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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231화 (231/281)

◈231화. 3. 대마법사와 악녀 메이커 (70)

‘……어떻게 내가 여기 있는 줄 알고 찾아온 걸까?’

얼마나 뛴 것인지, 턱 끝으로 뚝 떨어지는 땀방울이 보였다.

그는 가쁜 숨을 참고 있었다.

까칠한 얼굴은 금방이라도 울 것같이 흐렸지만 나를 보는 동시에 환희에 찬 미소가 떠올랐다.

내가 무어라 부르기도 전에 커다란 몸이 나를 덮쳤다.

따뜻한 체온에 말을 하려던 것이 모두 일시에 사라졌다.

내 손이 머뭇거렸다.

두근두근. 기분 좋게 뛰는 고동 소리.

‘눈치는 약에 쓰자’ 스킬은 아직 꺼진 상태였다.

그러니까, 이건 내 마음이 맞다.

……누가 억지로 만든 게 아니야.

세 번째 이야기는 그렇게 끝나버렸다.

그렇기에 내가 이 남자를 피할 이유 또한 사라졌다.

행복해달라는 발데르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마침내 골인 지점에 다다른 운동선수처럼 몹시도 피로해졌다.

나는 머뭇거리던 팔을 너른 등 뒤에 둘렀다.

라이칸이 멈칫하더니, 나를 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가 천천히 떨어졌다.

이상하게도 안심이 된 건지, 아니면 너무 피로한 건지.

눈이 가물가물해졌다. 술을 잔뜩 마신 사람처럼 정신이 흐릿해진다.

‘내가 정말 라이칸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게 맞나.’

이상했다. 생각해보면, 이 남자가 나를 찾아올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라이칸은 발데르처럼 마법사가 아니었다.

나를 찾을 수단은 없지. 그렇지.

그러니까, 이건 내가 바라는 꿈일지도 모르겠다.

이미 이 버려진 신전에 기절한 지 오래고 꿈을 꾸는 거 아니야?

‘요정 저놈에게서 마침내 주도권을 가져온 날이니.’

기뻐서 꿈을 꾸고 있는 거지.

일리가 있었다.

그간 얼마나 휘둘려왔던지.

이렇게 될 날만을 꿈꾸던 적도 있을 정도니까.

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리얼하네,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도 그럴 게 떨리는 눈동자나, 땀에 젖은 하늘색 머리카락이나 모두 그럴싸했다.

나는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남자가 놀라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배시시 웃었다.

“나, 어떻게 찾았어요?”

“그……다, 달린?”

웃는 그대로 고개를 갸웃했다.

“사랑의 힘인가?”

그러자 쥐고 있던 뺨이 화끈해지는 것이 느껴진다. 와, 정말 진짜 같네.

내 웃음이 더욱 진해졌다.

“좋아해요, 황자님.”

“일단 돌아…… 뭐?”

“제가 당신을 아주 많이 좋아했나 봐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사람이 고백하면 조금 그렇잖아요.

게다가 나는 다음에 어떤 이야기에서 또 누구랑 엮일지도 모르는데.

그래서 여러 이유로 무의식중에 당신을 향한 마음을 열심히 묻어두고 부정해왔나 봐.

“그 마음이 해가 될까 봐. 꽁꽁 숨길 만큼 좋아했나 봐요.”

“…….”

나는 조금 그을린 듯 건강한 피부를 살살 매만졌다.

조금 타긴 했지만 여전히 하얀 편이다.

……게다가 불타는 고구마처럼 활활 타고 있는 것 같고.

‘음, 이 사람이 내 남자가 된다면…….’

“나 참, 성격 나쁜 남자한테 빠지면 답도 없다던데.”

“……내 성격이 벼, 별로인가?”

“헉, 우리 처음 만났을 때 황자님이 어떻게 했는지 잊었어요?”

“…….”

그가 까칠한 얼굴 그대로 눈만 내렸다.

시무룩해하는 표정도 귀엽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어느 순간부터 이 남자를 귀엽게 느껴왔다는 사실도 함께 자각했다.

