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화. 4. 회귀자가 회귀를 거부함! (7))
솔직한 반응에 나는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고는 라이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잘됐네요, 마침 저도 호위 기사들은 모두 떼어두고 혼자였거든요. 같이 가실래요? 아, 참고로 찾는 친구는 암흑가 수장은 아니고 여자예요.”
물론 그 암흑가 수장도 보러 가는 길이긴 하지만. 목적은 어디까지나 리제지.
싱글싱글 웃는 내 얼굴을 보는 라이칸의 표정엔 여러 감정이 스쳤다.
“그대는, 내 여동생과 비슷한 구석이 있지. 특히 한번 고집하면 절대 꺾지 않는 그 의지와 고집이.”
곧 라이칸의 손이 내 손을 잡았다. 나를 감싸다 못해 깍지를 껴오는 손이 무척이나 크고 단단했으며, 포근했다.
“그러게요, 첫 데이트가 암흑가가 될 줄이야. 아주 신선하고 짜릿하네요.”
“……첫 데이트.”
라이칸은 내 말을 따라하듯이 중얼거리더니, 이내 나를 보면서 살짝 미소했다. 보일 듯 말 듯 은은한 미소였다.
“참으로 좋은 말이군.”
그 미소에 내 쪽에서 멈칫하고 말았다.
……아무래도 우리는 사귀고 있는 게 맞는 것 같아.
그렇지 않고서야. 저 남자가 저런 미소를 또 누구에게 보여주겠어. 암, 다른 여자에게 보여주면 끙 질투할지도 모르겠는데.
나는 고개를 살살 털어내며 라이칸의 손을 잡아당겼다.
“뒷골목 위치는 알아요?”
“알고 있다. 대신관을 쫓으며 발견한 서류도 있고, 이사야 후작 저택에 더욱 자세한 서류가 있더군.”
세 번째 메인 퀘스트에서 세계의 오류는 나와 마주해서 사라질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단서를 그대로 남겨둔 채 사라질 리 없으니까.
……아니면 혹시 누가 보게 되더라도 상관없는 정보였다거나?
‘아니, 그건 아니야. 미리 처분해둘 생각도 시간도 없었던 거겠지. 세 번째 이야기를 망치려 할 때 그 표정은 진심이었으니까.’
아직도 이야기를 망치려 드는 그 얼굴이 선명했다.
그 존재의 손에서 몇 사람의 운명이 망가졌을까. 이미 망가진 사람들을 떠올리면 가슴이 아프면서도 분노가 치밀었다.
“라이칸, 저는 정의를 구현하러 가요.”
“……그러한가.”
“뒷골목에 가서는 어쩌실 생각이셨어요?”
라이칸은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
그곳에서 정보를 알아볼 예정이었다고. 아마 그곳에 납치 사건 이전에 도망친 주교의 마지막 행적이 있거나, 그곳에 숨어 있는 것이 분명한 것 같다면서.
겸사겸사 이사야 후작 저택에 남겨진 서류 속 정보들도 쫓을 생각이었다고 한다.
“음, 근데 만약에 그 주교는 잡히면 어떻게 되나요?”
“본래라면 사형이나…… 아버지께서 곱게 죽게 두진 않으실 것 같군.”
라이칸의 음성이 잠시지만 날카로워졌다.
“제국의 하나뿐인 황녀를 납치한 끔찍한 범죄에 가담한 자다. 사는 것이 고통이 될 수 있단 걸, 아버지나 형님께서 보여주겠지.”
“그렇구나…….”
“그리고,”
내 머리카락에 닿을 듯 말 듯 그의 손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대에게 상처를 입힌 자를 나 또한 그냥 둘 생각은 없어. 반드시 내 손으로 잡을 거다.”
나는 잠시 놀랐다.
어쩐지, 그 말은…… 말도 안 되는 것 같지만, 라이칸이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는 여동생인 래빗보다도 나를 우선시하는 말인 것 같았으니까.
‘……육아물 오빠인데, 말도 안 되지.’
황태자보다 덜하다고는 하나, 이 사람도 시스터 콤플렉스 수준의 과보호 오빠였다.
단지, 황태자라는 정말 또라이에 가까운 육아물 정석 오빠가 있기에 살짝 묻히는 감이 있는 거지.
그나저나 나를 제대로 건드리지도 못하면서 말은 은근히 잘한단 말이야?
……사람 설레게끔.
