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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233화 (233/281)

◈233화. 3. 대마법사와 악녀 메이커 (72)

우리는 한참이나 서로를 쳐다봤다.

라이칸은 왜 나를 보면서 꿀 먹은 사람이 된 건지 모를 일이지만.

내게는 이 남자의 등장이 마치 갑작스럽게 꿈에서 툭 튀어나온 것처럼 생각되어서 새삼스러운 기분을 느끼게 했다.

‘어째 정말 오랜만에 보는 기분이네.’

실제로 따지고 보면 오랜만도 아닌데 말이다.

어째서인지 저쪽에서 인사도 없고 말도 없기에, 내 쪽에서 먼저 선선히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라이칸 황자님.”

“……아.”

“오늘 날씨가 좋죠?”

내가 하늘을 가리키며 한마디 했다. 그렇지 않아도 날이 정말 좋았다. 이토록 맑은 하늘은 오랜만에 보는 듯했다.

‘생각해보니, 이 남자를 처음 만났을 때도 이렇게 맑은 하늘이었던 것 같은데.’

게다가 처음 만난 곳이 이 근처 아니었던가? 다시 한번 새삼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어쩐 일이세요?”

첫 만남을 언급할까 하다가, 라이칸에겐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닐 수도 있겠다 싶어 화제를 바꿨다.

“……그대가 황성을 떠났다는 얘기는 들었다.”

“아하.”

내가 일어나자마자 래빗만 만나고서 저택으로 돌아온 걸 지적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나는 조금 미안한 미소를 지었다.

“네. 죄송해요. 저를 발견해서 데려와 주셨다고 들었는데, 인사도 제대로 못 드렸네요.”

“…….”

“조만간에 찾아서 인사드리려 했어요. 정말이에요.”

라이칸은 말없이 나를 빤히 보았다.

어째 표정이 심상치 않은 느낌이라 나는 주변의 하녀들에게 눈짓했다. 하녀들은 머뭇거리면서도 내 눈짓에 고개를 숙이고는 불안한 표정으로 물러났다.

“……깨어난 지 얼마 안 된 그대를 무리하게 만들고자 찾아온 건 아니야.”

“네. 알아요. 황자님을 뵙는 일이 제게 무리한 일은 아닌걸요.”

생각해보면 라이칸에게는 서운한 일이겠다 싶었다.

기껏 구해준 사람이 일어나 인사도 하지 않고 사라진 셈이었으니까.

……내게도 가족들이 몹시 걱정할 것 같았다는 변명이 있기는 했지만.

‘그보다는 왠지 빠르게 황성을 떠나고 싶었지.’

금방이라도 발데르가 나타날 것 같은 기분이 싫기도 했고…….

또, 왜 그랬더라?

문득 눈앞으로 몽롱한 꿈이 스쳐 지나간 기분이었다. 는 고개를 흔들어 지워냈다.

“정식으로 인사드릴게요. 절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나는 옷자락을 붙잡고 허리를 깊이 숙였다.

그러고 나서 고개를 든 순간 나도 모르게 멈칫했다.

“……도와줬다는 건 어느 쪽을 말하는 거지? 헤벤 공작가에서의 도움을 말하는 건가? 아니면, 쓰러진 그대를 황성으로 데려간 것을 말하는 건가.”

“아……. 당연히 모두 감사한 일이지만, 쓰러진 저를 데려가 주신 거죠.”

라이칸이 왜인지 서늘하고 까칠하던 얼굴을 찡그려, 울상에 가까운 얼굴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럼 왜 날 보지 않고서 돌아간 거지?”

“……네?”

“그대에겐 그저 그 정도이기 때문인가?”

“…….”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어째서인지 이런 라이칸의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눈앞으로 한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좋아해요, 황자님.”

“제가 당신을 아주 많이 좋아했나 봐요.”

나조차도 잘 몰랐던 그 마음을 속 시원하게 뱉던 꿈.

나는 눈을 깜빡였다.

현재 ‘눈치는 약에 쓰자’ 스킬은 여전히 꺼져 있었다. 요정의 농간 또한 없다.

그러니 가슴이 두근거리는 이 감각은 온전히 내가 느끼는 나의 감각이 맞다. 이 설렘 또한 내 것이 맞겠지.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나를 바라보는 이 남자에게서는 숨기지 못한 감정이 묻어나왔다. 정말이지, 온몸으로 나를 좋아한다고 외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만에 하나, 정말 만약에 내가 꿨던 꿈이 진짜로 일어났던 일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내게는 마지막 이야기가 남아있다.

그렇기에 그건 꿈인 쪽이 차라리 나았다. 내게는 이 설렘을 고백할 생각이 없으니까.

무엇보다도 그건 꿈이 맞을 터다. 내가 쓰러진 순간까지 아무도 없었던 것 같으니까.

“한 번도 황자님을 ‘그 정도’라고 격하시켜 생각해본 적은 없을걸요. 잊으셨어요? 처음 만나 뵀을 때부터 열심히 말을 걸었던 건 제 쪽인데.”

“…….”

“그래서 황자님, 제가 황자님을 좋아하는 거라고 착각도 하셨잖아요. 제가 모를 줄 아셨어요? 저한테 ‘날 좋아하지 마라’고 핀잔까지 주셨잖아요?”

“그건…….”

“네, 지난 일이죠? 우린 그때처럼 서로를 오해하고 있진 않으니까요.”

나는 차분하게 웃었다. 세 번째 이야기를 벗어났건만 어째서 하고 있는 일은 그때와 똑같은 건지 모르겠다. 마음과는 반대되는 말을 하는 것.

“라이칸 황자님은 제게 좋은 사람이에요. 늘 잊지 않고 있어요.”

