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화. 3. 대마법사와 악녀 메이커 (71)
그러자 래빗이 볼을 빵빵하게 부풀렸다.
오, 겨우 진정시켰는데 다시 성을 낼 것 같다.
“……이툴이다.”
어라? 생각보다 오래 기절하진 않았네?
‘많은 일이 있어서 오래 잠들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첫 번째 이야기나 두 번째 이야기에 비하면 빠르게 일어났고 다친 곳도 없었으며, 그나마 상처 입었던 곳도 회복된 지 오래였다.
그야말로 안전하고 무난한 엔딩.
하지만 나는 웃을 수 없었다.
내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마지막에 발데르가 주었던 마력. 이렇게 빨리 깨어난 데에는 그 마력이 한몫했던 걸까?
‘게다가 이제 나는 건강 수치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했어.’
기절하기 전 보았던 요정의 창을 기억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황녀님. 좋아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저 아무래도 이번 대가로 ‘건강’을 돌려받은 것 같거든요.”
래빗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계시 말이더냐?”
“네.”
정확히는 래빗이 생각하는 ‘신’이 아니라 발데르가 준 것이지만.
“어느 대마법사님의 선물이라고 할 수 있죠.”
“대마법사?”
“네.”
나도 모르게 조금 기대 어린 마음을 가졌다.
혹시나…… 만약에 혹시나…….
“……이상하균. 제귝엔 대마법사가 없울 텐데, 타국 사람의 도움을 받운 고냐?”
“…….”
“……달린?”
“아, 네. 하하.”
“……괜찮운 고냐?”
“아니,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내가 얼굴을 가리려 하자, 래빗의 조그마한 손이 나를 붙잡았다.
“너눈 왜 웃눈 얼굴로 우눈 곤지 모르게쏘.”
“저 안 우는데요?”
“그로케 쓸쓸하게 웃울 고면 차라리 울오라.”
내 머리 위로 툭 조그만 손이 내려왔다.
그 손이 나를 쓰다듬었다.
“나눈 네가 가진 짐의 무게룰 모룬다. 네가 내가 가진 감뎡과 평생 가질 짐울 잘 모루눈 것처럼. 우리눈 이해할 수 없눈 것을 각기 가지고 있울 고야.”
“…….”
“하지만 달린, 나눈 네 옆에 잇울 거다.”
조그마한 손이 순간이지만 아주 커다란 손처럼 느껴졌다. 작은 아기 황녀님 뒤로 커다란 여성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이제는 더는 황제로서의 모습은 자제하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내게 필요할 때 보여주는 것이 고마운 마음이었다.
“네…….”
그래서 나도 결심할 수 있었다.
잃었지만, 더는 잃고 싶지 않았다. 모든 걸 포기하는 대신에 한 번 해보기로 했다.
그 망할 ‘세계의 오류’를 내가 완전히 없애버리기로.
“……황녀님. 예전에 저는 그저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라기만 했거든요.”
“응.”
“그런데 이젠 기적을 만들어 갈 거예요.”
내가 단호하게 말하며 조금 후련한 얼굴로 웃자, 래빗은 복잡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했다. 곧 아기님에게서 끄응, 하는 신음이 새어 나왔다.
“무순 말인지 모르겠지만 네가 그로케 하기로 하묜 돼따. 나눈 너룰 돕겠다.”
나는 배시시 웃었다.
“……저 황녀님한테 반할 것 같아요. 어떡하죠?”
“그곤 곤란하다.”
래빗이 톡톡 내 등을 가볍게 두드리더니, 이내 내 목을 그대로 끌어안았다. 아기라 그런지 체온이 정말 따끈따끈했다.
“고마워요, 황녀님.”
제 친구가 되어주셔서요.
정말로 모든 사람이 발데르를 잊었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괜찮다. 나는 모든 것을 끝내고 그 사람에게 자유를 되찾아 줄 거니까.
남은 것은 마지막, 네 번째 이야기뿐이었다.
* * *
자리에서 일어났으니 당연한 수순으로 집으로 향했다.
래빗은 더 쉬고 가길 권했지만, 아마도 가족들이 걱정하고 있을 테니 그럴 수는 없었다.
게다가…….
