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화. 3. 대마법사와 악녀 메이커 (69)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 생각했다.
집착 지수 100. 요정이 괜히 그런 지수를 보여준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 남자가 사실은 나를 원했다고 말한다거나 혹은 강대한 힘으로 나를 감금하거나 억제하려 들어도 그 수치가 역시 사실이었구나, 그저 이렇게 여겼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제 와 이 남자는 내가 사랑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듯한 얼굴을 했다.
줄곧 나를 갖고 싶다고 말해오던 사람이었으면서.
내 착각인가? 오해인가?
이 의혹은 곧 발데르가 입을 열면서 명료해졌다.
“오히려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이 더 아름다울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는 후련한 듯 또 한 번 미소했다.
“나를 버려요.”
할 말이 목끝까지 차곡차곡 쌓였다.
어떻게, 당신은 그렇게 말을 할 수 있어?
누군가를 좋아한다면서, 그 사람을 위해 다 포기하겠다는 거야?
“나를 위해서 그런 결정 하지 말아요.”
“당신은 운명을 거절하면 죽잖아요? 그건 싫어요. 그리고 달린, 말했듯 나는 여기 남기를 원해요.”
“…….”
내가 무어라 입을 열기도 전에 발데르의 손이 살포시 내 입가를 덮었다.
“이 공간에서 지금처럼 당신을 영원히 사랑할 수 있게 해줘요.”
우리가 처음 보았을 때, 나를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던 시선.
그는 그때와 꼭 같은 시선으로 내려다보더니, 곧 차차 얼굴에 부드러운 빛을 띠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표정을 하는 것 같네요. 이상하게도 나는 사람 감정을 잘 알아차리는 편은 아닌데, 당신의 표정은 잘 보여요. 그리고…… 이상할 건 없어요.”
“왜?”
“당신도 그렇잖아요? 자각했지만, 그 마음을 따르지 않았던 것처럼.”
정곡이 찔린 기분이 들었다.
내가 라이칸을 향한 감정을 깨닫는 순간 그에게 멀어지기로 선택한 것.
발데르는 그것과 자신의 결정이 무엇이 다르냐고 묻고 싶은 것 같았다.
“나를 남겨주세요. 평생 당신을 기억할게요.”
발데르가 공간을 천천히 훑었다. 그의 얼굴로 그리움이 스친 것도 같았다.
“내 친구가 있는 이곳에서.”
자신은 사랑도 친구도 있는 이곳에 평생 머물고 싶다며, 진심으로 호소하는 얼굴이었다.
나는 여전히 그의 결정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조금씩 마음이 기울어지는 것을 느꼈다.
[선택의 순간이에요, 빙의자님.]
이 순간만을 기다린 것처럼 눈앞으로 푸른 창이 떠올랐다.
놀랍게도 발데르는 나와 같은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흐음, 나도 보이네요. 마지막이라 그런 걸까요.”
“……보인다고요?”
“네. 조금 일그러지긴 했지만. 선택의 순간이라는 글자는 보입니다.”
발데르는 요정의 창을 툭 두드렸다.
“이전의 저라면 눈을 빛내고 연구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친구가 살아있을 때의 나라면 말이지요…….”
그는 나를 만난 순간부터 내가 원하는 뜻을 이루어주고 싶어졌다고 말했다.
곧 그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허락 없이 손대지 않기로 약속했지만 이것만은 봐줄래요?”
톡, 이마가 닿았다.
온기가 느껴진다. 발데르의 기나긴 속눈썹과 그 속눈썹이 팔랑팔랑 깜빡이는 모습마저 자세히 보였다.
이어서 눈앞으로 새하얀 빛이 터졌다. 이마가 타는 듯이 뜨거워졌다.
“어차피 여기 남게 되면, 내게는 필요 없는 것이니까. 줄게요, 내 마력. 당신이라면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정말이네요.”
“필요, 필요 없어요.”
“필요할 거예요. 필요 없더라도…… 받아주세요. 살아주세요.”
“…….”
