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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238화 (238/281)

◈238화. 4. 회귀자가 회귀를 거부함! (3)

나는 멈출 수밖에 없었다.

휴고가 찾아 왔다고?

잠시 갈등했지만, 나는 그를 들이는 쪽을 택했다.

여기까지 온 사람을 돌려보낼 수는 없었다.

게다가 설사 돌려보낼지라도 다시 찾아올 사람이었다.

응접실에 앉아있으니, 곧 문이 열리고 익숙한 모습의 남자가 들어왔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공님.”

“달린.”

휴고가 나를 보는 순간 발그레 웃었다.

수줍은 듯 순한 미소였다.

이미 세 번째 이야기를 진행하면서 그가 타인 앞에서는 어떤 대공이 될 수 있는지를 보았던 나는 복잡한 심정으로 함께 마주 웃었다.

“어서 오세요. 여기 앉으세요, 대공님.”

“……이제 이름을 불러주진 않으시는군요.”

나는 멈칫했지만 웃음을 지우지 않으며 소파로 안내했다.

곧 하녀들이 다과와 차를 가져왔다.

그녀들이 다시 나가고 응접실에는 나와 휴고만이 남았다.

“얼마 전까지, 당신이 내 이름을 불러 주어 행복했지만, 한여름 밤의 꿈이었군요.”

“계속 그렇게 부를 수는 없으니까요.”

헤벤 공녀 언니를 대신해 어그로를 끄는 동안 다급한 마음에 그의 이름을 부른 적이 있는데, 그걸 말하는 모양이었다.

내 말처럼 더는 그렇게 부를 수는 없었다.

“대공님께는 죄송한 마음이에요.”

세 번째 메인 퀘스트는 종료되었지만, 이미 수도 전역에 퍼질 대로 퍼져버린 소문은 수습할 수 없었다.

즉, 여전히 수도 사람들은 나를 희대의 악녀로 생각하며, 내 손에 세 명의 남자……. 아니, 이제는 두 명의 남자가 함락되었다 여길 것이다.

솔직히 이제 와선 라이칸이라면 모를까 휴고에게는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영향력이었다.

“무엇이 죄송한지 모르겠으나, 달린 당신이 내게 미안해할 일은 아무것도 없어요. 모든 것은 내 선택이었으니까요.”

“…….”

“오늘 이 자리에 온 것 또한 말이에요.”

그 말에 나는 찻잔 손잡이를 만졌다가 시선을 들어 올렸다.

어째서인지 다른 날과 다르게 그와 시선을 마주하는 것이 다소 어려웠다.

어쩌면 세 번의 거대한 퀘스트를 거치며 날카롭게 단련된 감이 외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오늘 무슨 일로 저를 찾으셨나요?”

“……무슨 일로 찾았을까요?”

휴고는 따지자면 돌려 말하기보다는 직설적으로 말하는 쪽이었다.

비록 성격이 클리셰적인 북부 대공의 성격과는 달랐지만, 알면 알수록 평생 군림하면서 살아온 자의 태가 났다.

명령받기보다는 명령하는 데 익숙했고, 돌려 말하기보다는 솔직하게 말해서 상대를 당황시키는 사람이었다.

“…….”

그런 휴고가 돌려 말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다.

그가 미소를 지었다.

“내가 아는 달린이라면 아마도 알 것 같은데, 아닌가요?”

“모르겠어요.”

휴고가 수줍은 미소를 지우지 않으며 눈을 떨어트렸다.

그는 커다란 양손을 겹쳐 잡았다.

아주 잠깐 떨림이 스쳤지만, 나는 시선을 옮겼다.

“일단은 당신이 무사한지 알고 싶었어요. 오랜만이잖아요.”

“……네.”

“아마도 당신은 또 다른 일로 바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은 했어요. 그도 그럴 게 당신은 당신의 의지가 아닌 일로 바쁜 사람이니까요.”

계시. 휴고에게도 언급했던 그것을 휴고가 입에 올렸다.

