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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239화 (239/281)

◈239화. 4. 회귀자가 회귀를 거부함! (4)

나는 그 질문에는 대답할 수 없었다.

대답해도 대답하지 않아도 그에게 상처로 남을 질문 같았으니까.

한참이나 침묵을 유지했다.

눈물로 눅눅하고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나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이제 북부로 돌아가실 건가요?”

휴고가 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눈물샘이 고장 난 것처럼 눈물을 뚝뚝 흘리는 눈동자는 한없이 깊고 고요했다.

“아니요.”

휴고가 마침내 손을 움직여 제 눈물을 닦아냈다.

이제는 내가 눈물을 닦아줄 수 없다는 사실을 드디어 수용한 사람처럼.

“남아있을 겁니다. 이곳에.”

내가 입술을 달싹였다.

“달린,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나와 어린 황녀님은 육감이 예민합니다.”

어째서 여기서 래빗이 나오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래빗도 휴고의 실력이나 사람에 대한 것을 몇 번 언급한 적이 있었다.

그저 내가 모르는 사이에 두 사람 간에 무언가 유대감 같은 것이 생긴 것인가 짐작해본다.

두 사람 모두 ‘주인공’이었으니까.

“……나는 당신에게 아직 필요한 사람이지요?”

……반박할 수 없는 말이었다.

‘나만의 로판’ 기능. 그곳에는 래빗의 이름도, 휴고의 이름도 있었다.

지금까지 이 기능이 활약한 일이 꽤 있었다.

라이칸을 대뜸 두 번째 이야기의 서브 남자주인공으로 만들거나.

세 번째 메인 퀘스트에서 소재를 바꿔버리거나, 두 남자를 갑자기 서브남주로 올렸다가 남자주인공까지 올려버리는 것 등.

하지만 이것들 모두 메인 퀘스트에서 부가적인 기능으로 나타났을 뿐이었다.

감이지만 이 기능은 아직 제대로 쓰인 것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이 기능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도대체 이 기능은 어떻게 쓰이려고 나타난 것일까?

만약 여기서 휴고가 북부로 돌아가 이대로 다시 보지 못하게 된다면? 그럼 어떻게 되는 걸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필요로 이 사람을 억지로 붙잡아 두는 게 맞는 일인가?

그게 요정이 내게 하는 짓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억지로 계실 이유는 없어요.”

“그 말씀은 제가 필요하다는 것이군요.”

“…….”

나는 고개를 저었다.

“대공님, 제가 절대적인 존재의 계시로, 제 의지가 아닌 일들을 하는 것이 어떻게 보이시나요? 저는, 결코 좋진 않아요.”

그 순간 눈 앞으로 푸르른 창이 떠올랐다.

[요정은 ‘나만의 로판’ 기능 속 인물을 절대 멀리 떼어놓아선 안된다고 조언해요!]

조언? 웃기시네. 경고겠지.

나는 속으로 비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아니, 솔직히 제가 왜 이런 일을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푸르른 요정의 창이 또 한번 떠올랐다.

내가 시선을 주지 않자, 띠링띠링 소리와 함께 시야를 가득 메워버렸다.

마치 관심을 줄 때까지 떠오르겠단 듯이.

웃기지도 않네. 네가 무슨 집착 남주냐?

관리자라더니 이제는 집착 키워드를 가진 남자주인공처럼 행동하고 있어.

더는 휴고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듯이.

“저는 괜찮아요. 결국 제가 선택한 길이니까요.”

그래, 눈 뜨자마자 죽는 길 대신에 내가 선택한 길이었다.

뭐,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는 했지만. 이 또한 선택이다.

“하지만 타인을 억지로 끌어들이고 싶지 않아요. 네. 저는 대공님을 사랑하지 않아요. 하지만 그건 대공님을 아끼지 않는단 소리는 아니에요. 래빗 황녀님처럼 소중한 분이시니까, 대공님만큼은 이 빌어먹을 계시와 엮이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에요. ……정말로요.”

단단한 내 목소리가 이어지기 무섭게, 작은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보진 못했지만, 이건 분명 웃음소리였다.

“……달린, 당신을 처음 보았을 때 난 당신이 참으로 연약한 여성이라 생각했어요. 북부로 함께하는 길에서 어찌 눈토끼보다도 약한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싶더군요.”

“……네?”

“더욱 애틋해졌습니다. 인정합니다. 하지만 내 생각은 옳되 완전히 옳진 않았지요. 틀린 부분이 있다면 당신은 내면이 단단하고 강인한 사람이에요.”

“…….”

“당신의 의지를 존경합니다. 달린. 나 또한 사랑한다고 하여…… 당신을 그저 내가 지켜줘야만 하는 연약한 사람으로만 여기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런 때도 있었지만요, 이렇게 말하는 휴고의 말엔 여전히 웃음기가 어려있는 동시에 희미한 유쾌함이 묻어나왔다.

나는 문득 이 남자가 어떤 얼굴로 이렇게 말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결국 당신이 선택한 길이라고 했나요?”

차차 요정의 창이 지워지기 시작했다.

“그럼, 이건 내가 선택한 길이군요. 달린.”

겹쳐있던 푸르른 창들의 지워지며, 반투명한 창 너머로 궁금했던 얼굴이 있었다.

어느새 스스로 울음을 그친 그는, 웃고 있었다.

두 번째 메인 퀘스트를 진행하던 시절, 내가 가장 예쁘다고 생각해 사람을 홀린다고 생각할 만큼 예쁜 미소를.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여전히 당신을 지키는 길을 가고 싶어요.”

“…….”

