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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234화 (234/281)

◈234화. 3. 대마법사와 악녀 메이커 (73)

* * *

라이칸이 다녀가고 나서 하루가 흘렀다.

어젯밤에는 래빗이 찾아왔다.

자기가 지나가다가 라이칸을 봤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둘째 오빠 놈이 완전히 바보가 되어 있다면서. 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봤다.

나는 웃음을 참으면서 저택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주었고, 래빗은 침묵하더니 한마디만 했다. 그렇게 되었구나, 하고. 그러더니 내일부터는 신나게 놀릴 거리가 생겼다면서 유쾌하게 웃었다.

그러면서 웃는 얼굴이 정말이지 딱 제 나이 어린아이 같은 얼굴이라,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아가씨, 차를 가져왔어요.”

“응, 고마워.”

아침 식사는 가족이 모두 함께 했다.

집안의 가장 큰 우환이었던 내 병이 해결되고 난 뒤로 에스테 저택에서는 웃음꽃이 끊이질 않았다.

그래, 그래야 하는데. 정확히는 부모님은 얼굴에는 웃음이 떠나가질 않는데…….

‘파올로는 좀, 억지로 웃는 얼굴 같았지?’

물론 파올로가 내 완쾌 사실을 기뻐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다.

진심으로 기뻐했던 것 같지만, 동시에 커다란 고민이 있어 보였다.

‘……혹시 연애사가 잘 안 풀리나?’

당장 네 번째 메인 퀘스트가 아직 시작하지 않았겠다, 거기다 굵직한 문제들이 나름 해결된 지금 내게도 고민이 하나 있었다.

어떻게 보면 파올로의 고민일지도 모를 것과 통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다름 아닌 리제의 일이었으니까.

‘리제를 본 지 아주 오래 됐지…….’

생각해보면 세 번째 메인 퀘스트를 진행하는 동안 리제를 거의 보지 못했다.

추수제에 참석할 때만 해도 함께 참여했건만, 그 뒤로는 거의 보지 못했다.

리제가 날 찾아오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에는 발데르 일로 정신이 없어 나 또한 연락을 차일피일 미뤄왔다.

돌이켜보니 리제 같이 소중한 친구에게 참으로 미안한 일이었다. 리제는 내가 북부로 떠나갈 때도 그렇게 세심하게 챙겨줬는데…….

사실 리제에게서 ‘한동안 바빠질 것 같아서 오기 힘들다’는 내용의 편지가 오긴 왔었다.

충분히 이해가 가도록 쓴 내용이었던지라, 나도 그럼 메인 퀘스트에 집중해야겠다 생각하고 답변을 한 기억이 있다.

지금 와서 돌이켜 보니 이 편지에 대한 답변이 오지 않았었다.

리제와 직접 만나진 않더라도 편지 교류는 계속 주고받았는데 말이다.

‘보통 메인 퀘스트 사이에는 여유 시간이 좀 있었지.’

첫 번째 메인 퀘스트가 끝나고 바로 다음 메인 퀘스트가 시작하지 않았듯, 이번도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에야말로 내가 리제를 먼저 찾아가야지.

‘일단 그전에.’

이야기를 나눠 볼 상대가 있었다.

* * *

“뭐야, 어쩐 일이냐?”

내가 찾아간 사람은 다름 아닌 파올로였다. 오늘 모처럼 비번이라고 저택에 있었던 것이다.

휴가라면 어디 놀러를 가든 데이트를 가든 하지.

집에 얌전히 머무는 걸 보면 썸을 타던 리제와 정말 무슨 문제가 있는 게 분명했다.

“이야기 좀 해.”

“무슨 이야기? 설마, 너 또 아파?”

“아니, 전혀.”

파올로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옆으로 비켜섰고, 나도 여상하게 대답하면서 파올로의 방으로 들어갔다.

파올로는 내 옆을 졸졸 쫓으며 말을 붙였다.

“그럼 뭔데? 전에 나한테 알아보라고 맡겼던 일 들으러 왔냐?”

“아니, 그것도 궁금하긴 한데. 그것 때문에 온 건 아니야.”

나는 방 중간에 멈춰서 고개를 돌렸다.

