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3. 대마법사와 악녀 메이커 (65)
그가 손을 뻗는 순간이었다.
[스킬 ‘소환(lv.-)’가 활성화됩니다!]
[스킬 ‘빙의(lv.5)’가 활성화됩니다!]
[스킬 레벨이 올랐습니다!]
[소환 대상 ‘신 둑스’ (S급 영혼)의 힘을 받아들였어요!]
[10분간 사용 가능합니다! ※남은 시간: 09:58]
[‘나만의 로판’ 기능이 활성화됩니다!]
[스킬 ‘빙의(lv.6)’와 연계됩니다!]
[황제 ‘로아타’의 힘을 받아들였어요!]
[경고! 현재 빙의자님이 받아들일 수 없는 힘입니다!]
[스킬 지속을 위해 건강 수치를 소모합니다! 현재 건강수치: 88]
나는 들고 왔던 단검을 앞으로 내밀며 생긋 웃었다.
“손 떼.”
그가 눈을 깜빡였다. 곧이어 싱긋 웃으며 내 목으로 뻗었던 손을 치워내며 항복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낮게 번뜩이는 눈 어디에도 항복 의사는 보이지 않았다.
“이런, 왜 그러시나요, 영애? 저는 그저 옷자락에 무언가 묻어 떼어드리려 했던 것뿐입니다만…….”
“숙녀의 몸에 함부로 손대면 안 되지.”
“흐응, 그렇습니까?”
그는 내가 겨눈 단검을 흘끗 보았다.
“당신은 오는 남자를 막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말이지요……. 나는 별로입니까?”
“글쎄.”
나는 회장에서 했던 것처럼 눈을 가늘게 휘었다.
“넌 내 취향이 아닌데? 왜, 내 어장에 들어오고 싶니?”
“아주 구미가 당기는데요?”
팽팽한 긴장감 속 그는 시선으로 느릿하게 내 손을 훑었다.
“……역시 내 눈이 잘못된 게 아니었어요. 그렇죠?”
“…….”
“당신, 북부 영지에서 만난 사람 맞지?”
그의 눈으로 희열감이 어렸다. 이제 그의 미소는 더는 귀족스럽지도 우아하지도 않았다.
그에게서 회장에서 순간 느꼈던 거대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회장에서처럼 거대하게만은 느껴지지 않았다.
“맞구나. 역시 내 눈이 잘못된 게 아니었어. 나와 같은 특별한 사람…….”
그가 손을 움직이는 순간 파지직 번개가 튀었다. 내 검에서 튀어 나간 검기였다. 그의 손과 부딪치며 무언가 타는 냄새가 느껴졌다.
이사야 후작은 고통스러워하기는커녕 엉망이 된 제 손을 태연하게 바라보기만 했다.
“쯧, 이 몸으로는 건드릴 수 없다, 이건가. 하긴 특별한 사람이 이 정도는 되어야지.”
그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일렁거렸다.
불길하게 느껴지는 기운에 나는 더욱 긴장하며 언제 올지 모를 공격을 기다렸다.
그러나 이사야 후작은 손을 뻗으려다 말고 미간을 확 찌푸렸다.
“이런……. 아무래도 내가 알아차리는 게 너무 늦었던 모양이군. 조금만 더 빨리 알아차렸더라면…….”
그의 눈으로 깊디깊은 분노가 스쳤다.
그가 나를 노려보았다. 아니, 정확히는 내가 아니라 내 옆, 허공을 보는 것 같았다.
그가 이내 입을 찢듯이 씩 웃었다.
“너무 강한 기운들이 움직여서 안 되겠는데.”
그가 내 단검을 맨손으로 잡았다.
치지지직! 검에서 흘러나온 로아타 황제의 검기가 그의 손을 숯덩이로 만들었지만, 그의 눈은 오직 나만을 향했다.
“너, 그냥 특별한 사람이 아니구나? 내 예상보다 더…… 특별한 사람이야. 그렇지?”
“…….”
이 남자가 말하는 특별한 사람이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가. 적어도 나와 같은 빙의자를 말하는 건 틀림없을 터였다.
