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화. 4. 회귀자가 회귀를 거부함! (8))
아마 라이칸이 느낀 기척의 주인인 듯싶었다.
“이야, 이 썩은 골목에 웬 사람이래?”
딱 봐도 건달처럼 생긴 야비한 인상의 남자가 나와 라이칸을 번갈아 보며 피식 웃었다. 마치 술에 취한 것처럼 비틀거리고 있었다.
게다가 벽 쪽에는 노숙자인 건지, 기대앉아서 딸국질을 하는 남자도 있었다.
“우린 당신들 뒤쪽에 볼일이 있다.”
“뒤? 여긴 막다른 골목인데 뭘 말하는 거야? 미치셨나?”
“시장이라 하면 알아듣겠나?”
그러자 우리를 빤히 바라보던 건달이 피식 웃었다. 동시에 눈으로 우리를 관찰하듯이 훑었다.
“……형씨들 뭐 좋은 거 사러 왔수?”
말투가 한순간에 변했다.
라이칸이 아무렇지 않게 손을 들어 올렸다.
“파라냐 향수를 사러 왔다.”
“허어?”
그러자 건달이 파하하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이야, 높으신 나리들 사이에도 슬슬 퍼지고 있단 얘기는 들었는데…… 그 정도야? 누가 쓸 건데? 거기 기사 나리? 아니면 저기 귀한 아가씨?”
“닥치고 비키기나 해.”
“에헤이, 궁금하다고, 아! 아니면 둘이 같이!”
건달이 빠르게 몸을 피했다.
그가 있던 자리로는 무언가 날아가 뒤에 있던 장애물에 부딪쳐 떨어졌다. 작은 단검이었다.
“이 이상 내가 모시는 분을 모욕하면 다신 그입을 열지 않게 만들어주지.”
라이칸이 단검을 던졌다 받으면서 말했다. 와, 저런 재주도 있었네. 신기해라.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정석 기사 같은 남자가 저러고 있으니 더욱 신기하게 보였다.
게다가 이런 연기를 한두 번 해본 게 아니라는 듯 호위 역할이 퍽 자연스러웠다.
‘……이렇게 잘하면서 헤벤 저택에서는 대체 왜 버벅거린 거야?’
당연한 의문이 들었지만, 일단 입을 꾹 다물었다.
그 사이 저 건달은 역할인지는 모르지만, 몇 번 더 비아냥거리다가 결국 라이칸에게 맞아서 바닥에 엎어졌다.
“아이고, 아이고, 기사님! 잘못했습니다! 어휴, 이놈의 입이 못 배워먹어 방정이라!”
“길은?”
“뒤로, 뒤로 가시면 됩니다. 아이고, 뒤에서도 잘만 살아남으시겠네. 아야야…….”
각 뒷골목 입구에는 클럽의 가드처럼 문지기 같은 사람들이 지키고 있다던데, 사실인 모양이었다.
나는 우리가 지나가는 동안 아픈 표정을 지우며 라이칸을 뚫어져라 보는 두 남자의 시선을 확인했으니까.
벽에 기대어 자고 있던 노숙자도 한 패였는지, 한쪽 눈만 뜨고 쳐다보더라.
“크으, 거기 아가씨. 조언하자면 부디 원하는 것만 얻고 빨리빨리 돌아가시라고.”
나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라이칸과 함께 안쪽으로 향했다. 조금 전 지나치게 어두운 거리과 다르게 안쪽이건만 더 밝아진 거리가 보였다.
얼핏 보기엔 보통의 거리보다 살짝 어두운 것만 제외하면 평범하게 보이는 거리였다. 간판들에 정보니, 시체니, 암살이니 하는 것들이 적혀 있지만 않으면 말이다.
나는 수없이 많은 간판을 살펴보며 걸었다.
“원하시는 것이 여기 있습니까?”
“글쎄, 더 들어가야겠네?”
거리에도 가게 앞에도 사람이 꽤 있었다. 흥정하는 사람도 있었고, 그저 담뱃대를 물고만 있는 사람도 있었다.
중요한 건 우리가 들어선 순간 모두가 우리를 한 번씩 보거나 뚫어지게 응시한다는 점이었다.
다행스럽게도 공녀 언니에게 배운 것이 있다 보니 우아하고 오만한 귀족 영애의 모습은 어렵지 않게 나왔다.
‘탐색만 할 거라면…… 아무 정보 길드나 들어가면 되겠지만. 내겐 시간이 없어.’
온 김에 모든 것을 알아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중앙으로 쳐들어가는 수밖에.
이 소설, 남자주인공이 있는 가게는 기억하고 있다.
나는 나를 쳐다보는 시선을 무시하면서 쭉쭉 걷다가 한 가게를 발견했다.
‘차이셔스의 풀잎.’ 이름은 정확히 기억나진 않았지만, 풀잎이 들어간 것과 이빨 문양을 쓴다는 건 기억났다.
그러나 들어가려던 나는 멈칫하고 말았다.
‘……폐업?’
문에 새빨간 페인트 같은 걸로 ‘X’자가 그여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딱 봐도 불길함을 느끼게 하는 표식이었다.
게다가 제국어로 적혀 있는 폐업이라는 글자까지.
이곳에서도 폐업을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건 둘째치고…… 어째서 문을 닫은 거지?
남자주인공이 운영하는 길드는 원작이 끝날 때까지 없어지지 않는다.
당연했다. 주인이 이 뒷세계 경제를 움직이는 사람인데?
왜 이렇게 적혀 있는 거지. 이것 또한 리제의 무한 회귀가 끼친 영향력일까?
