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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241화 (241/281)

◈241화. 4. 회귀자가 회귀를 거부함! (6)

“치사하다니요? 도망가신 것 맞으시잖아요.”

“그건, 도망이 아니었다.”

라이칸이 억울하다는 듯 항변했다.

사실 여기서 물러날 수도 있었지만…… 어쩐지 이 남자의 반응이 재밌어서 모른 척 고개를 기울였다.

“도망이 아니면 뭔데요?”

“……작전상 후퇴?”

“웃기라고 하신 말씀이시죠?”

“…….”

본인도 궁색한 변명이라는 것을 아는 듯 라이칸이 내 얼굴을 문질렀다.

얼굴을 문지를수록 신기하게도 붉음이 묻어나왔는데, 나는 이것이 마치 박물관 속 예쁜 유물이라도 되는 듯이 구경했다.

‘솔직하게 마음을 털어놓긴 했지만…… 사실 잘 실감이 나지 않는단 말이지.’

그도 그럴 게 나는 모든 퀘스트에서 내가 주변인물 내지는 엑스트라로서 메인 이야기를 돕는다는 생각으로 살아왔단 말이지.

물론 두 번째와 세 번째 메인 퀘스트에서 내게 주어진 역할은 주연이었지만, 그마저도 누군가의 대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진행했다.

게다가 가장 우선순위 목표는 생존이었으니, 이런 감정이 더욱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다가 처음으로 내 감정에 맡긴 선택을 했다. 그리고 고백도 했다.

생각지 못한 상황의 연속이었다.

이 남자를 볼 때마다 어쩐지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는 걸 거다.

‘그치, 소설 주인공이랑 연애를 하게 될 줄은 누가 알았겠어.’

그러고 보니 우리가 사귀는 건 맞나? 사귀자는 소릴 했던가……?

어쩐지 가물가물했다. 모든 순간이 좀 신속하게 지나갔어야 말이지.

아무튼 라이칸의 이런 얼굴을 보는 것은 즐거웠지만, 아쉽게도 시간이 많이 없었다.

꽁냥꽁냥이든 설렘 가득한 썸타기든, 일단 살아있어야 가능할 테니까……?

“라이칸, 당신은 여기 어쩐 일이에요?”

“…….”

“라이칸?”

“하아, 네가 이름을 부를 때마다 집중할 수가 없다.”

라이칸이 건물 벽을 살짝 짚었다. 얼굴을 문지르면서 입을 가려버리는 모습이 아주 곤란해 보였는데, 이 남자가 자꾸 내 안의 못된 마음을 부추기는 기분이었다.

‘이래서 래빗이 늘 라이칸을 놀리는 거였나?’

처음 만났을 때를 생각해 보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아니다, 나는 그때도 은근히 라이칸의 속을 긁었던 것 같은데. 버럭버럭 화를 내던 까칠하고 잘생긴 얼굴을 떠올리다 풉 웃었다.

“음, 그럼 어떡할까요, 가명이라도 불러드릴까요? 한스?”

“……그 지극히 평범한 이름은 어디서 나온 건가.”

“하긴 라이칸 당신에게는 어울리지 않네요. 평범한 이름을 가지기엔 너무 잘생겼어.”

“…….”

아, 재밌다.

“……나를 죽일 셈인가?”

“죽이다뇨?”

“끙, 심장이 터질 것 같아서 살 수가 없군.”

“그럴 수는 없죠. 좀 만져드릴까요?”

“그래…… 뭐?!”

내가 정말로 손을 뻗자, 라이칸이 기겁하며 물러났다.

아, 농담이었는데. 아니, 솔직하게 한번 토닥일 수 있으면 좋았고?

‘전에 안겨보니까 참 탄탄하던데.’

엉뚱한 생각은 그만하고 이제 본론으로 들어갈 차례였다.

내가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우고 진지한 표정을 짓자, 라이칸도 덩달하 한숨을 쉬고는 표정을 정비했다.

“……그대의 말재간은 따라갈 길이 없군.”

“칭찬 감사해요. 그래도 앞으로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지 않을까요?”

라이칸이 멈칫했다.

“그건…… 나랑 오래 시간을 보내겠다는 소리인가? 삶을 함께 하겠다고?”

나는 말문이 막혔다.

