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화. 3. 대마법사와 악녀 메이커 (68)
천천히 눈을 뜨면……
전혀 다른 장소였다.
동시에 익숙한 장소였다.
이 남자와 처음으로 마주한 장소, 바로 세 번째 이야기 주인공들의 묘지였다.
지하에 마련된 거대한 묘지.
한 곳을 차지한 비석은 언제나처럼 그 자리에 있었다.
어두운 공동이 쓸쓸해 보이기까지 했다.
[‘남자주인공’을 선택하지 않으면, 자동으로 선택됩니다.]
한번 보았던 문구가 적힌 요정의 창이 눈앞으로 떠올랐다. 마치 협박하는 듯한 태도에 나는 그저 비웃을 뿐 시선을 돌렸다.
나를 데려온 발데르는 홀로 한 곳에 서 있었다. 나와 거리가 조금 떨어져 있는 곳.
제가 직접 날 이곳에 데려왔음에도, 내가 아닌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를 부르는 대신 고요히 그가 있는 쪽으로 걸었다.
그가 있는 곳은 묘지의 비석 앞이었고, 나는 그의 옆에 나란히 섰다.
그에게 무슨 할 말이 있는 거냐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이미 묘지를 보며 발데르는 수많은 말을 하고 싶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니까.
곧 그의 입술이 고요히 떨어졌다.
“이미 말했던 사실이지만…… 저기 있는 묘는 내 친구와 친구의 약혼자의 묘입니다. 그리고 아무도 내 친구를 기억하지 못하지요.”
그래, 들었던 이야기였다.
여기 있는 세 번째 이야기들의 주인공. 불행하게도 세계의 오류에게 살해당하고만 안타까운 사람들.
어쩌면 나와 마주했을지도 모를 이들은 죽어 사라졌다고.
담담하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님에도 담담하게 말하는 발데르가 조금 신경 쓰였다.
그는 왜인지, 견디고 또 견디다가 결국 무뎌지고 만 사람 같이 보였으니까.
‘……인정하기 싫지만, 지금의 나처럼.’
그 모습이 지금의 내 모습과 다르지 않았으니까.
나는 내 손을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때는 말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이야기할 수 있는 사실.
“저도 한 가지 이야기하고 싶은데요.”
발데르는 이전에 말했다. 보통 사람들은 저 묘지에 적힌 이름을 읽지 못한다고. 발데르의 친구이자 세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인 저들을 완전히 잊었으니까. 이름조차 읽지도 기억할 수도 없는 것이다.
“……나, 저기 적혀있는 이름 읽을 수 있어요.”
옆에서 작게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와 무엇을 숨길까. 나는 느릿하게 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알렉타 카란시스」.”
틀리지 않게. 아주 또박또박.
“「줄리엣 라뮬라」.”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살해당한 억울한 영혼 여기 잠들다. 모두 읽을 수 있죠?”
처음 이 이름들을 보았을 때, 얼마나 놀랐던지.
로판을 좋아했던 나였다. 그러나 정작 내가 가장 좋아한 소설의 주인공들은 살해당한 뒤라니.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또 있을까.
너무나 사랑했던 그들 대신에 내가 주인공이 되어버리다니.
“알렉타, 참 좋은 이름이에요.”
“…….”
나는 발데르의 얼굴을 마주하고 잠시 후회했다.
눈물이 한가득 고여있는 저 눈동자는 차라리 보지 않는 게 나았겠단 감상을 불러일으켰으니까.
그가 울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언제나 예상을 벗어나는 남자였다. 그는 이번에도 예상을 벗어났다.
끝내 눈물은 떨어트리지 않은 채, 너무나 행복하게 웃었다.
“……왠지 당신은 가능할 것 같았어요.”
내가 저 이름을 읽고 기억한다는 것에 놀란 기색조차 없이.
행복한 동시에 후련해 보였다. 내가 멈칫할 정도로.
“달린, 누가 당신을 힘들게 하나요?”
그 물음에 내가 대답하지 않자, 발데르가 예상했다는 듯이 이어 말했다.
“……여기서는 편히 이야기해도 괜찮을 겁니다.”
이곳은 수없이 긴 시간 동안 자신이 만든 공간이라며, 그의 모든 마법의 정수가 담겨 있는 곳이라고 했다.
요정이 설마하니, 그렇다고 아무것도 못 할까 싶었지만.
거대한 비석을 다시 보고 있으려니, 조금 안심이 되는 기분이었다.
발데르는 혼자만 기억하는 친구를 위해서, 그리고 그 기억을 잃지 않기 위해서 홀로 사투를 벌여왔던 사람이었다.
나처럼 아무도 모르는 자신만의 싸움을 벌여온 사람.
“누가 당신을 힘들게 했습니까?”
“……이 세상의 관리자.”
“관리자?”
“스스로를 요정이라고 부르더군요.”
나는 피식 웃었다. 요정.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에게 어울리는 이름이 아니었다.
“신인가요?”
“아마도.”
동시에 귓가로 요란한 경고음이 들리는 듯했다.
아마도 요정이 일으킨 것인 듯, 내 앞으로 붉은색 창이 떴지만 일부러 읽지 않았다.
“신인지, 신인 척 인간을 조롱하는 존재인지.”
내 말과 동시에 파지직 번개가 일어나며 일시에 요정의 창이 사라졌다.
나는 앞선 경험 덕에 발데르의 힘이 개입해서 창을 없애버렸음을 알아차렸다.
“다음엔 무엇을 해야 하나요?”
“글쎄요.”
나는 비석 쪽을 보았다.
저 불쌍한 주인공들을 살해한 존재.
그리고 이 세상을 망치고 다니는 존재.