괜시리 심장 한구석이 간질간질한 이 기분이 이상하지 않았다.
“뒷골목에 가서 그렇게 대놓고 정보를 쫓는 티를 내면 안 돼요. 물론 라이칸이 저보다 잘 알지도 모르겠지만…… 여기서는 제가 말하는 대로 하는 걸로 해요.”
우리는 얼마 걷지 않아 뒷골목 입구 근처에 다다랐다.
뒷골목의 입구는 여러 곳이 있었지만, 라이칸이 알고 있는 곳은 한낮임에도 어두 컴컴한 골목이었다.
‘……이건 원작에서도 읽은 기억이 있는 것 같은데.’
여전히 네 번째 원작 내용이 통째로 기억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워낙 좋아했던 소설이었던 덕에 굵직한 전개들은 기억이 났다.
“들어가면 시선이 몰릴 거예요. 그리고 우리를 탐색하는 눈도 있을 거고요.”
“낯선 자를 반기는 곳이 아니니까?”
“그렇죠. 혹시 누가 저희에게 무엇을 사러 왔냐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하는 걸로 해요. ‘파라냐 향수’를 사러 왔다고.”
“……그게 뭔가?”
나는 머뭇거리다가 미약의 일종이라고 알려주었다.
마약이면서 미약이기도 한 일종인데, 네 번째 원작에서 범죄에 이용되었던 물건이었다.
본래라면 리제가 이 범죄를 막으면서 원작 남주랑 더욱 엮이는 이야긴데…….
원작이 끝날 때까지 이 약이 사라지진 않았으니 이야기가 어그러져도 충분히 써먹을 수 있을 것이다.
“……어째서 그런 걸 아냐고 해도 알려주지 않겠지?”
“음, 하늘이 답을 내려주셨다고 말씀드릴 순 있는데요.”
“어느 하늘이…… 미약을, 아니. 아니다.”
라이칸이 뺨을 살짝 붉혔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고는 알겠다고 했다.
완벽하게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사정을 밝혔기 때문일까. 라이칸은 보통 걸고 넘어져야 할 부분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그냥 넘겼다.
나는 생소한 기분이었다.
이렇게 아무것도 묻지 않는 사람은 신선한데, 편하달지. 그래, 아주 편안했다.
나는 항상 모든 메인 퀘스트에서 일부지만 비밀을 숨기고서 사람을 대한다는 부담감에 시달렸으니까.
……이 사람은 그런 나마저 자연스럽게 인정하고 이해해주는 기분이야.
갑작스럽지만 뺨이 달아오를 것 같은 기분에 슬그머니 손을 빼내려고 할 때였다. 라이칸이 먼저 손을 놓았다.
놀라 쳐다보기 무섭게 내 머리 위로 커다란 천이 덮였다. 웁, 하고 고개를 들자, 어느새 라이칸의 망토가 내게 덮여 있었다.
“크기가 너무 크긴 하지만…… 입는 게 좋겠어.”
“네? 아뇨, 이런 건 굳이 입지 않아도…….”
“미안하지만 내가 불편하다. 다른 이들이 그대를 보는 게 싫어.”
“……왜 말만은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하시냐구요.”
나는 툴툴거리며 망토를 썼다. 그가 원하는 대로 시야를 가리지 않을 정도로만 모자도 푹 써주었다.
……아니, 저렇게 날카로운 얼굴이 청초함까지 담아서 보는데 어떡해?
이래서 취향이 무서운 거다. 딱 내 취향의 얼굴이 올망졸망한 눈으로 날 봤단 말이야.
‘이거야 원, 콩깍지가 제대로 씐 쪽은 나 아니야?’
천을 대충 움직이기 편하게 걷고 나서 우리는 출발했다.
하지만 나는 살짝 치솟은 심술을 숨기지 않았다.
“라이칸, 제가 듣기로…… 남성 중에는 애인에게 자신의 옷을 입혀보는 로망을 가진 사람도 있다던데, 당신도 그쪽인가요?”
“……푸흡, 콜록! 콜록!”
아, 사레 걸렸네.
라이칸은 숨을 들이키다가 사레가 걸린 듯 한참이나 기침을 하다 나를 보았다. ‘어떻게 그런 파렴치한 말을……?’하는 듯한 표정이었는데, 그 얼굴을 보니 미안하게도 그를 놀리는 데 더욱 진심이 될 것 같았다.