이거 뭐지. 고백했더니, 사실은 너랑 결혼까지 생각했어 하는 답변이 돌아온 건가.

놀란 내 얼굴을 보며 라이칸이 손을 내저었다.

“아니, 아니. 이 말은 잊어주겠나. 마음이 먼저 앞섰어. 그…… 어쩐지 그대는 가끔 순식간에 사라질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서.”

“…….”

또 한번 싱글 웃으며 장난치려던 마음이 싹 사라졌다.

왜일까, 라이칸의 그 한마디가 어쩐지 진실을 관통한 게 아닌가 싶었으니까.

‘그러게. 모든 이야기가 끝나면 나는 어떻게 되지? 집으로 돌아가나?’

그렇게 되지 않을까? 요정은 그렇게 말했으니까.

나는 순간 떠오른 생각과 마음을 숨기며 생긋 웃었다. 마치 아무런 생각도 떠올리지 않은 것처럼.

“라이칸, 두 번째로 여쭙는 건데 그래서 여긴 어쩐 일이세요?”

“나야말로 묻고 싶은데.”

라이칸은 진정한 듯 평소와 같은 표정으로 돌아왔다. 대신 염려가 담긴 표정으로 나를 응시했다.

“어째서 이 시간에 이 거리에 있는 거지?”

“이렇게 해요. 황, 아니 라이칸이 알려주시면 저도 알려드릴게요.”

라이칸이 끄덕였다. 여기 온 목적이 큰 비밀은 아니라는 듯.

“나는 신전의 일을 쫓다가 여기까지 도착했다.”

“신전이요?”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었다.

아니, 아주 오랜만은 아닌가? 내가 얼마 전에 기절했다가 눈을 뜬 곳이 대신전이었으니까.

라이칸이 말했다.

그는 첫 번째 메인 퀘스트에서 일어났던 대신전의 황녀 납치 사건 이후로 오랫동안 이들의 뒤를 쫓고 있었다고 한다.

물론 범인은 그 자리에서 잡혔지만, 뒤에 다른 세력이 있을 거란 생각을 지우지 못했단다.

황태자나 폭군 황제의 생각도 그와 일치했고, 라이칸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대표격으로 파헤치기 시작했다고.

그러던 중 황녀 납치 사건에 관여한 이들 중 주교 하나가 사건 이전에 도망쳤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쫓는 중이라고 했다.

‘……파올로에게도 신전에 대해 쫓아달라고 했었지. 혹시 라이칸이랑 같은 것을 알아냈을까?’

파올로는 몰래 혼자 조사 중이니, 아무래도 라이칸의 조사력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래서 숨겨진 세력이 어디인데요?”

“뒷세계 일과 엮인 것 같다.”

뒷세계. 이 제국의 암흑 경제 쪽을 말한다. 범죄와 관련된 것들.

나는 심각한 표정으로 끄덕였다.

“게다가 이뿐만이 아니더군……. 혹시 이사야 후작을 기억하나?”

“네? 음, 네. 기억하죠.”

난 머릿속으로 세계의 오류가 분했던 그 인물을 떠올렸다. 마지막엔 스르륵 녹아버린 모습마저도. 현재 이사야 후작은 실종 상태였다.

“실종된 이사야 후작에 대한 조사가 들어갔다. 그런데, 그의 저택에서 신전과 관계된 서류를 발견했다는군.”

이쪽은 황태자가 발견했다고. 헤벤 공작가와 관련된 일을 황태자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조사했다나? 왜 헤벤 공작가의 일을 황태자가? 설마 하는 마음이 스쳤지만 일단 넘어갔다.

“모든 단서들이 한곳으로 이어지더군. 그래서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

단서들이 모여서 온 곳이 여기라고.

모두 납득이 가는 이야기였지만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아니, 그런데 왜 라이칸이 직접 움직이는 거예요?”

그것도 이렇게 혼자?

라이칸이 분명 강력한 기사이기는 하나, 제국의 황자였다.

홀로 움직이는 일이 거의 없을 텐데. 게다가 아랫사람을 시킬 수 있는 일이고.

“……직접 나설 수밖에 없지 않은가.”

“왜요?”

“네가 관련된 일이니까.”

래빗 때문인가, 싶었던 생각이 싹 날아갔다.

‘……이렇게 훅 들어온다고?’