“세상을 엉망으로 만들고, 파멸시키려는 세계의 오류라는 존재를 막으라던데요.”
“…….”
“이제는 상관없는 일이지만요.”
그래, 상관없는 일이다.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버리고, 그는 죽음과 같은 벌을 받아야 한다.
나는 누군가를 희생시킬 생각이 없기 때문에 더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다.
“누군가를 버려야 하죠?”
비석을 마냥 바라보고 있는데, 그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놀라진 않았다. 아니, 놀라지 않으려 했다.
이미 그는 복도에서 중얼거린 요정과의 대화를 모두 듣지 않았던가.
하지만 막상 타인의 목소리로 들으려니 가슴에 무언가 쿡 박히는 기분이었다.
“나를 버리세요.”
나는 진정으로 놀라고 말았다. 눈을 크게 뜬 채로 그를 응시했다.
무슨 소리야?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버릴 사람을 골라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걸 날 선택하란 말이에요. 달린.”
내 입술이 말을 잊고 달싹였다. 곧 분노가 온몸을 잠식했다. 내가 왜 여기에 있는데.
“내가 한 말 못 들었어요? 다 들었다며. 내가 왜 도망가려는데! 그런 거 안 해요. 안 할 거니까 끔찍한 소리 하지 말아요.”
애초에 이 남자를 믿는 게 아니었다. 어쩌다가 쫓아왔지?
분노로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우습게도 배신감이 든 까닭이었다.
처지가 비슷하다고 해서 홀로 지나치게 믿어버린 탓이다.
“내게 그런 짓 시킬 생각 말아요.”
“하지만, 하지 않으면 당신이 죽는 거죠?”
발데르의 물음은 고요했다.
“네. 그럴지도 모르죠.”
세 번째 메인 퀘스트를 달성하지 못하면 나는 죽는다. 근데, 그래서?
“그렇지만 이건 내 선택이에요. 누구도 강요할 수 없는.”
“달린, 당신이 누군가를 희생하고 싶지 않은 것처럼.”
그가 내 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깊디깊은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나도 당신이 죽기를 바라지 않아요.”
늘 어딘가 정상과는 다른, 때때로 비인간적인 면모가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의 눈에서 염려를 보았다.
래빗이, 리제가, 파올로가 바라보던 것과 같은 걱정이 가득한 시선.
나는 이를 꾹 깨물었다.
“……할 말이 있다고 했죠. 난 그걸 들어주기로 했고, 당신 이야기는 이걸로 끝인가요?”
“만약 달린 당신이 누군가를 버리게 되면 그 사람은 죽는 건가요?”
“…….”
“궁금해요.”
나는 그를 노려보면서 대답했다.
“그렇게 원하니 알려드려야겠네요. 정답은 아니다, 예요. 죽진 않아요. 참 좋죠? 근데 말이에요, 내가 그 사람을 버린 순간, 아마 그 사람은 영원히, 혼자만 있는 공간에 남겨질 거예요.”
버려진 사람은, 관리자라던 요정이 모든 것을 검토할 때까지 홀로 남겨진다.
그 시간이 언제가 될지 요정은 알려주지 않았다. 마치 억겁의 시간이라도 되는 양 말했지.
아니, 내게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참 자비로운 벌이다, 그렇죠? 죽지는 않으니까? 아니, 그렇지 않아요. 난 못해요. 이건 죽음보다 못한 벌이에요.”
영원히 홀로 남아 갇힌다니. 죽음보다도 못한 처벌이었다. 내 손으로 그런 사람을 만들라니, 죽어도 할 수 없었다.
“그렇군요.”
그러나 발데르는 뜻밖에 덤덤했다.
“확실히 죽음보다 더한 형벌이긴 하군요.”
“그러니까…….”
“내겐 그렇지 않겠지만요.”
나는 말을 멈췄다.
“무엇보다 달린, 나는 당신이 나를 버렸다고 생각하지 않을 거예요.”
무슨 소린지 알 수 없었다.
발데르는 달처럼 은은한 미소를 띤 채로 나를 마주 응시했다. 태양처럼 예쁘고 주황빛 도는 눈동자로 애정이 비쳤다.
“만약 할 수 있다면 나는 이 장소에 영원히 머물고 싶어요.”
“……뭐?”
발데르의 시선이 느릿하게 묘비로 돌아갔다.
“평생을 홀로 살았던 내게, 아무것도 없던 인생에…… 유일하게 존재하던 사람이 바로 이 친구였어요.”
죽은 세 번째 이야기 남자주인공과 발데르가 친구란 건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이상의 것은 들은 적 없었다.
“……나는 너무 강했고, 심장은 고장나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삶을 너무 오래 살았어요.”
그저 발데르가 친구의 죽음에 분노했고, 복수를 원하며 아직도 원한을 품고 있으며, 잊지 않기 위해 홀로 싸움을 치르고 있단 사실만을 알았을 뿐.
“친구가 옆에 있을 때는 비로소 내가 언제 갑자기 죽을지 모른단 사실을 잊었어요.”
“…….”
“달린, 당신을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그가 친구를 얼마나 아꼈는지, 두 사람이 어떤 친구 사이였는지 이전에 들은 바는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알고 있다. 아니, 알 수 있다.
나는 책을 읽어서, 너무 많이 읽어서 클리셰를 꿰고 있을 정도로 잘 알게 되었지만.
사람의 인생은 결코 클리셰라는 어떤 법칙으로만 재단할 수 없다는 것을.
내가 래빗이 전생을 잊지 않게 하는 결말을 택한 것도, 휴고가 자기 모습 그대로 가져가는 엔딩을 택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