“궁금했어요. 그 바쁜 와중에도 당신은 나를 한 번쯤 생각해줄까. 그 짧은 순간이라도 있다면 나는…… 숨쉬기 편안해질 것 같은데.”

그 말은 내 관심이 없다면 숨쉬기 어렵다는 말로 들렸지만 나는 아무런 답을 하지 못했다.

“달린, 나는 당신이 오롯이 내게만 집중했던 시간을 늘 생각해요.”

내가 두 번째 메인 퀘스트를 수행하던 시간이다.

“그때, 내가 당신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는 없었나. 그런 마음과 당신을 영원히 차지할 방법은 없었나, 하는 폭력적인 마음이 공존해요.”

“……그런 말은 대공님께 좋지 않으실 텐데, 어째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솔직해지기로 당신과 약조했으니까요.”

자신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한 약속이었다는 말에 나는 말을 잃었다.

눈앞의 남자는 기억하기로 참으로 눈물이 많았다.

내가 본 그 어떤 사람보다 눈물이 많았을 거다.

그런 사람이 눈물을 꾹 참으면서 천천히 말을 이어가는데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이번엔 또 어떤 어려운 일을 맡으셨나요?”

“……힌트를 드리는 건 어렵지 않지만, 대공님께서 정녕 궁금해하시는 건 그런 게 아니시죠?”

“너무하네요, 애써 대화를 돌리려 하고 있는데요.”

“돌려 말씀하시는 건, 대공님답지 않으시니까요.”

“…….”

결국 대공님이 눈물 가득한 얼굴로 웃고 말았다.

그의 미소에 눈 밑에 찍힌 눈물점이 도드라졌다.

누군가는 수없이 많은 눈물 때문에 생겨난 점이 눈물점이라 하던데, 그말이 사실이라면 휴고에게는 더없이 잘 어울리는 점이었다.

다만, 바람이 있다면 그가 더는 울지 않았으면 했지만.

그건 울게 만든 원인으로서 차마 할 수 없는 말이었다.

“달린, 당신이 내 생각만 해주었으면 좋겠어요.”

그가 자신의 마음을 다시 한번 꺼내 보였다.

“……사랑해요.”

하지만 그건 산산조각이 나, 조각조각 부서진 마음이었다.

“당신을 너무 사랑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 좋아하고 사랑해요.”

내가 받아줄 수 없는 마음.

“…….”

참 어렵다. 정말로 어렵다.

이럴 때는 요정이 더없이 원망스러웠다.

처음부터 이 남자와 엮이지 않게 만들었다면 이렇게 상처를 줄 일도 없었을 텐데.

차라리 내가 여주인공으로 나타나 이 남자를 흔들어 놓지만 않았더라도.

“……제 탓이에요. 제가 대공님께 여지를 드렸던 것 같아요. 그렇게 하면 안 됐어요.”

“달린.”

“지금까지 당신의 마음이 안타까워서, 나를 아끼고 좋아해 주는 마음이 내게도 소중해서…… 대공님께 상처를 주지 않는 길만 생각했어요.”

“잠시, 달린.”

“하지만 그런 길은 없었던 거예요.”

나는 침울하게 시선을 내렸다.

현재 스킬 ‘눈치는 약에 쓰자’가 켜져 있는 상태였지만, 어째서인지 내 감정도 저 남자의 애틋한 감정도 너무나 잘 느껴졌다.

스킬이 고장 난 건지, 아니면 스킬이 켜져 있어서 이 정도인 건지.

아마도 후자일 거라 생각했다.

당신이 나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흘러 넘쳐 결국 나 또한 애틋하고 미안한 마음이 범람하고 만 것이라고.

나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죄송해요. 몇 번을 이야기 드렸지만, 저는 그 마음을 받을 수 없어요.”

또 한 번의 거절이 나왔을 때, 휴고는 눈물이 어린 눈으로 가만히 나를 응시했다.

“……이번에도 계시 때문인가요? 새로운 과업 때문에?”

“네. 그런 것도 있지만.”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쓰게 웃고 말았다.

말을 해야 할 때였다.

“제게도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기 때문이에요. 그렇기에 대공님의 마음을 받을 수 없어요.”