조금 당황했다. 아니, 아까까지는 작은 접촉 하나에 얼굴을 완전히 붉힐 기세로 보던 사람이 어째서 이런 말에는 얼굴 하나 붉히지 않는 건데? 당연한 진실을 말하듯이.

심지어 라이칸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한 건지 자각 못 한 얼굴이었다.

“라이칸.”

“왜 그러지?”

“원래 그렇게 제 생각만 해요?”

“뭐?”

“아니, 조금 전에 한 말……. 결국 나 때문에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한다는 것 같이 들려서요.”

라이칸이 멈칫하더니, 끄덕였다. 그것도 아주 진중하게. 까칠한 얼굴 위로 신중함이 어렸다.

“당연한 것 아닌가? 나는, 숨 쉬듯 너를 생각한다.”

……꺄아아악. 이 사람 내가 아는 라이칸이 맞나? 정말 맞아?

내 눈이 거침없이 흔들렸다. 혹시 누가 라이칸의 껍데기를 쓰고 말한 건 아니지? 등을 돌리면 지퍼가 달려 있을지도…….

“뭘 하는 거지?”

“아뇨, 아뇨. 다른 사람인가 싶어서 잠시 의심이.”

“……내가 못할 소리를 한 것처럼 얘기하는군. 난 진심이다.”

“……의심한 건 아니에요.”

하지만 선생님은 이렇게 당당하게 설레는 말을 뱉는 사람이 아니셨잖아요…….

내가 이런 눈을 하고서 쳐다보자, 라이칸은 용케 알아들었는지 찔리는 눈을 하고서 슬쩍 시선을 돌렸다.

“……그대 주변에 괜찮은 남자가 많으니까.”

“네?”

“연습했다고.”

“…….”

오, 연습하셨구나. 그런데 뭐를? 어떻게?

……어떻게 연습했는지 알려달라고 하면, 성을 낼까? 슬쩍 물어봤는데 정말 성을 내더라.

그런 건 묻는 게 아니라고.

“으음, 지금이 제 방 응접실이었다면 참 좋을 법했어요.”

“왜지?”

“어깨에 한 번 기대보게요. 그런 마음이 들어서.”

“…….”

라이칸이 자기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대의 예상치 못한 순간에 거침없는 성격 또한 좋아하지만, 당황스러울 때가 있어.”

“아, 너무 좋다는 말씀이시지요?”

“…….”

입을 가린 채로 고개를 끄덕이는 남자는 솔직히 정말 귀여웠다.

……누가 그랬던 것 같은데, 눈앞의 이성이 귀여워 보이면 끝이라고.

“일단 이야기 모두 잘 들었고, 저도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라이칸과 목적지가 같아요.”

나는 라이칸의 이야기를 쭉 들으며, 라이칸이 어디로 향하던 길이었는지 알아차렸다.

뒷세계.

바로 이 네 번째 이야기의 남자주인공이 있는 곳이다.

‘리체가 차린 상단과는 멀지 않은 곳에 있지.’

이 멀쩡하게 보이는 거리에서 조금만 길을 더 들어가면, 이 제국의 어두운 일면을 맡은 뒷골목이 나타난다.

사실 얌전히 이 상단이 쫓아내는 대로 나온 건, 이쪽에도 한번 가볼까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왜인지, 감이지만 그쪽을 방문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남자주인공이 어떤 상태인지도 확인해봐야 할 필요가 있고.’

만약 거기에도 리제가 없다면 이번에야말로 카사블란 상단을 샅샅이 뒤져볼 생각이었다. 신고당할 각오를 하고 말이다.

라이칸은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영애가 왜 거기까지 가야 하는 거지?”

“친구를 찾으러요.”

“……그곳에 친구도 있었나? 발이 넓군.”

“라이칸은 의외로 편견이 없으시네요.”

이렇게 바로 받아들인단 말이야?

그러자 라이칸은 복잡한 표정을 하더니, 나더러 지난 내 행보를 돌이켜보라고 했다.

나는 금방 수긍했다. 내 지난 행적이 좀 스펙타클하긴 했지.

“……난 이제 그대가 저 암흑가의 수장과 친구라고 해도 그렇구나 할 수 있을 것 같다.”

“정말요? 암흑가 수장 남자일 텐데?”

“……방금 그 말 취소하도록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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