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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227화 (227/281)

◈227화. 3. 대마법사와 악녀 메이커 (66)

[빙의자님의 역할은 반드시 엔딩을 보는 것. 선택하지 않으면 빙의자님은 사망합니다.]

물에 빠진 것처럼 숨이 차올랐다.

눈앞의 진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

‘요정, 정말 다른 엔딩은 없는 거야?’

[없습니다.]

‘왜? 앞선 이야기에서는 얼마든지 다른 엔딩이 가능했잖아!’

[완전한 이야기와 급조된 불완전한 이야기는 달라요, 빙의자님.]

나는 입을 뻐끔거리다가 이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차라리 내가 남겠어. 어, 어떻게 남을, 다른 사람을 나 살자고…… 희생해?”

차라리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게 나았다.

죽을지도 모를 위기를 짊어지고 검을 휘두르는 게 나았으며, 건강 수치가 차차 깎여가는 위기 속에서 살고자 발버둥 치는 게 나았다.

내 목숨 하나만을 책임지면 되니까. 그러니까.

왜, 왜. 왜?

내 일에 타인을 끌어들여야 하는 거야……?

눈앞이 깜깜해졌다.

그러나 차라리 눈감고 싶은 이 상황에서 요정의 창이 차갑게 떠올랐다.

[하지만…… 빙의자님을 이야기에 남겨둘 수는 없는걸요? 희생양이 필요합니다.]

……어째서 너희의 이름은 ‘요정’이지?

여태까지 전혀 해본 적 없던 생각은 아니었지만, 이 순간 그 어느 때보다 뼈저리게 느꼈다.

너희에겐 그 이름이 어울리지 않아.

“……선택, 안 해. 차라리, 날 죽여. 그냥 죽이라고!”

숨이 헉헉 차올랐다. 울분에 차 마구 욕을 짓씹었다.

눈을 감으면 머릿속으로 이 세계에서 눈을 떴을 때부터 지금까지 모든 순간이 필름처럼 지나갔다.

눈을 번쩍 떴다. 지금까지 참아왔던 것이 쏟아졌다.

“처음부터 여기서 눈 뜨고 싶었던 적 없어, 한 번도 바란 적이 없다고! 왜, 왜 나야, 왜 나냐고!”

……모든 시련들 앞에서 나는 어땠지?

원망하면 안 될 것 같았다.

밉고 억울하고 화가 나고 분노해도.

저 새파란 창은 세상에서 누구보다 내 처지를 잘 아는 존재이자, 내 생명을 쥐고 있는 손아귀면서 구원자였다.

참아야 한다. 참자. 울분은 아무것도 도움이 되지 않아.

차라리 현실을 보자. 현재를 보자. 현재만 보는 거야.

그래, 내 아픔쯤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자! 내 목숨도 게임이라도 하듯이 조금은 가볍게 느껴보자.

……그렇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거야.

지금까지 나를 세뇌해왔다. 나는 힘들지 않아. 힘들지 않을 거야. 그럼, 힘들지 않지.

……아마도.

그 모든 노력이 눈앞에서 허망하게 조각나는 기분이었다. 나는 허탈하게 앞을 바라보면서 멍하니 중얼거렸다.

“……너, 나한테 왜 그래?”

요정은 대답이 없었다.

나는 입술을 몇 번이고 씹다가 쾅, 돌로 된 벽을 두드렸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두드렸다.

피가 나는 것 같았고, 요정이 경고하는 것 같았지만 상관없었다.

나는 남을 희생하는 일은 도저히 못 하겠어.

……그래서 살아남으면 대체 무슨 소용이야? 그게 사는 거야?

[……요정은 빙의자님을 아껴요.]

가증스럽게 느껴지는 요정의 창을 노려보았다.

웃기지 마. 아껴?

너희는 결국, 나를 멋대로 다룰 수 있는 벌레 보듯이 보는 것뿐이잖아.

네가 뭐라 해도 나는 선택하지 않아.

나는 알고 있었다. 내 삶을, 생존을, 심지어 나의 웃음과 감정마저 조절할 수 있는 이 절대적인 존재가 단 하나, 어찌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는 걸.

나는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표정으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냥 죽여.”

그 순간이었다.

[요정의 권한으로 ‘남자주인공’ 후보를 끌어모을게요.]

파지지직, 요정의 창이 마치 발데르의 힘으로 억지로 꺼질 때처럼 스파크를 일으켰다.

나는 일그러진 창 속 메시지를 간신히 읽었다.

[제한 시간이 지나면 빙의자님은 호감도가 가장 높은 상대와 엔딩을 진행합니다.]

