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화. 3. 대마법사와 악녀 메이커 (67)
조금 신기한 기분이었다. 매번 그를 향해서 뛰던 심장이 전혀 반응하지 않으니까.
어느새 저 남자를 볼 때 강제로 느껴지던 심장 박동이었다. 내가 이 남자에게 느끼는 실제 감정과 상관없이 울려퍼지던 소리.
이미 그 소리가 너무 익숙하게 일상에 녹아들어 버렸다. 그래서인지 약간은 낯선 기분마저 들었다.
“밤은 서늘하죠.”
발데르가 덤덤하게 말하는 동시에 따뜻한 바람이 내 손과 발, 등을 감쌌다.
그러고 보니, 혼자 걸어오는 동안에 숄도 잃어버렸구나. 그제야 알았다.
“저택을 모두 둘러보고 오느라 늦었어요.”
발데르가 말했다.
“……저 저택 내에서 이상한 기척이 있었는데,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더군요.”
발데르가 그 기척을 쭉 쫓았지만 어느 순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난 아마 그가 느낀 이 기척이 세계의 오류거나 세계의 오류가 쓴 힘일 거라고 생각했다.
아마 내가 세계의 오류를 마주한 순간 발데르가 바로 나타나지 못한 것도 그놈이 쓴 힘과 관계있는 건 아닐까 싶기도 했다.
짧게 생각을 마치는데, 발데르가 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어딜 가시는 건가요?”
이 남자는 내 몰골을 보고도 마치 어디 산책가는 것이냐는 듯 평온한 말투였다.
이것이 배려인지, 이 남자의 성격인지 몰라도 난 이런 대우가 싫지 않았다. 오히려 호들갑을 떨었다면 부담스러웠을 텐데, 반가웠다.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멀리요.”
“어디로요?”
“……아주 멀리요.”
저택에서 헤어진 두 남자도, 눈앞의 당신도 나를 보지도 찾지도 못할 곳으로요. 속으로 떠올린 목소리를 꿀꺽 삼켰다.
어디선가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계승식이 있는 홀인 듯 몹시도 즐거운 웃음소리였다.
이제 세계의 오류가 썼던 힘은 완전히 사라졌구나, 느끼면서 동시에 나는 이 세계에서 홀로 떨어진 듯한 착각을 느꼈다.
하지만 이를 티 내지 않으려고 양팔을 겹쳐 꾹 눌러 잡았다.
팔랑.
온기가 느껴졌다.
고개를 드니, 자신의 망토를 벗은 발데르가 내게 이 망토를 감싸주고 있었다.
등과 어깨는 포근해졌지만 마음은 불편해졌다.
“필요 없어요.”
“그런가요?”
발데르가 살짝 미소했다.
“마침 버리려던 차였는데. 가지고 있어 줄래요?”
“제가 쓰레기통인가요?”
퉁명스러운 말에도 발데르는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억지로 뛰던 두근거림과 설렘이 사라졌기 때문일까, 말이 편히 나왔다.
“조금 달라진 느낌이네요.”
발데르 또한 이런 내 모습에서 차이를 느낀 건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속으로 가만히 시간을 헤아려보면서 작게 미소했다.
“더는 연기하지 않아도 되니까 좋네요.”
“…….”
발데르가 잠시 침묵 끝에 물었다.
“……연기하는 것이 힘들었나요?”
“하나 들어보실래요? 저는 고작 1년 전까지만 해도 이런 것과는 전혀 관련 없는 삶을 살았거든요.”
“…….”
“내가 이렇게 될 줄은, 전혀 알지 못했죠.”
나는 그의 어깨 너머를 노려보면서 이어 말했다.
“연기가 힘들었냐고요? 그렇죠, 내 모습이 아니었으니까. 힘들었죠.”
지금까지의 모든 메인 퀘스트가 연기하는 일은 아니었어도,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내겐 요정이란 존재를 숨기기 위해서 상대를 속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었다.
