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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224화 (224/281)

◈224화. 3. 대마법사와 악녀 메이커 (63)

나는 티 나지 않게 속으로 숨을 꿀꺽 삼켰다.

시청률 50%를 넘은 대박 드라마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나를 향해 쳐다보는 모든 사람을 향해 외치고 싶었다.

‘선택은 무슨 선택이냐고오!’

그랬다. 우리의 연극에 결말은 없었다.

정확히는 나는 아무도 선택하지 않고, 퇴장할 예정이었고 사람들에게 궁금증과 갈증만 남기고서 극본은 끝이 난다……. 이거였는데!

‘망해도 너무 망해버렸잖아!’

발데르의 애드리브 부분부터 불안하다 싶었지만 설마하니 이렇게 아주 틀어져 버릴 줄은 몰랐다.

따뜻한 토끼 마수의 털이 등을 포근하게 감싸고 있건만, 그 아래로 싸늘함이 느껴지고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아마 이 털을 들추면 흠뻑 젖어있을지도 모른단 착각마저 일었다.

어떡해? 어쩌냐고. 여기서 무슨 말을 하냔 말이다.

그래, 극본이다.

다만 극본이라고 한 사람을 대충 선택했을 때, 지금 이 순간 연기 중이란 자각은 있는지 모를 나머지 두 사람이 반발하면?

우리는 시간을 벌러 온 거지 깽판을 치려 나선 게 아니다.

그렇다고 선택하지 않으면? 선택하지 않고 이 상황을 빠져나올 방법을 모르겠다.

‘이건 선택을 해도 문제, 선택을 안 해도 문제…….’

최악의 결말은 공녀 언니가 오기 전에 시간 끄는 것도 실패하고, 이 연회장도 엉망으로 만드는 일이다. 그것만은 피해야 해.

나도 모르게 셋 중 한 남자를 보았다. 왜 보았는지 모르겠다. 초조해진 순간 나도 모르게 쳐다보았으니까. 눈이 마주친 남자가 잠시 놀라는 것 같았다.

이도 잠시 내 입술이 천천히 떨어졌다.

“나 참 선택이라니……. 이런 유치한 짓을 왜 하는지 모르겠네.”

나는 손으로 느릿하게 입술을 쓸어내렸다. 내 시선이 세 남자를 차례차례 훑었다.

발데르, 휴고, 라이칸…….

마지막으로 라이칸을 보았을 때, 그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남자가 침을 꿀꺽 삼키는 것이 보였다.

“내가 선택하면 나머지는 뭐 울음바다라도 만드는 건가요? 퍽이나 재미있겠네요.”

“…….”

어떻게든 결정을 피하려 막 던져보았건만.

‘망할! 저기요, 관중님들? 다들 기대를 놓질 않는 건데!’

여기서 끝내면 안 되냐고요. 도무지 나를 보는 관중의 시선이 떨어지질 않는다.

내 반응에도 모두가 내 결정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사실 여기에 더해 내 결정을 가장 기다리는 건…….

운명의 여신에 간택이라도 받으려는 듯한 눈빛으로 나만 뚫어져라 쳐다보는 세 남자.

이 세 사람이 제일 간절해 보였다.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돼라! 내가 입술을 움직여 누군가의 이름을 담으려는 순간이었다.

[축하합니다!]

[퀘스트(히든) - ‘진정한 이야기의 종결!’ 의 첫 번째 완수조건을 달성하셨습니다!]

띠리링, 익숙한 소리.

내용을 읽는 순간 그 어떤 때든 불쾌하게만 느껴졌던 이 푸른 창이 처음으로 반갑게 느껴졌다.

“이런, 이런. 늦어서 미안합니다. 여러분?”

여성치고는 낮으면서도 간드러진 목소리를 듣는 순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공녀 언니!’

고개를 돌리면, 계단 위쪽에 당당하게 선 공녀 언니가 보였다.

시간 내에 도착했구나!

마침내 시간이 모두 지나, 공녀 언니가 도착한 것이다.

나는 빠르게 부채를 펼쳐 얼굴을 가렸다. 이러지 않으면 나를 채우는 기쁨에 바보같이 헤실헤실 풀어진 낯을 보여줄 것 같았으니까.

속으로는 이미 수도꼭지처럼 눈물을 펑펑 솟는 중이었다.

세상에, 언니, 왜 이렇게 늦으셨어요. 아니, 시간 내에 온 건가?