“오빠,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 본론만 간단히.”

“허, 뭔데? 무섭게…….”

“리제랑 헤어졌어?”

“뭐?”

파올로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동시에 그의 뺨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가 벌개진 뺨 그대로 소리쳤다.

“교, 교제한 적도 없거든?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말 더듬지 말아줘. 그걸 보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어서 좀 힘들거든.”

“생각나는 사람?”

있어. 분위기 좀 잡으려 했더니 파렴치하다면서 도망간 사람.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얼버무리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사귄 건 아니라, 썸만 타던 거였나?’

어느 쪽이든 분명 둘 사이에는 핑크빛 기류가 있었다.

“그럼 리제랑 무슨 일 있었어?”

“…….”

내게 생각나는 사람이 누구냐며 추궁하던 목소리가 딱 멈췄다. 그러더니 약속이라도 한 듯 침울해져서는 저 거대한 어깨가 축 처졌다.

……이런 말 미안하지만 침울해하는 고릴라를 보는 느낌이었다.

아니, 왜 진짜 남매끼리는 어떤 모습을 하든 꼴사납게 보인다더니 딱 그 짝인가 싶었다.

“무슨 일이 있긴 있는 모양이네. 무슨 일인데?”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너도 트리샤 양에게 무슨 말을 듣진 못한 모양이네.”

“그렇게 말하면 오빠가 뭔가 나쁜 짓이라도 해서 연락이 안 되는 것처럼 들리는데.”

“아니야!”

파올로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추궁하자, 파올로는 덩치가 무색하게 머뭇거리더니, 곧 얼굴을 쓸어내리며 모두 털어놓았다.

어떤 시기부터 갑자기 리제가 자신과 연락을 끊고, 연락을 시도해도 안 되고. 자신을 피하는 것 같다고.

“……아무 일도 없는데?”

“그래. 무슨 이유라도 있으면 차라리 나았을 것 같다. 하…….”

나는 의아해졌다.

‘리제가 이유 없이 그럴 애가 아닌데?’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궁리했다.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거 맞아?”

“아, 그렇다니까! 오히려…… 그, 크흠.”

“뭔데?”

“아니…… 고, 고백을 했는데, 트리샤 양이…… 우, 울었다고.”

“울어? 애를 울려?”

“아니야! 야! 기쁨의 눈물, 기쁨!”

뭐야. 파올로에게 고백을 받고 기뻐서 눈물까지 흘렸는데, 그 다음부터 연락을 끊고 만나주지도 않는다고?

……파올로가 고백하는 꿈 꾼 거 아냐?

하지만 파올로는 기쁘다는 말을 리제가 직접 입 밖으로 꺼냈다고 했다.

“리제가 무사한 건 맞지? 별일 없고?”

파올로가 그건 맞다고 대답했다. 트리샤 저택 시종이나 상단을 통해서 확인했다고도.

그렇다면 생각할수록 이상한 일이었다.

오히려…… 파올로는 전혀 눈치채지 못한 일로 리제가 서운하거나 화가 나서 연락을 무시하는 거라면 모를까.

고백을 받은 뒤에 기뻐서 울었고, 그 다음에 연락이 두절됐다, 라.

‘안 되겠네. 이건 직접 만나서 이야기해봐야겠어.’

어쩌면 나와도 연락을 하지 않은 건 파올로 일과도 관련된 것 아닐까?

염려되는 마음을 꾹꾹 누르며 하늘을 보았다.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다녀와야겠다.

그러나 내가 리제를 먼저 찾아갈 일은 없게 됐다.

다음 날, 리제가 찾아 왔기 때문이었다.

* * *

다음 날.

오전부터 부산스럽게 외출 준비를 하고 있던 나는 손님이 왔단 소리에 깜짝 놀랐다.

“리제라고? 정말?”

“네, 네! 트리샤 영애께서 방문하셨어요.”

리제는 에스테 저택 시종인들에게도 익숙한 인물이었다. 그러니 하녀들이 착각할 리 없었다.

나는 하던 준비를 팽개치고 얼른 응접실로 달려갔다.