“뭐, 이건 황자님 탓도 아니고…… 내 업보이려니 해야죠.”

“……업보?”

“제 취향이거든요.”

나는 배시시 웃었다.

“당신이요.”

나는 이 남자의 뺨이 여기서 더욱 빨개질 수 있단 사실을 알았다.

게다가 그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옆으로 돌리기까지 했다.

아, 역시……. 현실은 아닌가 보다.

‘……내 현실이 이렇게 포근하고 설렐 리가 없으니까.’

천천히 눈을 감았다.

“……좋은 꿈이었네요.”

“뭐? 영애, 자, 잠깐만!”

* * *

털썩. 달린이 자신의 품으로 쓰러졌다.

라이칸은 당황한 표정으로 아래를 응시하기 무섭게 달린을 끌어안았다.

기절한 건가?

‘……잠든 거군.’

다행히 걱정이 무색하게도 달린은 잠이 든 것이었다.

그것도 아주 깊게 잠든 듯, 숨소리마저 고요했다.

라이칸이 숨을 삼켰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달린의 입가에 가져다댔다.

손 끝에 숨결이 느껴지고서야, 그는 낮게 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은, 잠드는 것조차도 심장을 철렁하게 만든다.

하마터면 죽은 것일까 봐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으니 말이다.

그는 달린을 끌어안은 채로 한참을 복잡한 표정으로 응시했다.

“……그대는, 대체 무엇을.”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대체 얼마나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건가?”

라이칸은 달린의 삶에 대해 몰랐다. 정확히 무엇을 짊어지고 있는지. 항상 무엇 때문에 바쁜지도. 그저 짐작만 할 뿐이었다.

그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가 달린에게 말 못 할 비밀이 있음을 알면서도 끝끝내 묻지 않은 것은, 그녀가 묻지 않길 바라는 얼굴을 했기 때문이었으나.

동시에 그것이 제 나이답지 않은 여동생이 가진 비밀과 비슷한 것이 아닐까 싶었기 때문이었다.

곧 달린을 내려다보던 라이칸이 입술을 축였다.

입이 바싹 마르는 기분이었다.

“나, 어떻게 찾았어요?”

어떻게 찾았냐니. 그녀는 진정 모르는 것일까?

라이칸이 조심스러운 손으로 달린의 가냘픈 손목을 살짝 잡았다.

달린의 손목에는 두 개의 팔찌가 있었다.

하나는 달린이 떼어낼 수 없는, 요정이 준 아이템 ‘사이렌 오더’.

그리고 다른 하나는…… 장미가 든 돌을 매단 수수하고 심플한 팔찌였다.

이 돌은 그가 달린에게 선물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이걸 지니고 있도록.”

“네? 이게 뭔가…… 황자님?”

그가 오래전 신전의 납치 사건에서 그녀와 여동생을 찾을 수 있게 만들었던 수단이, 이번에도 달린을 찾을 수 있게 해주었다.

정작, 본인은 자신이 이런 걸 걸치고 있었단 것도 잊은 듯하지만 말이다.

라이칸이 작게 날숨을 내쉬었다.

갑작스럽게 사라진 달린을 찾는 데 성공한 것에 대한 안도감이었다.

“……그대를 잃고 싶지 않아.”

언제든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은 사람.

늘 참는 듯한 미소만 짓는 사람. 동시에 자신이 그런 얼굴을 하는 줄도 모르는 사람.

곧 라이칸의 얼굴이 활활 타올랐다.

“좋아해요, 황자님.”

맑은 목소리가 오래도록 그의 머리를 어지럽혔다.

마침내 그가 달린을 데리고 황성에 도착할 때까지.

* * *

“권태기?”

권태기. 사전적 의미로는 ‘부부가 결혼한 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권태를 느끼는 시기’.

내가 열심히 로판을 읽던 시절에 이 권태기에서 따온 말이 있었다.

일명 ‘롶태기’라고 로판과 권태기를 합친 말은 나와 친구 사이에 꽤 자주 쓰이곤 했다.