“그리고 날 기억해주세요.”
몸속으로 따뜻한 물이 차오르는 것 같았다.
마치 온천에 앉은 것처럼 온몸이 기분 좋은 따뜻함에 사로잡혔지만, 나는 결코 웃을 수 없었다.
그가 천천히 떨어진 순간이었다.
[선택하세요, 빙의자님.]
[10초 내로 입맞춤을 하지 않으면 퀘스트는 실패하고 빙의자님은 죽고 말아요.]
눈앞을 어지럽히는 메시지.
발데르는 또 한 번 나와 같은 곳을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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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탁할게요.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좋아요. 나는 여기서 당신을 기다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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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모든 것이 끝나면 당신이 나를 다시 자유롭게 해주세요. ……울지 말아요.”
나는 다가오는 이 얼굴을, 간절히 바라는 표정을 외면하지 못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이곳에 남는 것이 곧 본인이 가장 편안해지는 것이라고 외치고 있었으니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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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할게요.”
따뜻한 입술이 내려앉았다.
[히든 퀘스트-‘진정한 이야기의 종결!’ 이 완료되었어요!]
[축하합니다! 퀘스트(메인) - ‘필승! 새로운 세 번째 이야기에서 살아남기!’를 달성했습니다!]
* * *
나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놀라워라! 빙의자님은 막대한 ‘마력’을 얻었어요, 건강 수치에 영향을 받지 않고 스킬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숨이 가빠왔다.
눈앞이 흐려졌다.
‘아…….’
[요정은 빙의자님이 자랑스럽습니다.]
[퀘스트 보상이 주어집니다!]
푸른 창이 앞다퉈 떠올랐지만 단 하나도 읽지 못했다.
눈앞은 가쁜 숨과 함께 갈수록 안개가 낀 듯 짙어졌다.
앞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아, 으…….”
하지 않기로 한 결정이었다.
그가 원한다고 들어줄 생각은 결단코 없었다.
“요정…… 요정! 엔딩은?”
그 순간 모든 메인 퀘스트 끝에서 떠올랐던 엔딩에 관한 메시지가 떠올랐다.
요정은 정해진 끝을 말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혹시나 다른 메인 퀘스트처럼 새로운 엔딩을 볼 수 있는 거라면? 내가 엔딩을 선택할 수 있는 거라면?
“…….”
그러나 눈앞으로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하, 웃음이 차올랐다.
“야, 왜, 아무런 말도 없어? 엔딩, 엔딩을 보여달란 말이야! 이딴 건, 내가 원한 엔딩이 아니야. 아니라고!”
쾅쾅, 어딘지 모를 바닥을 마구 내려쳤다.
하지만 요정의 창은 끝끝내 떠오르지 않았다.
[……요정은 언제나 최선을 다했습니다.]
웃기지 마! 너는, 인간을 그저, 도구로밖에 보지 않는 거지?
후두둑,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마침내 내가 일으킨 결과를 받아들인 순간이었다.
[새로운 세 번째 이야기가 봉인됩니다.]
[모든 개체의 기억에서 인물 ‘발데르’에 대한 기억이 소거됩니다.]
요정이 이제는 됐다는 듯 무정한 결론을 보여주었다.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새로운 세 번째 이야기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하였습니다.]
[‘나만의 로판’ 기능이 대폭 강화됩니다. 이 기능은 거의 완성되었다고 알려요.]
“……그래서?”
침묵하던 요정들이 마치 앞다퉈 보내기라도 하듯 빠르게 요정의 창이 떠올랐다.
이상하게도 창 옆으로 흐릿하게 빛 같은 것이 보이는 것 같았다.
아니, 표현하자면 아주 작은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흔히 동화 속에 나오는 요정처럼 날개가 달린 형태. 나는 흐릿함에 눈을 찡그렸다.
[이 모든 건 ‘세계의 오류’에 대항하기 위함입니다.]
채 흘러내리지 못한 눈물이 뚝 떨어졌다.