달칵, 문을 열고 들어가자, 쇼파에 익숙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우아하게 차를 홀짝 마시고 있는 인물은 정말로 리제였다.

“리제!”

리제의 강아지처럼 순한 눈매가 나를 향했다. 곧 눈이 귀엽게 휘어졌다.

“안녕? 잘 지냈어?”

발랄한 목소리, 떨어져 있던 시간을 무색하게 만드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왜일까.

“밥은 잘 먹었어? 아프진 않았구?”

“으응, 리제 넌…… 건강했지?”

“물론이지.”

분명 예전과 같은 모습인데, 무언가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스킬 ‘눈치는 약에 쓰자’가 활성화 됩니다!]

체감상 오랜만에 느껴지는 푸르른 요정의 창이 보였다. 난 창에 쓰여 있는 글을 보고 숨을 삼켰다.

‘……뭐야, 왜 지금 갑자기?’

설마 이 스킬을 활성화시킬 수밖에 없는 일이 일어날 거란 거야?

지난 메인 퀘스트를 통해 알게 되었다.

요정은 절대 내가 죽기를 바라지 않는다. 네 번째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말이다.

요정에게 있어 나는 이른바 체스의 가장 중요한 말이다.

그러니, 지금 이 스킬이 다시 활성화됐다는 건…….

아니나 다를까 묘한 긴장감이 심장을 꾹꾹 찔렀다. 스킬이 발동되기 전부터 느꼈던 위화감은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앉지 않고 뭐해. 다리 안 아파?”

“응? 아, 응…….”

나는 머뭇거리며 리제의 맞은편에 앉았다.

리제는 내 이상한 반응을 눈치채지 못한 듯 순한 얼굴로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이전과 전혀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게 더 이상해.’

분명 파올로와 무슨 일이 있지 않았나?

추측하기로는 그 일 때문에 나와도 더는 연락을 하지 않은 걸로 생각했는데.

이제 와 갑자기 우리 집을 방문하고, 나와도 아무렇지 않게 마주 앉아 있다니.

‘뭐, 파올로와 나를 따로따로 두고 생각하기로 한 거라면 다행이긴 한데.’

나는 손을 쥐었다가 폈다.

그런데 왜, 손에는 자꾸 힘이 들어가고 식은땀이 나는지.

“들어오면서 멀리 보이는 정원과 온실을 오랜만에 구경했어. 올해도 새하얀 꽃이 피었더라.”

“응, 나도 봤어. 어제 산책했으니까.”

“네게 많은 일이 있었다고 들었어. 쓰러졌다고도.”

“아…….”

리제가 쓰게 웃었다.

“정말 바쁜 일이 있어서 헤벤 공작가의 계승식을 가지 못했는데, 그곳에서 일이 일어날 줄이야. 지금은 괜찮아?”

“응, 괜찮아.”

“다행이다.”

리제가 잔을 내려놓았다.

“안색도 좋아 보여.”

아, 그러고 보니 리제에게도 알려주어야겠다. 이제 내 병은 완쾌되었다고.

가족을 제외하면, 아니 가족만큼이나 나를 걱정했던 친구였다.

“이러다 네가 또 언제 아프거나 죽을지 몰라 무섭지만.”

“…….”

무거운 말에 잠시 멈칫한 사이, 리제가 평온하게 말했다. 다정한 목소리였다.

“혹시, 내가 방금 말한 하얀 꽃 말이야. 갑자기 이름이 생각 안 나는데 뭔지 기억나?”

“어?”

“그 하얀 꽃의 이름.”

내가 대답하지 못하자, 리제가 싱긋 웃었다.

“아, 그렇지. 네 기억은 불완전하다고 했지? 크게 앓고 난 뒤로…… 기억 상실이 왔다고 했으니까.”

입술이 말랐다. 식은땀이 묻어나오는 손을 애써 꾹 쥘 때였다.

……알았다.

‘뭐가 이상한 건지.’

이 기묘한 위화감의 정체.

리제는, 이 응접실에 들어와 단 한 번도 내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리제가 다시 한번 찻잔으로 입을 축이더니 우아하게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날 향해 생긋 웃었다.

“너, 누구야?”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내 친구 달린은 네가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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