“아니이, 롶태기! 읽을 게 없어! 다 재미가 없어, 재미가 없다고!”

우리집 쇼파에서 열심히 버둥거리는 친구를 보며 나는 픽 웃었다.

웃고는 있지만 나도 마침 비슷한 걸 느끼는 참이었다.

“다 비슷비슷해 보여서 재미가 없어.”

“그래? 나도 요즘 재미난 게 없긴 하다…….”

친구가 부스스 일어나 물었다.

“죄다 클리셰 뿐이야. 으으, 지겹다, 안 그래?”

나는 웃으며 그렇다고 하려 했다. 아니, 그러려 했다.

왜인지 입술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놈의 대공, 그놈의 책빙의! 으으, 회빙환 없으면 이야기가 안 되나?”

“…….”

아니야. 사실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은 대공님도 있었어.

“육아물도 질려.”

아니야, 모든 이야기가 들여다보면 우리는 생각지 못한 다른 이야기가 있더라.

너와 내가 몰랐던 거지.

세상은 클리셰로만 치부할 수 없음을 알았는걸.

“…….”

열심히 투덜거리던 친구가 일시에 입을 꾹 다물었다.

불만도 권태도 짜증도 사라진 얼굴은 마치 인형같았다. 아무런 표정도 없는 인형.

“왜 더는 아무 말도 안 해? 더 불만 있던 것 아니야?”

“있어.”

나는 친구의 얼굴이 차차 지워지는 것이 보였다.

마치 달걀 귀신처럼 눈이, 코가 사라지다가 차차 모습이 흐려졌다.

“하지만 안 할래.”

입술만은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모를 입술이 망설이다가 내게 말했다.

“너한텐 이제 현실이잖아.”

나는 잠에서 깼다.

* * *

‘우와, 익숙한 천장…….’

눈을 떴더니, 화려하기 짝이 없는 천장이 보였다.

음, 우리집 내 방 천장이 이렇지는 않았던 것 같고. 나는 여기가 어딘지 곧바로 알아차렸다.

‘황성이구나.’

왜 내가 황성에서 눈을 뜬 걸까. 나는 곰곰이 고민했다.

‘엄청 많은 꿈을 꾼 것 같은데.’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건, 엉엉 울다가 고개를 드니 왜인지 모르겠지만 첫 번째 메인 퀘스트를 수행할 때 납치당했던 신전이었다.

거기서 악을 쓰며 요정놈을 다그치고 협박해서 목숨을 걸게 만들었던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그 다음은 흐릿하달지, 가물가물했다.

라이칸이 꿈에 나온 것도 같았는데. 음, 아니다. 전생의 친구가 나온 것 같기도 하고……,

머리가 뒤죽박죽이라 그냥 개꿈을 꿨으려니 싶었다.

곧 문이 달칵 열리고 누군가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달린?”

“네, 황녀님. 안녕하세요.”

내가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들자, 곧 도도도 소리와 함께 내게 폭 안기는 체온이 있었다.

래빗이었다. 나는 아기 황녀님을 꼬오옥 마주 안아주었다.

“아무래도 제가 또 기절했던 것 같은데, 걱정 많으셨죠?”

“……이뎨 네가 기절하눈곤 걱정도 안된다! 하도 자주 구래서!”

“하하하하.”

내 웃음에 발끈한 건지 래빗이 고개를 홱 들었다.

어억, 하마터면 부딪칠 뻔했네.

곧 조그마한 손에 뺨이 확 붙잡혔다.

“기졸하눈 곤 상관업써! 하디만 내 눈앞에서 다치고 기절하란 마리다!”

“와아, 황녀님 지금 남자주인공 같았어요.”

“얼빠진 소릴 할 정신이 있누냐!”

결국 나는 래빗의 조그만 손에 뺨을 붙잡힌 채로 한참이나 혼나고 나서야 해방될 수 있었다. 으으, 얼얼해.

뺨을 살살 만지면서 눈치를 보았다.

“저 얼마나 기절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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