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화. 4. 회귀자가 회귀를 거부함! (5)
마차는 쉴 새 없이 움직였다.
나는 휙휙 흘러가는 풍경을 보며 멈췄던 생각을 재차 이어갔다.
‘이 소설은 기본적으로 주인공 리델라제의 복수와 재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어.’
리델라제. 리제는 가문에서 학대를 받고 쫓겨나기도 하지만 자신의 능력을 쌓아서 가문으로 돌아가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되찾고 마침내 가주까지 오른다.
그렇다면 지금 이 이야기는 기승전결 중 어디까지 왔을까?
리제의 무한 회귀자라는 상황 때문에 쉬이 짐작할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북부에 갔을 때, 자기가 상단을 돕고 있다고 했었지. 그러면서 내게 북부 정보가 적힌 서류를 줬어. 심지어 기밀까지 적힌 서류를.’
원작에서 리제는 상단을 차려 자신의 능력을 증명한다.
그렇다면 이 상단은 리제가 돕는 게 아니라 리제가 주인인 게 틀림없다.
‘굳이 주인이라고 밝히진 않는 걸 봐서는…… 바지 사장 같이 가짜 주인을 앉혀두고 본인은 비선실세 노릇을 하는 걸까?’
그렇다면 의문이 한가지 든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은 자신의 힘으로 상단을 꾸려가면서 뒷세계 세력과 부딪치게 된다.
거기에서 뒷세계의 주인인 남자주인공과 만나게 되는데, 처음에 반발했던 두 사람은 차차 어우러지며 남주가 여주의 복수를 돕게 되고, 당연한 수순으로 사랑에 빠진다.
만약 리제가…… 현재 한창 상단을 꾸리는 중이거나, 이미 상단을 잘 키운 뒤라면.
남자주인공을 만나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런데 그럼 파올로와 보낸 시간은 어떻게 되는 거지?
생각이 벽에 부딪쳤다. 의문은 다시 하나로 돌아왔다.
‘이 소설의 남자주인공은 어디로 간 거지?’
* * *
“아가씨, 도착했습니다.”
나는 기사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고개를 든 순간 감탄했다. 눈 앞에는 실로 거대한 저택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에스테 가문의 저택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크기였다.
굳이 따지자면 휴고가 수도에 가진 저택과 비교해야 할 정도일까. 그래, 헤벤 공작가 저택과도 비교할 수 있겠다.
‘과연 트리샤…….’
트리샤 가문은 현 재무장관, 즉 재상인 트리샤 후작을 필두로 정계 발이 넓을 뿐만이라 오랜 전통까지 가진 대가문이었다.
이미 리제가 대단한 가문의 아가씨라는 건 알고 있지만, 새삼스럽게 자각했다.
후작가이면서 공작가, 대공가와 비교되는 것만으로도 이 가문의 저력을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리고 이 가문 사람들이 주인공을 학대했지.’
현 후작의 부인은 두 사람이다. 한 사람은 리제의 모친, 그리고 다른 한쪽은 리제의 모친이 죽고 들어온 후처. 리제에게는 새엄마다.
그들은 거대한 권력을 두고 부딪칠 수밖에 없었는데, 리제가 후계 자리에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후처와 후처의 자식들이 리제를 괴롭혔고, 부친인 후작은 방관했다.
후작은 강한 자만이 자신의 뒤를 이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인물이었으니까.
……이건 굳이 클리셰라고 말하지 않을래.
어느 순간부터 누군가의 인생을 클리셰라고 말하는 것이 미안해졌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내 친구 리델라제를 보러 왔는데.”
인사를 올린 경비 기사가 움찔하더니, 잠시 기다려달라고 했다.
‘……쫓아내지 않네?’
원작에서 리제의 입지는 아주 약소했다.
리제가 어떤 사건으로 자신의 능력을 드러낼 때까지는, 하다못해 이 집안 시종도 코웃음 치는 존재가 바로 리제였다.
그래서 기사에게 리제를 언급해 알아보려 했는데……. 예상외로 그가 자연스럽게 안쪽으로 들어갔다. 리제에게 물어보겠다며.