‘어쨌든 와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정말 결정적인 순간에 도착하지 않았던가.

거리가 꽤 떨어졌지만, 공녀 언니가 나를 보는 것이 느껴졌다. 분명 우리의 눈이 마주쳤다.

“어머나, 그간 제가 몹시도 아끼는 동생이…… 여러분을 즐겁게 한 모양이로군요?”

공녀 언니의 눈이 예쁘게 휘어지는 것 또한 똑똑히 보였다.

그 시선 속에 담긴 고마움을 느꼈다.

……아니, 제 시간에 나타나 줘서 제가 더 고마워요. 공녀님.

어느새 계단 앞에는 황태자가 서 있었다. 세상에, 저 양반은 언제 저 자리로 간 거야? 나는 기쁜 와중에도 황당함을 느꼈다.

‘설마, 모두가 내게 집중하던 순간에도 공녀 언니가 오는 걸 보고 저리로 간 거야?’

그럼 내겐 집중하지 않았단 말인데…….

‘알고 보면 저 황태자님 정말로 공녀 언니한테 관심 있는 거 아니야?’

한 고비 넘기자 전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이 느긋하게 떠올랐다.

사람들은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면서도 하나둘씩 공녀 언니에게 집중했다. 나는 내게서 옮겨가는 대다수의 시선을 느끼며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사람들은 그제야 자신들이 이곳에 온 목적이 생각난 모양이었다.

‘그래, 드라마도 좋지만 오늘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 저 공녀 언니지.’

공녀 언니는 아까 연회장에서 보았던 것보다 훨씬 화려한 옷을 걸치고 있었다.

망토 또한 매우 화려했는데, 반짝거리는 보석이 샹들리에 빛을 반사하면서 고급진 사치미를 내뿜는 느낌이었다.

아마도 저렇게 화려한 옷을 걸친 것 또한 의도한 바가 아니었을까.

나는 화려하고도 멋진 공녀 언니의 자태를 보며 안심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힘이 빠진 탓일까. 내 몸이 그대로 휘청거렸다.

자연스럽게 가장 가까이 있던 남자의 팔을 붙들었다.

“미…….”

미안하다고 말하려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아, 맞다. 나 아직 악녀 모드로 꾸미고 있지.

내가 팔을 붙잡은 사람은 라이칸이었다.

나는 그에게 예쁘게 미소지어주었다. 사과는 나중에 할게요, 황자님?

“…….”

라이칸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나는 속으로 어색한 미소를 보내며 슬쩍 그의 팔에서 손을 떼어내려 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조심스럽게 라이칸이 내 손을 잡았다.

“……떨어지지 마라.”

공녀 언니가 이 연회장의 주인이자 흡사 왕처럼 화려한 차림으로 나타난 탓에, 대부분의 시선과 관심이 저쪽으로 몰렸다.

그럼에도 아직 나를 향한 관심이 남아 있었다.

저기요, 저기요? 더는 불씨를 주시면 안 되는데요…….

다행스럽게도 내가 더 난감해지기 전에 구원자가 나타났다.

“그 손 나라.”

아장아장 걸어온 누군가가 내 옷자락을 붙잡았다.

“재미눈 있었댜만 달린운 오눌 나랑 놀려고 온고다.”

래빗이었다. 래빗은 내 옷자락을 잡고서 그대로 고개를 들더니 방긋 웃었다.

“그로치?”

나는 그 모습을 보고서 감동받았다.

우리 아기 황녀님……! 래빗님, 사랑합니다. 영원히 따를게요. 충성충성!

래빗 덕분에 나는 라이칸의 손에서 자연스럽게 빠져나왔다. 정확히는 이 남자가 얼른 놓아준 거지만.

나는 지금까지 보인 모습과 너무 달라 뵈지 않게 빙긋 미소하며 래빗의 조그만 손을 살짝 잡았다.

“그럼요. 물론이죠. 황녀님.”

내가 기사를 흉내 내듯이 래빗의 손등에 입 맞추는 시늉을 했더니, 래빗이 우스운지 소리 내어 웃었다.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맑은 웃음이었다.

이렇게 느낀 건 나뿐이 아니었는지 근처에 있던 나를 보던 소수의 사람들마저 미소짓는 것이 느껴졌다.

“참고로 말해 두눈데, 우리 달린이랑 겨론하눈 사람운 내 허략부터 받아야 할 고다.”

래빗이 나를 붙잡고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나는 부채로 슬쩍 입을 가리고 살짝 끄덕였다.