“……넌, 내가 망가져도 세상만 구할 수 있으면 좋은 거구나?”
[…….]
하, 하하하. 낮게 조소를 터트렸다.
울음이 어린 내 표정을 느꼈다. 머릿속으로 사람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래빗과 리제, 라이칸과 휴고, 파올로와 부모님……. 그리고 발데르까지.
내게 다정하거나 친절했던, 모든 사람이 스쳐 지나간다.
“그래. 너는 나를 협박하고 싶은 거구나.”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내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죽거나 위험해질 거라고 말하고 싶은 거네.”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제야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생긴 것일지도 몰랐다.
거대한 공동이었다.
어둡고 축축하다. 나는 부서진 석상이나 바닥에 움푹 패인 흔적들이 익숙하다 싶었다.
‘여긴, 신전이구나…….’
첫 번째 메인 퀘스트에서 세뇌된 래빗에게 검에 찔린 곳이자, 아기 황녀님을 위험해서 구해냈던 장소였다. 어째서 이곳에 온 것인지 모를 일이었지만.
나는 눈물을 그친 얼굴로 허공을 응시했다.
“내가 아니면 세상을 구하지 못해?”
[요정은 그렇다고 말해요.]
“내가 아니면 멸망해?”
[……요정은 그렇다고 이야기합니다.]
나는 작게 피식 웃었다.
“내가 네가 미워서 세상이 멸망하든 말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요정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흐릿하게 보이는 빛인지, 아니면 작은 사람 형태인지 모를 것이 곤란하다는 듯 바삐 움직이는 것 같았다.
“……내가 그러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겠네. 아니면 그런 사람을 데려온 건가.”
나는 통쾌함도 상쾌함도 하나 없는 결말 앞에서 잠시 멈춰뒀던 눈물을 터트리고 말았다.
장소를 이동했기 때문에 그 남자를 떠올릴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여기가 그와 있던 거대한 표지인 것처럼 작게 속삭였다.
“인정할게요.”
생각해보면 발데르, 그 남자에게 제대로 된 인사조차 하지 못했다.
“사랑은 아니지만. 당신은…… 아마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나를 가장 많이 이해할 수 있는 이해자였겠죠.”
나처럼 언제 죽을지 모를 긴장을 품고 살아온 사람.
혼자만의 사투를 오랫동안 이어온 사람.
“나는 유일한 이해자를 잃은 거예요.”
나는 그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다.
“살아주세요. 그리고 기억해주세요.”
숨을 가쁘게 내쉬었다. 몇 차례 쉬던 숨이 차차 가라앉았다.
“좋아요. 살게요.”
당신을 기억하고, 자유롭게 해주려면, 나는 세계의 오류부터 처리해야겠죠.
다시 앞을 응시했다.
“요정, 아무래도 안되겠어. 우리 계약, 수지가 맞지 않아.”
나는 뺨에 눈물을 묻힌 채로 싱긋 웃었다.
“너는 모든 것이 끝나면 내 소원을 하나 더 반드시 이뤄줘야겠어.”
[요정은…… 그 요청을 받아들이기로 했어요.]
잘난 듯이 말하지마.
나는 더욱 깊게 웃었다.
“모든 것이 끝나면 내가, 너희의 죽음을 원하더라도 반드시 들어줘.”
너희가 바라는 것이 평화라면서.
왜 애꿎은 인간만 이용하는 건데?
너희도 이 더러운 판에 내려와.
목숨을 걸어.
[요정이 빙의자님의 청을 수락합니다.]
마침내 떠오르는 요정의 창을 바라보며, 나는 비로소 웃었다.
그래, 이제 둘 중 하나만 살아남는 거야.
승리감이 가슴에 퍼졌지만, 허무한 승리감이었다.
나는 차차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 했다.
끼이익.
부식된 문이 쾅 소리와 함께 열렸다.
“영애!”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모를 수가 없는 목소리다.
멀리서 달려오는 사람, 마침내 내 앞에 멈춰서서 숨을 헐떡이는 이는 다름 아닌 라이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