내내 옆에 있던 사람이 없으니 그 빈자리가 더 느껴지는 참이라 더는 머물지 않는 게 좋을 듯했다.
사람이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잘 느껴진다더니, 딱 그 격이었다.
좋아한 것도 아니고, 사랑도 아니었지만 아마도 나의 유일한 이해자가 되었을 남자.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으움? 이상하규냐. 네가 아푼 걸 보니 누군가를, 꼭 누군가룰 불러야 할 것 같운데. 모르겠구나.”
마지막, 래빗이 인사하기 전에 했던 말이 아주 조금 위안이 되었달지. 미세하지만 그 남자의 흔적이 느껴졌으니까.
“달린!”
집으로 도착했을 때, 모친과 부친, 그리고 파올로는 뜬눈으로 기다렸던 것인지, 초췌하고 염려 가득한 낯으로 나를 반겼다.
나는 도착하자마자 나를 꼬옥 안는 모친을 마주 안았다.
“이젠 괜찮은 거니……?”
“네. 이제 괜찮아요.”
나는 모친과 부친의 염려를 뒤로하고 응접실에서 가족들과 티타임을 가졌다.
이들에게 할 이야기가 있었으니까.
“좋은 소식이 있어요.”
작게 심호흡을 한 후, 생긋 예쁘게 웃었다.
“저, 이제 완쾌한 것 같아요.”
“……뭐? 뭐라고, 했니 달린?”
“병이요. 저를 괴롭혔던 그 병이 완전히 나은 것 같아요.”
난 아주 잠시 창문을 보았다가 다시 부모님을 향했다.
“황성의 의원과 마법사들이 보증했어요. 제게서 더는 이전과 같은 증상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네요.”
달린의 병은 정확한 병명을 알 수는 없었지만, 매번 검진할 때마다 공통적으로 폐 쪽에서 증상이 보인다고들 했다.
이를 마법으로도 약으로도 어찌할 수 없어 시름시름 앓았을 뿐.
‘……아직 부친은 본인이 데려온 주치의가 달린의 병을 악화시킨 걸 모르고 계시지.’
그건, 앞으로도 모르는 게 좋을 것이다.
나는 하나같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입을 벌린 가족을 향해 최대한 밝게 웃었다.
“정말이에요. 저, 이게 건강해졌어요.”
“……정말, 정말이더냐?”
“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성의 최고 의원이 말한걸요.”
“하지만, 그 병이 이렇게 쉽게……?”
파올로가 당연한 의문을 표했다.
그렇지, 아주 오랫동안 가족 모두를 힘들게 했던 병이다. 쉽게 인정하긴 어렵겠지.
“사실 앞으로 어떤 증상도 나타나지 않는다고 확신할 순 없겠지만 중요한 건 저를 계속 괴롭혀 왔던 그 증상이…… 병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거예요.”
나는 최대한 활짝 웃었다.
“그래서 저는 너무 기쁘고…… 행복해요. 엄마랑 아빠는 그렇지 않으세요?”
“…….”
“이제, 저 건강해진 건데…….”
내가 웃다 말고 시무룩해진 순간, 모친이 의자를 박차고 벌떡 일어났다.
의자가 힘에 못 이겨 뒤로 쓰러졌지만, 모친은 아랑곳하지 않고 내게로 달려와 다시 한번 꼬옥 끌어안았다.
“오, 아니다 얘야! 어찌, 어찌 기쁘지 않을 수가 있겠니.”
“엄마…….”
“그저…… 믿기지 않아서 그랬단다.”
주름진 모친의 얼굴에 회한과 기쁨, 환희가 가득했다. 눈물이 잔뜩 고인 그녀의 얼굴에 나도 가슴이 뭉클해졌다.
이미 부친은 손수건을 꺼내 엉엉 울고 있었고, 파올로는 어색한 표정으로 부친에게 자기 손수건까지 내주고 있었다.
물론 손수건을 내주는 파올로의 표정도 애써 눈물을 참는 표정이었다. 파올로의 우직하고도 다정한 시선이 나를 향했다.
“……정말 잘 됐다. 내 동생.”
“…….”
“이제 정말 건강한 거지?”
다정한 물음에 나는 끄덕였다.
