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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225화 (225/281)

◈225화. 3. 대마법사와 악녀 메이커 (64)

나는 지체하지 않고 드레스를 붙잡았다.

성큼 걸어가려는데, 래빗이 내 드레스를 붙잡았다.

“달린?”

나는 눈으로는 서둘러 이사야 후작을 좇으며 다리를 쪼그렸다. 그러고는 래빗에게 얼른 속삭였다.

“황녀님, 들어주세요. 계시가 도착했어요.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날지도 몰라요.”

“……듣고 있댜.”

“저는 원흉을 쫓으러 가봐야 할 것 같으니까. 황녀님은 여길 지켜주세요.”

“하디만!”

“여길 지켜줄 강한 사람이 필요해요. 제가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요.”

래빗이 찡그리더니 이내 끄덕였다. 나는 래빗의 손을 한번 꼭 잡았다가 놓으며 성큼 걸었다.

아직 나를 향한 시선들이 있었다.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느긋하고 지루한 표정을 꾸미며 걸었다.

시선은 계속 돌리면서 이사야 후작의 등을 향했다.

내 옆으로 자연스럽게 따라붙은 남자들의 기척을 느꼈지만 예상했던 바다.

도움을 받고 싶지만 당장 상의할 수는 없었다.

‘서쪽 출구…….’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이사야 후작이 나간 출구를 똑똑히 보았고 나도 그 입구 앞에 도착했다.

“공녀님께서 공작 위의 반지를 수여 받으십니다!”

공녀 언니의 계승식. 황실에서 보냈다던 사람이 상자에서 반지를 꺼내는 모습이 보였다.

언니가 한 손에는 지팡이를 들고 다른 한 손을 우아하게 내미는 모습까지.

……공녀 언니 쪽은 문제 없겠어.

이제 저 언니가 평화로운 삶을 살 수 있게끔 지켜주는 일만 남은 걸까. 그리 생각하며 복도로 나왔다.

계승식이 시작된 탓에 복도는 텅 비어 있었다. 이상했다. 아무리 식이 시작했다고는 하나, 복도를 호위하는 기사 정도는 보여야 하는데…….

내 뒤로는 나를 쫓아 나온 남자 셋이 함께 있었다.

아주 잠깐, 이렇게 넷이서 자리를 비우면 더 묘한 소문이 돌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찰나 스쳐갔지만…….

이미 늦었지 뭐.

울고 싶은 기분을 꾹 참고 휴고를 응시했다.

“휴고, 혹시 사람의 기척이 느껴져요?”

“아……. 아니요. 느껴지지 않아요. 아무도 없어요.”

나를 쫓아왔던 휴고는 대뜸 불린 제 이름에 당황하는가 싶더니 얼른 대답했다.

“발데르, 마법으로는요? 뭔가 느껴지는 것 같아요?”

“똑같습니다. 아무도 없어요.”

발데르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네요……. 아무도 없다니.”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달린, 당신이 갑자기 나선 건 연극이 끝나서가 아닌…… 이 아무도 없는 복도와 관련된 일인가요?”

발데르의 말에 휴고도, 아무런 말이 없던 라이칸도 나를 보았다.

나는 숨을 살짝 삼켰다.

‘이사야 후작은 어디로 갔지?’

복도에선 그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여기는 1층이지. 이 복도에는 아무도 없는 거라면…….

나는 천장 쪽을 보았다.

“맞아요. 전 이사야 후작을 쫓아서 밖으로 나온 거예요. 지금 그 남자를 쫓는 이유를 설명할 시간은 없을 것 같아서 나중에 이야기해도 될까요? 급해서요.”

요정이 다른 것도 아니고 ‘긴급’이라는 말까지 붙여가면서 떠올린 창이었다.

거기다 새빨간 색. 정말 긴급에 어울리지 않을 수가 없는 색이다.

세 남자를 보자, 그들은 각기 나름의 이해를 한 듯 나에게 뭔가 묻지 않았다.