내가 문 앞에 덩그러니 서 있자, 라이칸이 나를 보는 것 같았다.
동시에 근처에 있던 사람이 말을 걸어왔다.
“흐응, 거기 아가씨. 뭐 그 가게에서 찾는 거라도 있나?”
고개를 돌리면 옆 가게 주인인지 벽에 기대 나를 보는 중년 남자가 보였다.
입가엔 담뱃대를 물고 있었는데, 씩 웃는 이빨이 몇 개 없었고, 몇 개는 금니였다.
“이 가게는 어떻게 된 거지?”
“뭐야, 소개해준 사람이 있나 보네? 최근 이야기는 못 들었나?”
“최근 이야기?”
가게 주인이 내 앞에 있는 문을 고갯짓했다.
“저기 어떤 미친 여자가 나타나서 엉망으로 만든 뒤로 폐업했어.”
“……미친 여자?”
“어후, 엄청난 미친년이지. 나타나자마자 여길 뒤집어 버렸으니까.”
할 일 없는 건지, 다른 사람들도 어슬렁어슬렁 걸어와 말을 얹었다.
“뭐야, 뒷골목 미친년 얘기야? 내 얘기도 해주지 그래.”
“우리 애들 흠씬 두들겨 맞은 얘기도 해야 돼.”
“난 데리고 있던 마약상 애들 싹 털려서 신고당했다고. 걸리기만 해봐, 그 머리를 확 그냥.”
그들은 입을 모아 어떤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저들이 당했던 것을 풀어놓았다. 지금 내가 가려던 가게를 엉망이다 못해 폐업하게 만든 것도 그 여자라면서.
나는 그 여자가 누구인지 익히 짐작할 수 있었다.
‘리제.’
리제가 남자주인공의 길드를 엉망으로 만들었다고?
이 길드는 겉으로는 조그만 길드로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이 뒷골목을 지배하는 중심이자 남자주인공이 주인이면서 그의 수하들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주인공인 리제 또한 이 길드와 먼저 엮이고 남주와 더 엮이기도 했고 말이다.
……리제가 직접 길드를 망쳐버렸다면, 남자주인공은 어디로 간 거지?
“그럼 이 길드 주인은 어떻게 됐지?”
“주인? 아, 시몬 이야기인가?”
“걔 죽지 않았어?”
“죽었겠지. 그 미친년이 얼마나 찾아다녔는데.”
나는 신음을 꾹 참았다. 잠깐잠깐.
‘세 번째 이야기에서 세계의 오류가 남녀 주인공을 죽인 거야 어찌저찌 이해했다고.’
그런데, 뭐. 설마하니 이번엔 여자 주인공이 남자주인공을 살해했다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마주한 건 아니지?
남자주인공의 이름은 시몬.
이 조그만 길드의 주인이자 평소에는 헐렁하게 보이던 청년이지만 사실은 뒷세계의 왕이라는 설정이었다.
암살에 능하며, 무력으로는 어디서 꿀리지 않는 인물인데…….
‘그렇다고 요정이 끔찍한 강자라고까지 말한 리제를 이기진 못했겠지.’
만약 정말로 남자주인공을 처단한 거라면 말이다.
그렇다면, 왜? 리제가 정말 이 시몬을 죽이거나 혹은 쫓았다면 어째서 해코지하려 했나?
의문만 남긴 채 이 골목에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물론 안으로 더 들어가서 남자주인공의 본 저택이 있는 곳을 방문할 수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리제를 만나는 게 급선무였다.
그 애에게 물어볼 것이 더욱 늘어났다.
‘일단 카사블란 상단으로 당장 돌아가야겠어.’
오늘은 꼭 그애를 만나야 한다.
그런 생각에 라이칸의 손을 잡고 눈짓하고는 얼른 걸었다.
뒤에서 한가한 가게 주인들이 나를 붙잡는 것 같았지만, 돌아볼 겨를은 없었다.
그렇게 열걸음 정도 걸었을까, 내 허리로 단단한 팔이 감기더니 시야가 홱 움직였다.
[경고! 경고! 요정이 경고해요!]
정신 차려 보니 나는 벽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나는 푸르른 창을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뭐지?
시선을 드니 라이칸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한 팔로 나를 끌어안은 채로 나와 함께 벽에 기대어 있었다.
아무래도 가게 사이에 있던 골목으로 들어온 것 같은데, 갑자기 왜?
게다가 갑작스럽게 등장한 요정의 창도 마음에 걸렸다.
“라이?”
“……쉿, 무언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나만의 로판’ 기능이 활성화됩니다!]
[인물 ‘라이칸’이 ‘탐지’ 스킬을 발현했어요!]
나는 새롭게 나타난 요정의 창에 눈을 깜빡거렸다.
나만의 로판 기능? 이게 갑자기 왜…….
“이런 말 정말 이상하다만…… 꼭 당장 숨지 않으면, 그대와 내가 죽을 것만 같은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라이칸의 한마디에 솜털이 쭈뼛 서는 순간이었다.
“어이, 시몬?”
“이야, 시몬, 살아 있었냐?”
익숙한 목소리, 조금 전에 우리에게 말을 걸었던 가게주인들의 목소리였다.
그제야 우리가 조금 전에 있던 공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숨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시몬, 어떻게 된 거야? 네 길드는 어떻게 된 거고? 정말 그 미친년이 널 죽인 줄 알았잖아?”
적극적인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이윽고 느릿하고 차분한 목소리를 들었다.
“아아……. 그러게. 그녀가 나를 찾아오기는 했지.”
귀를 오싹하게 만드는 목소리였다.
[축하합니다! ‘세계의 오류’ 본체를 찾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