‘어떻게 된 건지 알 수가 없네.’
곧 기사가 돌아왔다. 나이가 지긋한 노인과 함께였다. 모로 보나 집사로 보이는 노인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에스테 백작 영애를 뵙습니다.”
“…….”
“리델라제 아가씨께서는 현재 저택에 계시지 않습니다. 돌아오시면 소식 전해드리겠습니다.”
나는 인사 후 돌아서는 노인의 뒷모습을 보다, 그를 불렀다.
“저기, 리델라제의 머리카락이 무슨 색이지?”
“……예?”
집사는 무슨 그런 말을 묻느냐는 듯한 황당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내 신분을 생각했는지, 표정을 관리하면서 정중하게 대답했다.
“아가씨의 머리색은 검은색입니다.”
수수께끼처럼 느껴지기라도 한 걸까.
집사는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면서도 호기심 어린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나는 멀어지는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리제는 왜, 내 앞에서만 갈색 머리카락으로 등장했던 건가.
이건 어렵지 않게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반복되는 삶에서 더는 하나만은 반복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 거야.’
바로 달린의 죽음 말이다.
자신이 뭘 하나라도 바꾸면 이것이 나비효과처럼 작용해 달린의 삶도 바뀌기 바랐던 것 아닐까.
리제의 삶은, 알아보려 할수록 생각할수록 참으로 피폐하고 처참했다.
한때 좋아했던 주인공이 이런 일을 겪는다는 것이 가슴이 아플 만큼.
나는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꼭 리제를 만나야 해.’
시간이 없었다.
만나서 설사 신뢰도가 더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대화를 통해 그애에 대해 더 알아내는 게 중요하다.
하지만 리제를 어디서 만날 수 있지?
“내가 남몰래 상단을 하나 돕고 있잖아.”
이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카사블란’이란 상단이야.”
다름 아닌 그 애가 직접 내게 알려줬으니까.
* * *
“카사블란이라…….”
나는 마차에서 푹 인상을 찡그렸다.
어휴, 진짜 이거라도 기억해서 얼마나 다행이야.
리제가 분명 상단 이름을 알려줬던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면? 그대로 시간을 낭비할 뻔했다.
“허어, 원작 내용은 그렇게 기억이 나질 않더니, 이제 와서 기억력이 좋아졌나…….”
나는 투덜거리다가 한숨을 쉬었다.
‘아니야.’
기억력이 좋아진 게 아니다.
그저, 나는 리제가 한 한마디 한마디를 모두 기억하고 있을 뿐이지.
왜냐, 이 애는 내가 눈을 뜬 뒤로 이유 없이 곁에 있어 주던 친구였다.
비록 저 애는 내가 정말 달린인 줄 알았기에 베푼 애정이었지만, 내게는 그런 애정이 큰 도움이 되었다.
매번 목숨을 걸고 사투를 벌이는 동안, 그 애만 만나면 마치 비무장지대에 도착한 것처럼 안심이 되었다. 이렇게 평화로운 시간도 있구나 싶어 편안했다.
‘물론 우리가 서로 많은 것을 숨겼다는 걸, 이제는 알았지만.’
……그게 칼날 위의 평화일 줄은 어떻게 알았겠어.
나는 마차에서 내렸다.
다행스럽게도 오늘은 움직이기 편한 복장으로 나왔기에 많이 걸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여기서 기다려.”
“네, 아가씨.”
상단이 가득한 길거리였다.
리제의 카사블란 상단은 이곳에 있다는데……. 저 많은 간판들 사이에서 언제 다 찾는담?
묘한 거리였다.
귀족들의 거리라기엔 고급스러움이 덜하면서 활기가 넘쳤고, 평민들의 거리라기엔 정비가 잘 되어 있었다. 딱 중간층을 위한 공간처럼 느껴졌다.
나는 일단 중간에 의상실에 들러 더욱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이미 편안한 드레스를 입었다고는 하나 이 옷은 더욱 하늘하늘한 드레스였다.