“응.”
이날, 에스테 백작 저택은 온종일 눈물바다가 되었다.
그 눈물이 매번 아픈 딸을, 여동생을 보며 지어왔던 슬픔과 절망 어린 눈물이 아닌 환희와 기쁨으로 가득한 눈물이었단 점에서 이전의 눈물과는 전혀 달랐다고 할 수 있었다.
* * *
다음 날, 나는 아침부터 퉁퉁 부은 가족들의 얼굴을 보고 웃음을 참지 못했다.
특히나 파올로의 얼굴이 아주 압권이었던지라, 오라비의 얼굴을 보고는 특별히 배를 잡고 웃어댔다.
처음엔 ‘그래, 이제 건강해졌으니 웃는 것도 보기 좋구나’하는 표정으로 보던 파올로가 발끈해서는 이제 그만 웃으라며 성질을 낼 때까지.
“아이고 배야……. 아직도 웃겨 죽겠네.”
내가 건강해졌다는 소식은, 더는 백작 가에서 약재를 구하거나 의사를 구하는 데 돈을 들이지 않아도 된단 소리였다.
물론 부모님은 여전히 걱정한 나머지 몇몇 건강에 좋은 약이나 약재는 포기하려 들지 않았다.
하지만 내 강력한 요청에 대부분의 것을 그만두러 오늘 각기 밖으로 나간 상황이었다.
그렇게 이 넓은 저택에는 나 혼자였다.
“……온실이나 가볼까.”
창문 너머로 보이는 온실을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내 중얼거림을 용케 들었는지, 베키가 얼른 준비하겠다며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베키도 퉁퉁 부었네.’
사실 어제 눈물 바다가 된 건 가족뿐만이 아니었다. 나를 가족처럼 여긴 하녀들, 저택의 모든 사용인들이 눈물을 짓거나 함께 기뻐해 주었으니.
그 중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엉엉 울었던 베키는 파올로처럼 붕어 얼굴이 되고 말았다. 파올로가 웃기다면 베키의 얼굴은 귀엽게만 보였다.
잠시 뒤 나는 준비를 마치고 정원으로 나왔다. 날이 무척이나 좋았고 따뜻했다.
하지만 날 걱정하던 경력은 어디 가지 않았는지, 베키를 비롯한 하녀들은 내게 숄이며 따뜻한 옷을 억지로 걸치게 만들었다. 덕분에 살짝 더울 지경이었다.
‘음, 언제쯤이면 내가 건강해졌다는 사실을 완전히 믿어주려나.’
시간이 조금 걸리겠지?
사실 새삼스럽긴 했다. 여기에 어울리는 표현인진 모르겠지만, 격세지감이라고나 할까.
‘숨만 쉬어도 사망 위험, 걷기만 해도 건강 수치가 후두둑 떨어질 때가 있었는데 말이야.’
그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구나 싶었다.
그리고 아마도, 앞으로도 사건이 일어나겠지.
‘네 번째 이야기가 남았으니까.’
나는 하늘을 응시했다.
‘……그리고 마지막 이야기이기도 하지.’
평화로운 순간이었다.
이 평화가 언제까지 갈지는 모르나, 나는 발데르가 준 이 평화를 기꺼이 즐기기로 했다.
그게 그 남자가 바라는 일일 테고, 언제가 될지 모를 순간에 요정의 창이 또 나타날 테니까.
‘기다려요. 당신을 꺼내줄 날까지.’
감이지만 다음 메인 퀘스트가 떠오르는 순간까지는 그리 길게 남지 않았을 것 같았다. 가만히 있어도 다가올 사건이라면 지금은 편히 쉬어두는 게 낫다.
그리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길 때였다.
“아가씨!”
멀리서 저택의 하녀 중 한 사람이 달려왔다.
그녀는 숨을 몰아쉬며 내게 손님이 왔다고 알렸다.
‘손님?’
고개를 갸웃했지만, 나는 얼른 걸음을 옮겼다. 지금 상황에서 날 불쾌하게 만들만한 손님은 없을 테니까.
하녀에게 누가 왔느냐고 물으려는 순간, 나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있는 곳으로 성큼 다가오는 사람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영애.”
라이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