속으로는 목이 부서져라 끄덕이는 중이었다.

암, 암요. 우리 황녀님 말은 모두 옳아요. 그럼요.

“그럼요. 저는 우리 황녀님 허락이 없으면 결혼도 하지 않으려고요.”

“봤누냐.”

래빗이 세 남자를 한 번씩 보는 것 같았다.

래빗의 시선을 받은 남자들은 제각기 미묘한 표정들이었다.

개중에서 휴고가 슬쩍 손을 들어 올렸다.

“……황녀님, 저는 이전에 한 번 인정을 받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조심스러운 휴고의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휴고가 인정을 받았다고? 언제? 언제요?

래빗이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다시 받아라.”

“…….”

휴고가 시무룩해졌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라이칸이 자신의 뺨을 매만지나 싶더니, 이내 슬그머니 살짝 손을 들어올렸다.

“……나는 네 오빠다만은.”

“가족이라고 봐쥬지 않눈다. 우리 달린이가 더 조우니까!”

“…….”

나는 라이칸이 충격을 받을 거라 생각했는데, 슬쩍 곁눈질하니 의외로 상처받은 기색은 아니었다.

오히려 당연한 이야기를 들은 듯한 태도라 좀 머쓱해졌다.

‘……이러니 황제 폐하가 맨날 딸 뺏어간 사위 보듯이 나를 보는 걸까.’

이제는 그만 퇴장하고 싶은데 말이지.

그 사이 발데르는 래빗 앞에 쪼그리더니, 싱글싱글 여우처럼 느껴지는 보드라운 웃음을 지었다. 그대로 래빗의 귓가에 무언가 속삭이는 것 같았다.

소리가 너무 작아서 내게는 들리지 않았다.

래빗이 바로 거부하지 않고 들어주는 걸 보면 뭔가 나름의 혹할 말을 하는 것 같은데…….

대체 무슨 소릴 하려고?

나는 두 사람을 보다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문득 저 멀리서 여길 지켜보고 있었던 건지, 황태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 남자는 계속 이쪽을 보고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배를 잡고 폭소 중이었으니까.

‘……저 인간은 도움이 안 되네.’

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시선을 옮겼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공녀 언니의 계승식은 문제없이 치러질 모양이었다.

어느새 사람들이 한쪽에 마련된 단상을 쳐다보고 있었고, 언니는 그 위에서 손님과 가신들의 인사를 받고 있는 듯했다.

그러다 시종이 쿠션 위에 얹어진 작은 상자를 들고 걸어왔다.

나는 저 상자를 보고서야, 저게 바로 언니가 반드시 나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임을 알아차렸다.

‘공작 부인은 괜찮으신가.’

계승식은 원활히 잘 진행되고 있는 듯하고, 나는 내 역할을 마쳤다.

그럼 이제…….

남은 건 이 새로운 세 번째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것뿐인가.

조금 느긋해진 기분으로다가 연회장 곳곳을 둘러보다가 시선을 멈췄다.

‘저 남자…….’

이사야 후작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회장 뒤쪽에서 가만히 어느 한 곳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시선을 좇으면 공녀 언니가 있는 쪽이었다.

왜일까, 뒷목이 오싹해졌다.

그저 저 남자가 공녀 언니를 빤히 보고 있는 것뿐인데. 불길함이 느껴졌다.

게다가 무시 못할 정도로 크고 살벌하게 느껴지는 불길함이었다.

‘저 남자의 정체를 이제 알기 때문인가?’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이사야 후작이 돌연 등을 돌리더니 어디론가 성큼 걸어갔다.

나에게 다가오는 것도 아니건만, 섬뜩한 기분이 온몸을 지배했다.

‘뭐야? 뭐야, 이 불안감은…….’

어째서일까. 저 남자를 저대로 보내면 안 될 것 같았다.

띠리링.

[긴급 퀘스트가 발생합니다!]

[퀘스트(긴급) - ‘움직이세요!’

‘세계의 오류’는 이 이야기를 파멸시키고자 합니다.

당장 움직이지 않으면 누군가 죽거나 이야기가 사라지고 맙니다!

내용: ‘세계의 오류’를 저지하세요. 실패 시 사망.

보상: 히든 퀘스트 지속]

몹시도 다급해 보이는 창이었다. 글자가 삐뚤어진 것도 보일 만큼.

게다가 붉게 떠오른 창. 단 한 번도 본적 없는 ‘긴급 퀘스트’라는 말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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