“그게 나의 의지이고, 나의 뜻이며.”

휴고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의 사랑입니다. 달린.”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남자는 마치 소설에서 툭 튀어나온 남자주인공 같았다.

아니, 나는 아마 수없이 많이 읽은 소설 속에서 이런 장면을 아주 아주 많이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남자의 여자 주인공이 아니었음에도 그는 기꺼이 무릎을 접어 그 사랑을 내게 바치는 쪽을 택했다.

“……왜, 힘든 길을 가세요.”

휴고는 눈물길이 남은 얼굴로 후련한 듯 웃었다.

“이 또한 제 선택이지요.”

‘당신이 책임지지 않아도 될, 그런 길 말이에요.’ 휴고의 이어진 말에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사랑합니다.’ 이어진 말을 들으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 * *

휴고가 다녀간 날, 나는 그날 결국 리제의 저택으로 갈 수 없었다.

휴고는 참으로 놀랍게도 우리 저택에서 식사까지 하고 갔다.

정말이지, 나라면 이렇게 할 수 있을까 싶은 생각뿐이었다.

그렇다고 식사 중에 무슨 대단한 대화가 오간 것은 아니었다.

그저 휴고는 내게 ‘계시’에 대해서 물었고, 나는 대답할 수 있는 선에서 모든 대답을 해주었다.

때로 요정과의 금제, 내 목숨을 위협할 수 있는 진실은 힌트를 내놓는 것에 그쳤지만, 휴고는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거나 생각에 잠기곤 했다.

내게 정말로 거절당한 이후로, 휴고는 정말이지 놀라울 정도로 다신 다신 자신의 마음을 담지 않았다.

이전까지 적극적인 공세를 생각하면 신기할 정도였다.

‘하아, 래빗이 보고 싶다.’

다음 날 오전, 나는 옷을 갈아입으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당장이라도 아기 황녀님을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내게는 그럴 시간이 없었다.

오늘은 꼭 리제를 다시 만나야 했다.

“아가씨,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응. 나중에 봐.”

오전부터 트리샤 후작가로 떠난 건 이 때문이었다.

마차에 타서 휙휙 지나가는 풍경을 한참이나 응시했다. 그러다 문득 팔에 걸린 ‘사이렌 오더’를 향했다.

‘이게 신호를 줄 때 좀 더 잘 볼 걸 그랬어.’

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어제 휴고로 인해 리제를 보러 가지 못한 대신, 밤에는 방에 홀로 앉아서 네 번째 원작을 떠올리며 골똘하게 궁리했다.

다행스럽게도 요정이 도와준 건지, 아니면 간절해서인지.

혹은 내가 비교적 좋아했던 소설이어서인지.

원작의 이야기들이 속속 떠올랐다.

‘일단 파올로는 서브남이 맞아.’

이 소설은 역하렘까지는 아니다.

남자주인공이 명확한 소설이되, 서브 남자주인공들이 병풍처럼 있던 소설이라고 할까?

열심히 떠올려보니, 주인공 ‘리델라제’, 즉 리제 옆에 있던 병약한 친구 캐릭터가 떠올랐다.

와, 나는 이게 난 줄 몰랐지.

‘결국 눈뜨자마자 추측한 것 중에 하나는 맞은 셈이잖아?’

난 시한부가 주인공인 소설은 보지 않았다.

다만, 주변 인물이 시한부일 수는 있다……. 라고 추측했는데 말이지. 그게 진짜일 줄이야.

‘나 정말 돌대가리 같다. 이런 기억은 좀 빨리 떠올리면 어디 덧나냐고…….’

처음부터 이것 먼저 떠올렸으면, 일이 좀 더 수월했을 텐데.

무한 회귀자. 게다가 요정이 말한 최악의 강자.

이런 리제를 친구로 두고 있었다면 털어놓고 협력자부터 되어 친구의 힘을 빌려 어려운 퀘스트를 함께 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럼 남자들을 만나는 순서도 바뀌었으려나?

발데르를 먼저 만나거나. 휴고를 만나거나.

이제는 의미없는 가정이었다.

이미 일어난 일이었으니까.

결국 목숨이 꼴딱꼴딱 넘어갈 위기를 겪긴 해도 여기까지 오지 않았나.

나는 뺨을 짝짝 쳤다.

‘아무튼 간에 파올로는 분명 서브, 서서브에 불과한 인물이었는데……. 리제의 지난 회차 기억에서는 꽤 중요한 인물인 것처럼 말했지?’

리제는 무한 회귀 동안에 ‘달린’을 정말 애틋하게 여겼다.

자연히 ‘달린’의 오빠인 파올로도 함께 애틋하게 여기게 된 걸까?

단순히 남매란 이유만으로 그렇게 되긴 힘들 것 같은데.

특히나 무한한 회귀로 인해 갈수록 감정이 마모되던 리제였다.

‘게다가, 변하지 않는 건 달린과 파올로뿐이라는 말도 했어.’

그건 내가 지난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메인 퀘스트를 진행하는 동안에 리제와 파올로 사이에 느껴지던 핑크빛 기류와 관련 있는 걸까?

아무것도 몰랐던 시절엔 두 사람이 분명 금방 연인이 되지 않을까 느낄 정도로 감정이 느껴졌었다.

내 연애와 관련한 감정에 둔해졌을 뿐, 다른 인물에게 느껴지는 감정에 둔해진 게 아니다.

그러니 이건 분명하다고 봐도 좋을 텐데…….

‘이 모든 해답은 리제가 가지고 있겠지.’

일단 리제를 만나고 나서 오늘 저녁엔 파올로와 이야기를 나눠보는 것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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