하얀 과자를 열심히 먹고 있어서 마치 팝콘을 먹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부채로 입을 가린 그대로 발데르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화난 거 아니죠?”

“화라니요?”

발데르가 빙긋 웃었다.

난 속삭여서 물었건만 발데르는 주변 들으란 듯이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다.

“나는 내 눈에 예쁜 사람한테는 화낼 줄 모르는데.”

“……흥, 당신 눈에 예쁜 사람이 한 백 명쯤 있는 건 아니고?”

“그건 섭섭한데.”

발데르가 내 손을 잡고 있는 손을 들어 올리더니 그대로 내 손목에 눈을 감은 채 입을 맞췄다.

연기 중이라는 것도 잊고 잠시 놀랄 뻔했다.

“예쁘다고 생각한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에요. 응?”

“…….”

나는 애써 손을 빼냈다. 그러고는 감흥 없다는 표정을 유지했다.

“바람둥이 같아.”

이봐요, 이봐요. 대마법사님. 우리 이런 것까지 하기로 한 적은 없잖아?

당신, 자극이 너무 강하다고. 저기요?

그나마 긴장을 완화해준다는 ‘사기꾼의 혀’가 레벨도 오르고 더욱 강해진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지금 심장이 지진난 것처럼 요동치고 있으니까.

‘……이 퀘스트 이렇게나 난이도가 높았어?’

나는 언제까지 이 진땀을 참을 수 있을까 고민하며 숄을 고쳐 드는 척했다. 살랑 머리카락이 흔들린 탓에 등이 잠시 시원해졌다.

왜일까, 내 등 뒤에서 남성들의 탄성이 흘러나왔고 동시에 마주하고 있던 발데르의 시선이 뾰족해졌다.

내가 돌아보기도 전에, 등 뒤에서 히익 하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는데…….

발데르가 나를 잡아당겨 돌아보지 못하게 했다.

“먹고 싶은 건 없어요?”

“……없는데.”

“이런, 오늘 이 자리가 재미가 없나 봐요.”

발데르는 이제야 극본대로 해주겠다는 듯 우리가 사전에 협의했던 대사를 쳐주었다.

어쩐지 그 모습이 인심 쓴다는 것처럼 보여 나는 진심으로 찡그렸다.

아니, 이 인간이. 애드리브 좀 작작 치라고. 나 정도나 되니까 임기응변으로 반응하는 거지…….

덕분에 내 표정으로는 아마 진심이 포함된 짜증이 어렸을 터였다.

“맞아. 재미가 있다고 속삭인 건 발데르, 당신이었지. 아니, 다른 남자였나?”

“이런, 내 이름을 허락했지만 다른 남자와 같이 불리고 싶은 건 아니었는데.”

“…….”

“재밌게 해줘요?”

나는 부채를 입에 가져다 댄 채로 눈을 굴렸다. 발데르를 향했던 시선이 사람들을 향했다.

이 자리는 황실 연회처럼 춤을 추는 자리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어느새 내가 있는 중앙으로 몰려왔거나 몰리지 않더라도 관심만은 이곳에 둔 형태였다.

“해줘봐.”

나는 전생의 탑 배우, 혹은 할리우드 셀럽들이 과연 이런 기분이었을까 느끼며, 나른하게 대답했다. 슬슬 이 자리가 질린다는 듯이.

“재미없는 건 싫어요. 오늘 이 자리가 당신과 나의 마지막이 아니게 만들어줘야 할 거예요.”

네가 애드리브로 대응하면 나도 애드리브다.

이런 생각으로 툭 한마디를 던졌다.

“재미없으면 오늘이 당신과 나의 마지막일 테니까.”

미안하지만 반쯤은 진심. 오늘이 정말로 당신과의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하고 있다.

메인 퀘스트가 완료되면, 당신을 향한 이 두근거림도 멈추겠지.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닌 설렘이었으니까.

물론 한 번쯤 나를 여러 번 당황하게 만든 이 남자의 당황한 모습을 보고 싶다는 짓궂은 마음도 조금은 있었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나는 다음 순간 깨달았다.

……지나쳤던 걸까?

나를 바라보던 얼굴로 황홀하리만치 부드럽고 나른한 웃음이 깃들었다.

그러나 집요한 그 눈동자를 보며 나는 숨을 잠시 참았다.

[현재 세 번째 이야기 ‘남자주인공’의 집착 지수는 다음과 같습니다. 100/100]

[저런, 집착 지수 한계치를 달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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