그가 열심히 자신은 그런 변태가 아니며 오직 순수한 의도로 딴 놈들이 네 얼굴을 보는 것이 싫어서 준 것이라며 주장했다.
나는 싱글싱글 웃으며, 그렇구나아, 하고 웃어주었다. 그럴수록 난감하게 찡그려지는 잘생긴 얼굴이 보기 좋았다.
‘아, 정말로 진심이 되면 안 되는데…….’
나는 라이칸의 손을 꾹 잡아당겼다. 곧 뒷골목에 들어갈 예정이었다.
“라이칸, ‘칸’이랑 ‘라이’ 중에 어느 쪽이 좋아요? 아. 라이가 좋겠어. 귀여우니까요.”
“……가명인가?”
“눈치가 빨라서 좋네요. 나는 음…… 달링은 어때요?”
“……뭐?”
라이칸이 하마터면 또 한 번 사레에 걸릴 뻔한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싫어요? 내 이름이랑 비슷한데, 단 한 사람만 부를 수 있는 호칭인데.”
“……너무 빠르,”
“그래요? 그럼 기회는 다신 없는 걸로.”
“달! ……하아아.”
나는 웃음을 꾹 참고는 그냥 린이라고 불러달라고 했다.
그제야 내가 놀리는 것을 알아차린 라이칸이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지만.
“들어가면, 반말을 쓸게요. 무례는 용서해주기예요?”
“당연한 소릴. 아마, 나 또한 상황에 따라 역할이 바뀔지도 모르겠다.”
역할이 바뀐다니? 나는 의문을 제기했지만, 들어가면 알게 되겠지 싶어 묻진 않았다.
이미 골목길의 입구는 코앞이었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들어가며 살짝 속삭였다.
“라이, 첫 데이트는 공원이 좋겠어요. 나 분수대 보는 거 좋아해요. 잔디밭도요.”
평화로운 시간이라면 다 좋지. 이 세계에서 거의 느끼지 못했던 거니까 말이야.
“…….”
라이칸의 걸음이 아주 잠시 멈칫했다가 함께 걸음을 맞췄다.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지만, 나는 이 침묵이 대답임을 알았다.
곁눈질로 본 얼굴이 생각에 잠겨 있었으니까.
‘……정말 소풍 겸 데이트를 갈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네.’
그때는 래빗도 부를까?
라이칸에게는 일거양득 아닐까. 좋아하는 나랑 좋아하는 여동생인 래빗이랑 세트 메뉴인 셈이니까?
몽글몽글한 상상과는 다르게 눈앞이 점점 깜깜해졌다. 이제는 희미한 빛 아래 건물들의 윤곽만 보였다.
“……위험할지도 모르니 천천히 걷는 것이 좋겠습니다.”
나는 순간 굳었다.
……존댓말?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이 남자 왜 갑자기 존댓말이야?
“아무래도 당신을 ‘호위’하는 사람으로서 염려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라이칸이 나를 보며 느릿하게 앞을 눈짓했다.
……사람이 있다는 건가? 게다가 라이칸이 준 신호를 알아차렸다.
‘아하, 신분을 가장한 척하는 아가씨와 호위 흉내를 내자?’
지금 내가 얼굴을 가린 상황이고, 라이칸의 덩치는 누가 봐도 기사에 적합했으니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 라이칸이 평소 쓰는 말투는 귀족적인 태가 많이 났으니까, 차라리 이런 정중한 기사 느낌 쪽이 나을 성 싶었다.
“걱정하지 마. 나는 강하고, 전보다 더 세진데다가…….”
스킬을 말한 거지만, 스킬 뿐만이 아니었다.
내 몸에서 희미하게 주황빛이 피어올랐다가, 살짝 가라앉았다. 라이칸도 충분히 보았을 것이다.
“아마 난 마법사가 된 것 같거든.”
난 씁쓸하게 웃었다.
라이칸은 한참 나를 바라보다가 살짝 찡그리는 듯했다.
“이상하군, 뭔가 잊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뭐?”
내게만 들릴 듯한 아주 작은 속삭임이었다.
나는 놀라 라이칸을 응시했다.
“……꼭 그대 곁에 마법사가 하나, 아니. 아니다. 이게 중요한 게 아니겠지.”
나는 곧 실망했지만, 한편으로는 놀라웠다.
지금 어렴풋하게나마 발데르를 기억한 걸까? 아니면 잔상?
더 생각해볼 시간은 없었다. 막 우리 앞에 누군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