휴고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뚝, 떨어지는 눈물을 보면서 나는 입을 움직였다.

“그 사람을 아주 많이 좋아해요.”

아무도 좋아하지도 사랑하지도 않고 싶었다.

어쩌면 요정은 이런 내 바람을 들어주어 이런 스킬을 주었는지도 모르고, 아니면 그냥 나쁜 새끼라 내 감정을 잠가버린 걸지도 모른다.

나는 그편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사랑으로 채워진 이 세계에서 나는 결국 외면하던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아니, 지나고 나서 보니 사랑이었다.

그리고 그 사람이 휴고에게는 안타깝게도 그가 아니었을 뿐이다.

말로 하면 이렇게 간단한 사실이지만 알고 있다.

휴고에게도 내게도 쉽지만은 않은 이야기라는 걸.

“……2황자입니까?”

“…….”

나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내 얼굴은 이미 정답임을 알려주었을 것이다.

휴고의 눈으로 후두둑 떨어지는 저 눈물을 이제는 내가 닦아줄 수도 감히 위로를 할 수도 없다.

“내가 끼어들 수도 없는 겁니까?”

“…….”

그럴진대……. 나는 얼굴을 흐리면서도 천천히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절 원망하셔도 되고 미워하셔도 돼요.”

“달린, 당신은…… 불가능한 소리를 하십니다.”

휴고가 눈물을 흘리는 아름다운 얼굴 그대로 흐릿하게 미소했다.

“어찌 당신을 미워할 수가 있나요? 당신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자, 내 운명을 바꿔준 사람인데.”

그의 눈가는 참으로 손쉽게 빨개지고 짓무르곤 했다.

다른 곳은 강인한 북부 대공님께서는 유일하게 눈물샘과 눈 밑 살갗만 참으로 연약했다.

나는 상반된 것들을 가진 이 사람이 결코 싫지 않았다.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울음기 어린 듣기 좋은 음성이 귀를 울렸다.

“나는 당신에게 의미가 없는 사람이었습니까?”

“……아니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를 만났을 때에는 막 첫 번째 메인 퀘스트를 끝냈을 때였다.

이 세상과 퀘스트가 돌아가는 것에 겨우 익숙해졌을 때.

새롭게 나타난 주인공과 새롭게 펼쳐진 북부라는 세계.

“대공님과 북부 사람들을 좋아해요. 이건 진심이에요.”

마찰이 많았지만, 결국엔 나를 받아들이고 아끼고 사랑해준 그 사람들을 나 또한 아꼈다.

그 정점에는 휴고가 있었다.

나는 부평초같은 사람이었다.

이 세계에 속하지 않은 사람, 하지만 속한 것처럼 움직여 관리자의 의지를 대신에 움직이는 병정말.

갈수록 쌓이는 회의감 속에서 내가 살아있는 의미를 느끼게 해주는 건 래빗과 휴고처럼 나 때문에 삶이 더 좋은 방향으로 바뀐 이들이었다.

어찌 의미가 없을 수가 있을까?

“저로 인해서 운명이 바뀌셨다고 했죠? 그 변화는 제게도 의미가 정말 커요. 저를 살아 있을 수 있게 할 만큼요.”

로맨스 판타지. 사랑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나는 애써 사랑을 외면해왔지만, 결국 빠지고 말았다.

그러나 이건 비단 라이칸을 사랑하게 된, 이 사랑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제는 둘도 없는 소중한 친구가 된 래빗을 사랑하는 것처럼, 나는 다른 방식으로 이 남자를 아끼고 좋아했다.

그저 이 순간 이걸 모두 설명하는 건 이 남자에게 더욱 잔인한 일이 될 것 같아 털어놓지 못했지만.

어째서인지 내 한마디로 휴고의 눈이 더욱 아래를 향했다.

그의 섬세하고 날카로운 얼굴로 많은 것이 스쳤다.

“만약, 아주 만약…… 당신이 2황자보다 나를 더 빨리 만났더라면, 당신은 나를 사랑했을까요?”

목 안으로 파고 들어갈 것같이 조그마한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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