“뭐? 하지 마, 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하지 마, 하지 말라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손을 내려다보니 피범벅이 되어있었다.

게다가 스킬을 쓴 여파인지 전체적으로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나는 애써 바닥을 짚었다.

“달린!”

누군가 나를 부르며 달려왔다. 나는 위기감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달린!”

그 순간이었다.

푸르른 창이 잔인하게도 한 번 더 떠올랐다.

[스킬 ‘몸에 나쁜 건 날아가라!(lv.1)’가 활성화됩니다!]

[저런, 랜덤 확률 당첨! 모든 패시브 스킬이 해제됩니다!]

[스킬 ‘눈치는 약에 쓰자’가 해제되었습니다!]

푸른 창을 읽는 동시에 누군가 내 앞에 앉았다.

다급한 기색, 땀방울이 어린 턱 끝, 나를 보는 동시에 흐려진 얼굴.

“……달린, 어째서. 그대는 늘 다치는 거지?”

눈앞이 흐려졌다.

‘너는 정말로, 잔인해. 요정.’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지령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내가 마음에 드는 남자를 골라 남자주인공으로 선택하는 것.

이를 위해서 요정은 세 번째 메인 퀘스트 내내 내게 있던 발데르를 향해 억지로 뛰던 제한 조건을 없애버렸다.

동시에 내 감정을 막아두었던 스킬마저 지워버렸다.

그간 가려져 있던 답이, 내 눈앞에 드리워지도록.

‘싫어, 알고 싶지 않아.’

내가 읽었던 모든 소설에서 사랑을 깨닫는 장면은 따뜻한 볕이 드리우듯 찬란하고 아껴둔 보물처럼 귀하고 아름다웠다.

나는 그 모든 사랑을 동경했다.

“은애한다, 영애.”

은연중에 우리가 평범하게 만났다면 당신을 좋아했을지도 모르겠노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알고 싶지 않아……!’

어쩌면 처음 본 순간부터 당신이 내 심장에 들어왔을지도 모른다.

“다녀오면 그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간지럽게 살짝 파고든 이 마음은, 그저 빠져나가게 두는 게 맞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영애는 언제나 위태로운 모습만 보이는군.”

“먼 곳에서도 위험하지 않을까 우려했지.”

내 상황이 평범하지 않으니까 차라리 스킬 때문에 영원히 모르는 것이 낫지 않았나? 그래, 모르는 게 나을지도 모를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대를 한순간도 잊지 못했나 보다. 에스테 영애.”

이렇게…… 알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왜일까. 이 순간에 래빗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론데, 달린, 만약에.”

낭랑한 목소리가 염려를 담은 채 귓가에 울려퍼진다.

“너의 진심이…… 네 목표와 네가 반두시 행해야 하눈 계시와눈 반대 방향을 가리킨다묜 너눈 어떡할 고냐?”

눈앞에서 천이 거둬지며, 드리워진 내 마음은 너무 깨끗하고 선명해서 더는 모를 수가 없었다.

하필 그 상대가 눈앞에 있는 지금 순간에는 더욱이.

뛰어온 건지 젖어있는 하늘색 머리카락이 보였다. 늘 내가 좋아하는 맑은 하늘을 담았다고 생각했던 머리카락.

반듯한 이마 아래로, 매번 취향이라고 얼버무리던 날카로운 눈매가 흐려져 있었다.

당신은, 언제 내 심장에 들어왔을까?

나는 엉엉 울고 싶어졌다.

알고 싶지 않았던 진실.

내가 좋아하는 사람.

라이칸이 몹시도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많이, 아픈가. ……울지 마라.”

그 말이 신호가 된 것처럼 뺨으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쉴 새 없이 펑펑 쏟아지는 눈물에 라이칸은 놀란 것 같았다.

“많이, 그렇게 많이 아픈 건가? 미안하다……. 상처는 내가, 내가 어떻게든!”

이곳에 와서 단 한 번도 나를 위해 울지 않았다.

래빗의 아픔에, 휴고가 안쓰러워서. 눈물을 흘릴지라도 나를 위해서 울지 않았다.

그것이 내가 내 마음을 지키는 방법이었다.

[‘남자주인공’을 선택하지 않으면, 자동으로 선택됩니다.]

이제는 그것마저 어려운 듯 시리게도 푸른 요정의 창이 현실을 일깨워주고 있었지만.

“……안 되겠군. 달린, 미안하지만 이번만은 실례-.”