네 번째 이야기까지만 견디자. 얼마 남지 않았어.

그러니까…….

“좋은 사람, 그걸로 끝인가?”

라이칸이 내 말을 가로채기 전까지는 나는 차분히 말을 마무리한 뒤 인사를 이으려 했다.

“아니, 나는 더 이상 좋은 사람만 하지 않겠다.”

그가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내 손끝을 잡았다. 내가 힘주어 뿌리친다면 얼마든지 뿌리칠 수 있을 것 같은 아주 미약한 힘이었다.

“미안하지만 욕심이 생겼어. 이걸 만들어준 건 다름 아닌 그대야. 달린.”

“지금 무슨 소리를…….”

“날 좋아한다며.”

라이칸의 눈동자가 고요한 아래 깊은 빛을 띠었다. 빠져들 것 같이 정말로 깊고 절절한 시선이었다. 나는 간절한 그의 얼굴을 보며 할 말을 잃었다.

“그 마음이 해가 될까 봐. 꽁꽁 숨길 만큼 좋아한다면서.”

“……잠깐, 잠깐. 그건.”

“멋대로 꿈으로 치부하겠다? 아니, 그건 용납하지 않겠다.”

손끝에서 올라와 손가락 사이를 파고든 손이 나를 단단히 얽어맸다.

라이칸은 나를 지그시 바라보며 ‘싫다면 피해도 좋다.’하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나는 그대를 좋아하고 그대는 내가 좋다고 했다.”

……언젠가 이 남자가 참 직설적이라 생각했다.

본인이 옳다고 생각한 길을 올곧게 가는 사람이라고도 생각했다.

그러나 애정에서는 늘 조심스럽던 이 남자가 설마하니, 이렇게 직구를 던질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덕분에 나는 더는 내가 기억하는 것이 꿈이 아니란 사실을 알아차리게 되었으니까.

“내가 착각한 것인가?”

“……착각이라고 하면, 믿을 생각은 있으시고요?”

“……아니.”

라이칸이 시선을 내리며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착각이 아니잖아.”

시무룩하게? 내 눈이 잘못된 건가. 난 눈을 깜빡였다. 늘 차갑고 까칠하기 짝이 없던 사람이 밥을 빼앗긴 강아지처럼 고개를 떨어트렸으니까.

나도 참 중증이네, 이런 모습마저도 귀여워 보인다니.

나는 손가락을 꼼지락 움직여 이 남자의 손을 꼬옥 잡았다. 그러고는 잡히지 않은 손을 뻗어 라이칸의 뺨으로 살짝 가져다 댔다.

라이칸의 어깨가 움찔했다.

“그럼, 착각이 아니면요? 그럼 어떻게 하실 건데요?”

“……뭐, 그, 그땐.”

“네. 그땐 우리 사귀어요?”

나는 점차 달아오르는 뺨을 보면서 속으로 웃음을 꾹 참으며 말했다.

“사귀면요? 손도 잡고, 포옹도 하고, 그 다음 것들도 하게요?”

“그, 그 다음은……. 아니, 진도가 갑자기 너무 빠른 것 아닌가?”

“아뇨, 황자님의 계획이 궁금해서요. 먼저 말씀하셨잖아요.”

그와 일부러 시선을 마주했다.

“착각이 아니라면. 제가 어떻게 해주시길 바라세요?”

라이칸의 뺨을 살짝 잡았다. 라이칸의 뺨이 이제는 토마토처럼 빨갛게 익고 말았다.

그러면서도 피하지 않고 집요하게 내 시선을 좇았다. 마치 내가 사라지기라도 할 것 같이.

“갑자기 태도가 이렇게 달라지다니, 대체 무슨 생각이지?”

“황자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니, 저도 조금 솔직해질까 해서요.”

“솔직해진다니, 그 무슨…….”

사람의 마음이 참 간사하다.

애써 서로를 위해 꺼내지 않으려 했던 마음이지만, 이렇게 억지로 끌어올려지니 오히려 후련한 감각이 들다니.

나는 라이칸의 뺨을 만지작거렸다. 가까이서 보니, 역시나 잘생긴 얼굴이었다. 나는 배시시 웃었다.

“저, 황자님이랑 키스해보는 상상해본 적 있는데.”

그 순간 그는 그대로 뒤로 물러났다. 내게 잡혀 있던 손마저 놓은 채였다.

“그, 그, 그대는 이렇게 나오면 안 되는 일 아닌가!”

“……네?”

라이칸이 손등으로 자신의 입을 가리며 나를 가리켰다.

“파렴치해! 지, 진도가 빠르다!”

나는 눈을 끔뻑 깜빡였다.

“그, 그런 말은 내가 먼저 할 것이다. 알겠나?”

“저, 잠깐, 잠깐만요? 잠시만!”

그대로 등을 돌려 가버린 탓에 나는 미처 라이칸을 잡지 못했다. 뭐야, 왜 이리 빠른 건데? 누가 대단한 검사 아니랄까 봐.

쫓아가기도 잠시, 나는 빠르게 포기했다.

‘뭐, 앞으로 아예 안 볼 얼굴도 아니고.’

이제는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방향을 멀거니 보다 푸흡, 웃음을 터트렸다.

“……힘들어할 시간조차 주지 않네.”

생각해보면 눈을 뜨고서 처음으로 진심으로 웃어보았다.

그렇게 한참을 소리 내어 웃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발데르. 당신에겐 참 미안한 마음이네요.

하지만 당신은 내가 행복해지길 부탁했으니까, 이 평온을 조금만 누리면서.

당신을 꼭 꺼내줄게요.

여전히 웃음이 나오는 동시에 당황스러운 마음이 공존했다.

“……너무하네. 아무리 생각해도 도망은 너무한 거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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