대신 이번 일이 끝나면 꼭 물어보겠다는 의지는 가득해 보였지만.

나는 살짝 웃으며 고마움을 전했다.

“위쪽으로는 사람의 기척이 느껴져요.”

“마법으로도 느껴지네요. 층수는 3층. 인원은…… 넷쯤?”

“그 위층으로는요?”

“흐음, 보자, 이상하네요. 기척이 더는 느껴지지 않는데.”

“그 넷이 각각 어디에 있어요?”

그러자 발데르가 손을 들어 올렸다. 곧 발데르의 손끝에서 빛이 흘러나오더니 건물 조형도를 만들어냈다.

깜빡이는 점들이 아마도 발데르가 찾아냈다는 인원인듯했다.

‘각각 다 다른 곳에 있잖아?’

이 넓은 곳에 현재로서 연회장을 빼고 느껴지는 인기척은 단 넷.

3층, 3층엔 뭐가 있지……? 나는 생각에 빠지다 말고 멈칫했다.

‘공작의 방이 3층이잖아?’

공녀 언니에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맞아, 공작의 방이 3층이랬어.

“지금부터 이사야 후작을 찾아야 해요. 지금 이 넷 중 누가 이사야 후작일지 모르니까. 각기 한 명씩 찍어서 찾아가요.”

“영애, 그대 혼자서는…….”

“꼭 찾아야 해요. 당장.”

말리려던 라이칸이 내 시선을 마주하고서 느릿하게 끄덕였다.

할 말이 많은 눈이었지만 내 단호함에 밀린 것이리라.

나는 마주 끄덕이면서 곧 복도 한곳에 다가가 장식장에 걸려있던 작은 단검을 들어올렸다.

좋아. 이거 가벼워서 좋네.

내가 단검을 가볍게 휘둘러보는 동안 발데르가 말했다.

“좋아요. 각기 하나씩 찾아가 본다고 하고. 만약 이사야 후작을 찾게 되면요? 그 다음 지령은?”

“제압하세요.”

퀘스트 창에서는 저지하라고만 되어있었다.

‘죽이라거나 쓰러트리라는 말을 하지 않은 이유가 있을까?’

요정은 내가 죽길 바라지 않는다.

그렇다면 내가 죽지 않고도 막을 수 있는 일이란 결론이 나온다.

이 남자들은 각기 무력이 대단한 사람들이니까…….

“그럼 이렇게 하죠.”

발데르가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우리에게 하나씩 나눠주었다.

발데르는 이것이 신호기라며, 버튼을 누르면 나머지 세 사람에게 신호가 갈 테니, 그때 자신이 이동 마법을 쓰겠다고 말했다.

동시에 각 사람 옆으로 자신이 만들었던 지도가 떠오르게 해주었다.

‘……든든하네.’

“사실 황자님과 마찬가지로 가장 걱정되는 건 달린 당신입니다만. 중요한 일인 거겠지요?”

발데르가 평소와는 다르게 조금 빠르게 말했다.

“아마도 운명과도 관련된.”

요정의 창을 암시하는 듯한 말에 나는 천천히 끄덕였다.

“내 걱정은 말아요. 다들 생각하는 것보다 나는…… 더 강할 테니까요.”

정확히는 내가 힘을 빌릴 수 있는 작고 귀여운 신님이나 대륙 제일의 황제님의 힘이 아주 강하단 말이지.

라이칸과 휴고는 짐작 가는 것이 있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발데르는 의문이 드는 듯했지만 마찬가지로 끄덕였다.

“그럼 누구든 찾으면 반드시 신호해요.”

발데르의 도움으로 신발을 편한 형태로 바꿀 수 있었고, 우리는 곧 흩어져서 각자 인물을 찾아 움직였다.

‘가장 중앙.’

내가 맡은 기척은 3층 중앙, 유일하게 움직이지 않는 점이었다.