내가 대답 없이 기운에 집중하자, 그는 이제 소리 내 웃기 시작했다.
“아아, 아쉽다, 아쉬워! ……꼭, 망치고 싶은 이야기였는데.”
그는 나를 보며 웃음을 터트리면서도 연신 주변을 흘끗댔다.
나는 그제야 저 남자가 말한 강한 기운들이, 나를 향해 오고 있을 세 남자를 말하는 걸 알아차렸다.
“할 수 없지. 기억할게. 너, 다시 보자고.”
내 기운을 뚫고 들어오려던 손은 끝내 내게 닿지 못했다.
“다시 보긴 누가 다시 봐.”
나는 웃음을 잃지 않은 채, 짓씹듯이 말했다.
“나는 취향이 아닌 남자랑은 안 놀아.”
곧 나를 지그시 내려다보던 후작이 하하하, 웃으며 녹아내렸다. 나는 깜짝 놀랐다. 사람이 녹아내리다니?
그러나 녹아내린 것은 이사야 후작의 모습뿐, 곧 그가 녹아내린 자리에는 망토를 푹 뒤집어 쓴 남자가 서 있었다.
본능적으로 저 모습이 바로, ‘세계의 오류’의 진짜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망토 아래로 보이는 눈이 나를 노려보았다.
“다음에는 제대로 보자고.”
그가 분함을 담아 중얼거리고는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동시에 이 공간을 지배했던 기묘한 기운이 사그라졌다. 돌아보면 어디선가 발소리가 들렸다.
쥐죽은 듯이 고요하던 조금 전과는 완전히 분위기가 달랐다.
[긴급 퀘스트-‘움직이세요!’ 가 완료되었어요!]
[축하합니다! 빙의자님은 ‘세계의 오류’로부터 새로운 세 번째 이야기를 지켜냈어요! ٩(๑>∀<๑)۶]
요정이 낸 것인지 귓가로 전에 없던 폭죽 소리며 팡파레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저 얼떨떨했다.
어느새 종료된 스킬에 손에 쥐고 있던 단검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나는 바닥에 주르륵 주저앉은 채 숨을 살짝 몰아쉬었다.
조금 전엔 그 남자가 수작을 부린 것이 맞는 듯 저 멀리서 움직이는 시종인이 보였다.
저쪽에서는 나를 보지 못한 듯 그대로 걸어가 버렸지만.
‘……끝이라고? 이렇게?’
허탈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세계의 오류, 그 남자가 노려보았을 때 느꼈던 긴장이 아직 선명했으니까.
아마 이 자리에서 그대로 싸웠다면 승부를 쉬이 점치지 못했을 것이다. 래빗의 힘을 가져왔음에도 이 남자와 내가 박빙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내가 로아타 황제의 힘을 백 퍼센트 이용하지 못한 걸지도 모르지만. 상대도 전력은 아닌 것 같았어.’
나는 숨을 고르려고 애썼다.
정말 지킨 거야? 긴급 퀘스트는 이걸로 끝?
……다시 보자던 그 남자의 말이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애써 머릿속을 정리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요정은 이런 내 편이 아니었다. 막 큰 위기를 벗어난 내게 새로운 시련이라도 주고 싶다는 듯 띠리링 소리와 함께 푸르른 창이 떠올랐다.
멍하니 앉아 있던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나만의 로판’ 기능이 활성화됩니다! ⸜(♡'ᗜ'♡)⸝]
[빙의자님의 기록을 읽고 있습니다…….]
[‘나만의 로판’ 기능이 엔딩에 관여합니다.]
주르륵 떠오르는 메시지는 온통 이해할 수 없는 것뿐이었다.
[‘나만의 로판’ 기능의 개입으로 새로운 세 번째 이야기의 소재가 바뀌었습니다!]
[주어진 키워드는 ‘역하렘’입니다. (*^▽^*)]
“……허?”
나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역하렘. 익숙한 단어였지만, 결코 여기서 볼만한 단어는 아니었다.