평민 복장에 가까운 옷을 입고서 빙그르르 돌아보니, 확실히 활동도가 남달랐다.
나는 쫓아온 기사들에게 원래 옷을 맡기고 떼어낸 채, 다시 길거리로 들어섰다.
확실히 옷을 갈아입으니, 내게 쏟아지는 시선이 전보다 덜한 것 같다.
‘좋아, 이제 리제의 상단만 찾으면 되겠어.’
나는 거리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간 끝에, 한참 뒤에야 원하던 간판을 찾을 수 있었다. 카사블란 상단이었다.
‘이거 참, 미묘한데…….’
근사하다고도 그렇다고 허름하다고도 할 수 없는 평범한 상단이었다.
책 속에서 리제가 키운 상단은 분명 대단한 대 상단이 되는 걸로 알고 있는데…….
명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이름도 카사블란이 아니었던 것 같다.
혹시 이것도 리제가 미래를 바꿔보기 위해 노력한 것 중 하나인 걸까? 나는 이리 생각하며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리고 10분 뒤, 실망한 얼굴로 나왔다.
“아, 몇 번을 말하슈! 우리 상단엔 그런 사람 없다니까? 리델라젠가, 리젠가 뭔가 둘 다 없다고!”
쉽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리제가 나를 만나주지 않거나, 혹은 정체를 숨긴 채로 이 상단에서 일하는 중인 모양이었다. 이름까지 바꾼 채로 말이지.
더는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그렇다고 돌아갈 수도 없고…….
상단이 길 가장 안쪽 깊숙이 있었기에, 길을 빠져나오면서 막 모퉁이를 도는 순간이었다.
“읍!”
나는 코를 부딪치고는 그대로 뒤로 넘어졌다.
아, 스킬이 없을 땐 여전히 약골인 몸이라니까…….
곧 다가올 엉덩이의 아픔을 예감하며 눈을 감는데, 웬걸 익숙한 향기가 느껴졌다.
동시에 허리를 감싼 이 팔 또한 너무나 익숙한 느낌…….
고개를 든 순간 눈을 크게 떴다.
“……황자님?”
“달린?”
놀랍게도 여기서는 절대 볼 수 없으리라 생각한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라이칸이었다.
우리는 잠시 동안 눈만 깜빡이며 서로를 응시했다.
‘어, 음, 이거……. 지난번에 이 남자가 도망간 이후로 처음 보는 거지?’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건지 라이칸의 표정도 살짝 굳었다.
나쁜 쪽의 굳음은 아니고 해석하자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표정 같았달까.
나는 일단 라이칸의 팔을 톡톡 두드렸다.
“잡아주셔서 감사해요, 일단 팔 좀 풀어주실래요?”
“아, 어……. 그러지.”
나는 바닥에 바로 서고는 구겨졌던 옷을 탁탁 폈다.
라이칸은 여전히 믿기지 않는 눈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영애가 여기엔 어쩐 일이지? 게다가 어째서 혼자인 건가.”
“음, 그건 제가 묻고 싶은데요…… 황, 아니.”
나는 주변에 사람이 지나다니는 골목임을 의식해 명칭을 바꿨다.
“라이칸. 왜 여기 있는 거예요?”
그러자 라이칸이 움찔했다. 어색한 시선이었다.
“……내가 먼저 물었다만, 달린.”
“하지만 먼저 대답해주세요.”
흐음, 오늘은 빨개지지 않는 건가?
여기가 길 한복판이라서 그런 걸까.
라이칸은 마지막으로 본 모습과 비교했을 때 비교적 차분하고 침착했다.
오히려 내가 늘 보아왔던 까칠한 얼굴 그대로였다고 할지.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손을 뻗었다. 톡, 아주 살짝 그의 뺨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나는 싱긋 웃었다.
“지난번에 먼저 도망갔잖아요?”
벌이에요, 내가 이렇게 속삭이는 순간.
“……치사하군.”
라이칸의 얼굴이 꽃이 핀 듯 발긋, 아니, 발그레 달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