세 남자는 아무래도 멈춰있는 점이라 안전하겠다고 생각해서 내게 이쪽을 배치하고 동의한 듯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이 점 있는 곳은 아마 공작이 있는 방을 가리키는 걸 거야.’

공녀 언니에게 듣기로 공작은 방 안에서 절대 움직이지 않는다고 했다.

이사야 후작과 약혼을 요구하기 이전에 이미 몸이 쇠약해졌다고도 들었고.

아마도 방 안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공작의 방이 바로 내가 맡은 점이 있는 위치가 맞을 거다.

‘그리고 이사야 후작은…… 공작을 살해하러 간 게 아닐까.’

내가 선택한 점을 제외한 다른 점은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고, 심지어 거의 층을 이동한 점도 있었다.

계단을 열심히 오르는 동안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만약 내가 이사야 후작, 세계의 오류와 마주치면 과연 나는 그 남자를 제압할 수 있을까?

‘아니, 해야만 해.’

거의 끝이 다가온 이야기였다. 이대로 망하게 둘 수는 없다.

나는 언제든 래빗의 힘이나 둑스의 힘을 빌릴 준비를 해두었다. 여차하면 잘 모아둔 건강 수치를 모두 써먹는 한이 있더라도 막아야 할 테니까.

마침내 나는 3층에 다다랐다.

3층은 몹시도 고요했다.

역시나 이상했다. 이 드넓은 곳에 시중인 하나 보이지 않는다는 건 기묘한 일이었으니까.

‘……이것도 세계의 오류 짓인가?’

지금쯤 계승식이 진행되고 있을 회장 내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터였다. 되도록 계승식이 끝나기 전에 해결할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나는 복도를 조용히 걸었다. 흘끗 지도를 보면, 내가 목표로 한 점을 제외한 모든 점이 다른 층에 있었다.

‘혹시나 저 중에 이사야 후작이 있다고 하더라도 세 남자 정도면 문제없겠지.’

나는 숨을 꿀꺽 삼키며 좀 더 걷다가 천천히 멈춰섰다.

분명 저 방인데…….

지도와 내가 서 있는 위치를 확인했다.

‘뭐지……?’

이상했다.

조금 전까지는 내가 쫓던 점이 방 안쪽에 있었는데.

아니, 심지어 10초 전까지만 해도 방 안쪽에 있던 점의 위치가 이상했다.

이 위치는…….

“바로 여기?”

“정답.”

나지막한 목소리에 흠칫 놀라 돌아섰다.

그곳에는 언제 온 건지 모를 이사야 후작이 서 있었다.

그는 놀랍게도 내 바로 옆에 서 있었는데, 그대로 상체를 기울여 내가 가지고 있는 마법 지도를 훑었다.

“와아, 신기해라. 대마법사의 마법은 정말 대단하군요.”

그가 상체를 들어 올렸다. 나를 보면서 싱긋 웃었다.

그 얼굴은 회장에서처럼 더는 정중하지만은 않았다.

나는 몸을 더듬어 발데르가 준 신호기를 누르고 싶었지만, 손이 쉽사리 움직이지 않았다.

목 뒤를 찌르는 불안과 경고.

……헛점을 보인 순간 저 남자가 내 목을 낚아챌 것만 같았다.

“당신이 회장에서 보여준 모습은 아주 잘 봤습니다. 인상적이었어요.”

“…….”

나는 대답 없이 그를 노려보았다. 그가 이상한 행동을 하면 언제든 바로 스킬을 쓸 준비를 한 채였다.

스킬에는 지속 시간이 있다. 따라서 개시할 타이밍을 잘 노려야 했다.

“당신이 따라 나올 줄은 몰랐습니다. 누군가 쫓는 것 같아 공간에 장난을 치긴 했지만요.”

“……사람이 전혀 없는 복도나 건물이 모두 당신 작품이라고?”

후작은 대답하는 대신 웃었다. 긍정하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당신과는 다시 한번 마주하고 싶기는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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