그 모든 순간을 떠올리면, 사실 모든 순간이 힘들었다.
모른 척 해오던 사실. 무의식중에 잊으려 노력했던 사실들이 이제야 수면 위로 떠올랐을 뿐.
“발데르, 고마웠어요.”
언제 다시 요정 그놈들이 재촉할지 몰랐다.
아마, 어디로 가든…… 나는 그놈들의 눈을 벗어날 수 없겠지.
차라리 잘 됐다. 놈들이 내게 원하는 일을 내 손으로 망쳐버릴 심산이었으니까.
걸레를 쥐어짜듯 나오는 통쾌함에 나는 속으로 비릿하게 웃었다.
“난 이대로 사라질 거예요. 제가 도망가면 붙잡을 건가요?”
만약, 내가 멀리 떠날 수 있다고 가정했을 때, 가장 먼저 나를 쉽고 간편하게 잡을 수 있는 남자는 바로 눈 앞의 이 남자이리라.
마법은 실로 대단한 힘이었다.
아마 강인함으로 따지자면 휴고나 라이칸 또한 비등할지도 모르지만, 마법의 편리함은 누구도 따라올 수 없다.
“네. 그럴 거예요.”
발데르가 고개를 갸웃하면서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평온한 낯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을 대답한다는 듯.
“내가 싫은 건 하지 않기로 약속하지 않았나요?”
“…….”
발데르가 잠시 틈을 두더니 대답했다.
“……그것도 맞아요.”
그의 표정으로 잠시지만 혼란이 스쳤다.
나는 이를 놓치지 않고 명료한 표정으로 말했다.
“당신이 정말로 나를 아낀다면요. 나와 당신이 서로 떨어진 거리만큼 내가 행복해진다면 들어줄 건가요?”
“……당신이, 행복하다면 그렇게 해야겠죠?”
이 또한 평온하게 흘러나온 대답이었다.
나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어쩐지 지금까지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던 이 안개 같은 남자를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우습게도 이제야 말이다.
발데르는 내가 웃음을 터트리는 모습을 빤히 보다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그런데 왜 당신은 지금 행복해 보이지 않나요?”
“…….”
도망가고 싶으면 도망가라, 쫓지도 않겠다. 이런 의미를 품은 동시에, 왜 내가 그렇게 해주겠다는데도 넌 행복해 보이지 않느냐는 말.
나는 그대로 멈칫했다.
“당신이 잘못 본 걸 거예요.”
내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아무튼 들어 준다니 고맙네요. 그럼 나를 찾지 말아 주세요. 고마웠어요.”
이것만은 잘 받을게요. 아무래도 등이 파인 드레스를 그대로 입고 갈 수는 없었기에 그의 망토만은 마지막 배려라 생각하고 단단히 여몄다.
그대로 그를 지나쳐 가려는 순간이었다.
“사실, 모든 것을 들었어요.”
평온한 말투지만, 내용만은 평온하지 않았다.
돌아보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고개를 돌린 뒤였다.
“당신이 복도에서 홀로 떠들었던 모든 말을 들었어요.”
……내가 무슨 말을 떠들었어?
“……남아야 한다는 게 무슨 소리야?”
“차라리 내가 남겠어. 어, 어떻게 남을, 다른 사람을 나 살자고…… 희생해?”
복도에서 이성을 잃고 외치던 말을 떠올린 순간, 내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모두 들었어?’
우리의 시선이 교차했다. 바람이 쏴아아 불며 머리카락이 어지럽게 나부꼈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래, 이제 와서 무슨 상관이야? 이 남자가 다 들었든 어쨌든. 어차피, 더는 숨길 생각도 없었잖아? 모두 끝이야. 끝이라고.
“그건 ‘운명’ 때문입니까?”
그래서 발데르의 질문에도 아무렇지 않게 웃으면서 답변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요?”
“그 운명을 거부하는 건가요?”