라이칸이 손을 뻗는 순간 나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이제야 욱씬 느껴지는 아픔에 살짝 찡그렸지만 그도 잠시, 나는 라이칸이 다가오는 만큼 뒤로 물러났다.

“……달린?”

“아, 죄, 죄송해요. 죄송해요. 화, 황자님. 일단, 지금은 절 혼자 내버려 두면 안 될까요?”

“뭐? 지금 무슨 소릴……!”

라이칸이 잠시 당혹스러운 얼굴을 하더니, 손을 다시 뻗었다. 그러나 다시 한번 물러나는 내 모습에 표정이 아픈 듯 일그러졌다.

이대로 있으면, 누구든 선택하게 될지도 모른다.

……차라리 여기서 멀리 벗어나는 건? 내가 누구도 선택해서 입 맞추지 못하도록.

아예 멀어져 버리는 건?

그 방법이 통하지 않으면?

그럼…… 아예 죽어버리는 건?

극단적으로 치닫는 생각에 나는 얼른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진정하고 싶은데, 좀처럼 덜덜 떨리는 손과 어깨가 진정되지 않았다.

나는 내가 떨고 있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았다.

“달린, 알겠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알겠다. 나와 닿고 싶지 않은 건가?”

“…….”

“……다른 이를 불러오겠다. 누가 좋겠나? 대공? 대마법사?”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입술이 쓰릴 정도로 깨물었다.

애정을 깨달은 동시에 멀어져야 사는 이 상황이 나라고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지만. 모두를 위한 선택을 해야 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상황이 정리되기도 전에 휴고가 이 자리에 도착했다.

그는 라이칸이 그랬던 것처럼 내게 손을 뻗었지만 나는 휴고에게도 손을 내주지 않았다.

이전과 다르게 처음으로 잔뜩 경계하는 내 모습을 보고 두 남자는 몹시도 당황한 눈치였다.

나는 열심히 시선을 돌리느라 바빴다.

“……다가오지 마세요.”

언제 강제로 남자주인공이 선택될지 모른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다행히 손에도 몸에도 힘이 점차 돌아오는 것 같았다.

나는 홀로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달린,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라……!”

라이칸이 다가와 내 앞을 가로막았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거겠지? 모두 알겠으니, 이것만은 신고 가겠나? ……다칠까 염려된다.”

주춤 물러서고 나서야 나는 내가 맨발이라는 걸 깨달았다.

라이칸이 내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신발을 내밀었다.

“영애, 당신은 늘 아픈 나를 위로하고서……, 내가 당신에게 하는 위로는 못 하게 하시네요.”

휴고는 마치 버림받은 얼굴을 하고서도 라이칸처럼 내 앞에 신발을 내려놓았다.

나는 차마 이 신발을 신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들의 간절한 눈빛에 이마저 거부할 수는 없었다. 비틀거리면서도 고개만 꾸벅 숙이고 신발은 대충 구겨 신은 채 걸어갔다.

단호하게 말한 탓인지 쫓아오는 기척은 없었다.

계승식은 아직 끝나지 않은 건지, 복도에 귀족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간간이 보이는 시종들이 나를 보고 당황해하거나 때때로 내게 도움이 필요하냐고 물었지만 나는 모두 거절했다.

비틀거리며 걸어 저택을 나섰다. 밖으로 보이는 정원은 깜깜하기만 했다.

어디로 가야 할까.

‘……얼만큼 멀어져야 이 지령에서 벗어날 수 있지?’

멀어지는 건 대체 얼마나 멀어져 있어야 하는 건지. 이대로 멀리에서 버티면, 나는 결국 죽을까?

수많은 생각이 스쳤다. 그러나 결심에는 변함이 없었다.

아주 잠깐 래빗에게 아무런 말도 못 한 것이 떠올라 마음에 걸렸지만 돌아갈 수는 없었다.

하염없이 앞만 보고 걸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마냥 이런 생각에 잠겨있을 수는 없다. 현실적으로 어떡할지 좀 더 생각해봐야…….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밖으로 첫 발을 디뎠을 때였다.

“괜찮나요?”

누군가 살포시 내 앞으로 내려왔다. 깃털이 나부끼듯 아주 부드러운 하강이었다.

툭, 내려오는 신발부터 옷차림이 모두 익숙했다.

당연했다. 조금 전엔 홀로 보이지 않던 발데르였으니까.

그는 내 모습을 보더니 가만히 고개를 기울였다.

“엉망이네요.”

담백한 감상에, 나는 나도 모르게 작게 웃고 말았다.

“……그러게요.”

더는 발데르를 향해 심장이 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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