‘지금 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요정의 창은 내 의문 따위는 듣지 못했다는 듯이 멋대로 창을 이어서 띄웠다.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지령 달성 조건이 공개됩니다! ٩(•̤̀ᵕ•̤́๑)૭✧]
[퀘스트(메인)- ‘필승! 새로운 세 번째 이야기에서 살아남기!’
4) 절정- 역하렘 속 나의 남자주인공을 선택해주세요.
달성 조건: 일정 호감도를 달성한 후보 중 ‘남자주인공’을 선택해주세요.
(단, 후보는 셋입니다 – 라이칸, 휴고, 발데르)]
[5) 결말- 나의 ‘남자주인공’과 엔딩
달성 조건: 내가 선택한 ‘남자주인공’과 키스하세요.
(단, 정해진 시간 내에 달성하지 않을시 호감도가 가장 높은 상대와 자동으로 진행됩니다.)]
“……뭐?”
나는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내용이 바뀌는 일은 없었다.
[요정은 애정하는 빙의자 님에게 조언해요. 만약 ‘남자주인공’을 선택한다면, 그 인물은 새로운 세 번째 이야기에서 영원히 빙의자 님을 기다리는 남자주인공이 될 거라고.]
“……뭐야, 뭔데. 똑바로 설명해!”
원래대로 돌아온 복도였다. 누군가 내가 외치는 걸 들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나는 모든 것을 읽고 나서 머리가 어지러운 기분이었다.
키스라니, 내가 선택하지 않으면 자동으로 누군가와 하게 된다고?
‘……대체 나를 어디까지 꼭두각시처럼 다룰 셈이야?’
이가 절로 갈렸다.
이건 단순히 생존을 위해 목숨을 걸게 만들었던 앞선 메인 퀘스트보다 질이 나빴다. 정말로, 나빴다.
내가 아닌 상대까지 기만한다는 점에서…… 악마가 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지령이었다.
게다가 영원히 나를 기다리는 남자주인공? 말만 들어도 불길한 느낌이었다.
“왜? 앞선 이야기들은 그런 적이 없었잖아!”
앞선 이야기에서 나는 여주인공 지젤이 도망간 자리를 대신해서 휴고와 계약 결혼과 관련된 미션을 수행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메인 퀘스트가 끝나고 엔딩을 본 후에 휴고가 나만 기다리는 남자주인공이 된다던가. 그런 내용은 없었다!
[……이야기에는 반드시 주인공이 필요합니다. 지난 세 번째 이야기는 모든 주인공이 사망했으므로, 이번 이야기에는 반드시 주인공 하나가 이 이야기에 남아야 합니다.]
“뭐? ……남아야 한다는 게 무슨 소리야?”
왜일까.
세계의 오류를 만나고 난 뒤로 예민해진 감각이 또 한 번 경고를 보내는 기분이었다.
이 말을 결코 허투루 들어서는 안 된다고 외치고 있었다.
[세 번째 이야기는 주인공의 사망으로 새로운 이야기가 급조되었어요, 이 이야기는 세상에 남아있을 수 없습니다. 엔딩을 맞이하면 그 주인공은 그와 동시에 혼자만 있는 공간에 남겨집니다. ……관리자인 ‘요정’이 이야기의 구성을 다시 검토할 때까지.]
중간부터 요정의 말투가 딱딱해지고 있었지만, 그건 내 알 바가 아니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정보가 속속들이 터져 나오고 있었으니까.
속은 기분이 들었다.
“검토라니? 그게 언제 끝나는데?”
[그건 알 수 없어요. 관리자 ‘요정’의 최우선 목표는 세계의 오류를 제거하는 것이니까요.]
마침내 요정의 진정한 목표가 눈앞에 나타났지만 전혀 기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알게 되기를 바라지도, 소원하지도 않았다.
“왜, 왜……. 그따위 이야기를 지금 말해! 왜 지금 말하냐고!”
나는 거칠게 외쳤다.
새로운 남자주인공을 정해라. 내가 마음이 가는 남자를 선택해라.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지령은 너무나 간단했고, 이것만 실천하면 기다렸던 엔딩이건만.
라이칸, 휴고, 발데르.
이 셋 중에 한 사람을 언제 나올 수 있을지 모를 공간으로 내쫓아야 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