“……그렇다면요.”
이제 발데르에게 심장이 뛰지 않기에 말은 술술 흘러나왔다.
아니, 심장은 핑계였을지도 모르겠다.
“정해진 목표를 이루지 못하면 죽거든요. 죽지 않기 위해 뭐든 했죠.”
나는 차마 래빗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이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저 남자는, 내가 요정의 억제를 벗어난 이 순간 가장 적절한 상대였다.
“그런데, 이젠 지긋지긋해요. 내가 죽는 건 상관없어요. 죽지 않게 발버둥치면 되니까.”
이제 와 무엇을 숨기느냐 싶어 말은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울컥하는 걸 숨길 수조차 없었다.
“하지만 도저히……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진 못하겠네요. 그렇게 살고 싶진 않아요.”
“…….”
“그러니까 당신 옆에서도 멀어질 생각이에요.”
“내가 이용당하고 싶다 말해도 말입니까?”
그 순간 발데르의 뒤로 휴고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휴고였던 모습은 어느새 라이칸이 되었다. 눈 깜빡하는 사이에 사라졌지만 나는 쓰게 웃었다.
그래, 그 남자들도 비슷한 소릴 하기는 했었지.
“그 희생이 당신 목숨이라면 이야기가 다르죠. 싫어요. 거절할게요.”
나는 그대로 돌아섰다.
“도망친 다음에는 어쩔 건가요?”
“생각하지 않았어요.”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저 지치고 지긋지긋하네요.”
이게 마지막이었다. 나는 그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니, 옮겼다고 생각했다. 몇 걸음도 채 디디지 못하고 이 남자에게 붙잡히기 전까지는.
‘……스킬을 써야 하나.’
몸에 부하가 오기야 하겠지만, 떨어지기 위해서는 모든 걸 할 작정이었다.
난 주먹을 살짝 쥐었다가 폈다. 발데르는 분명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을 텐데도 내게 평온하게 말했다.
“모두 이해했습니다. 잠시 나와 어딜 가주겠어요?”
“……아뇨, 이해하지 못한 것 같은데요. 당신과도 같이 있기 싫다는 말 못 들었어요?”
“들었습니다. 할 말이 있어요.”
그가 붙잡은 손은 따뜻했다. 나는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
“잠깐만 나와 당신이 처음 만난 장소에 같이 가면 좋겠어요, 달린.”
“싫어요. 그리고 5초 내로 이 손 떼어내지 않으면 나와 적이 된다는 걸로 간주할게요.”
“경계하지 말아요.”
따뜻한 바람이 머리를 스쳤다.
“떠나기 전 마지막 부탁입니다.”
마주한 시선이 이 남자를 보았던 그 어느 때보다 간절했다. 나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연인 행세를 해주는 대신에 내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지요?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들어준다면 당신의 도망을 돕죠.”
이 남자의 마지막 말에서 흔들리 수밖에 없었다.
저 멀리 나를 보내주겠다는 말. 어쩌면 이 대마법사의 도움을 받는다면 정말로 멀리 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날 찾지 않을 건가요?”
“찾지 않겠습니다.”
이 남자조차도 다시 올 수 없는 곳으로.
“그럼 하나만 더요. 내가 만약…….”
요정은 제한 시간을 따로 표시해주진 않았다. 하지만 나는 본능적으로 시간이 얼마 없음을 느끼고 있었다.
“만약, 당신에게 억지로 손대려고 하면 나를 거절해주세요. 반드시, 내가 이성을 잃거나 무언가를 거부하는 것 같을 때…… 당신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게 당신이 피하거나 막는다고 약속해요.”
분명 이상한 요청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발데르는 무언가 눈치챈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그러겠노라고 약속했다.
발데르가 손을 뻗었고 나는 붙잡았다.
거대한 바람이 나와 남자를 감싸는가 싶더니, 곧이어 눈부신 빛이 터져 나와서 눈을 꾹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