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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244화 (244/281)

◈244화. 4. 회귀자가 회귀를 거부함! (9)

세계의 오류? 순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왜 그 이름을 여기서 보게 되는 건데? 왜?

이제껏 여러 반전이 있어 왔지만 이것만 한 반전은 처음이었다.

사람은 너무 충격적인 소리를 들으면 잠시 아득해진다더니. 주인공들이 죽었을 때가 제일 충격이었다면 이 순간 느끼는 충격은 이것보다 더했다.

‘……네 번째 원작의 남자주인공이 세계의 오류라고?’

헤벤 저택에서 이사야 후작의 몸이 흐물흐물해지며 사라지는 순간을 떠올렸다.

이사야 후작 행세를 했던 걸 떠올리면, 세계의 오류는 몸을 옮겨다니면서 그 몸의 주인인 척 행세를 할 수 있는 거라는 결론이 나온다.

게다가 요정은 ‘본체’라고 이야기했지.

그렇다면 저기서 가게 주인과 대화하고 있는 세계의 오류는 이렇게 표현해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세계의 오류 본인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진짜 남자주인공은 어디 갔지? 이건 영혼의 결합인가? 아니면 영혼이 사라진 몸에 세계의 오류가 자리를 잡은 걸까?’

수많은 가정이 스쳐갔지만 분명히 알 수 있는 건 하나였다.

‘리제는 시몬을, 남자주인공을 노리고 있다고 했어.’

이미 리제는 세계의 오류를 증오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는 즉, 시몬을 해치우면 된다는 소리가 아닐까.

요정이 원하는 것도 저 존재를 이 세계에서 없애버리는 거였잖아?

하지만 등골이 오싹한 기분이 여전했다.

저 본체는 생각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나는 이제야 이 원작이 틀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를 명확히 파악했다.

‘……리제가 무한회귀를 해서가 아니었어. 아니, 이것만이 이유가 아니었던 거야.’

모든 이야기를 망쳐버린 주범, 세계의 오류가 남자주인공의 몸을 차지했는데 원작 이야기가 그대로 지속될 수 있을 리가 없지.

나는 얼굴을 가로막고 속으로 신음을 내쉬었다.

네 번째 메인 퀘스트가 앞선 메인 퀘스트처럼 틀어진 원작을 바로 잡는 쪽이 아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세계의 오류가 남자주인공 자리를 차지한 마당에 이런 퀘스트를 받았다면? 어떻게 돌리면 좋을지 상상도 가지 않았으니까.

목적은 달성했다.

‘리제는 여기 없어.’

가게 주인이 이야기하는 걸 봐서는 리제는 줄곧 남자주인공인 시몬을 노려왔다. 그런데 저 남자가 여기 멀쩡히 있는 걸 봐서는 리제가 이 자리에 없다는 소리였다.

역시 카사블란 상단 안에 있었던 걸까? 그곳에 있지만 나를 쫓아냈던 거고?

‘아마 그렇지 않을까 싶은데…….’

어쩐지 나의 직감이 이곳으로 오라고 외치고 있더라니. 리제가 이곳에 있어서 그랬던 줄 알았지만 저 세계의 오류를 보라고 경고를 울렸던 모양이었다.

나는 내 허리를 감싸안고 있는 라이칸의 얼굴을 보았다. 그러고는 다른 길 쪽을 눈짓했다.

……끄덕. 라이칸은 어째서인지 다른 토를 달지 않고 내 눈짓에 끄덕였다.

우리는 다른 길을 에돌아 나가서는 길을 물어서 다른 출구로 나왔다.

‘우리가 방문했단 사실은 세계의 오류 귀에도 들어갈 거야.’

우리 신분이 당장은 노출되지 않았지만, 라이칸이 따로 외양을 숨기지는 않았으니 들키는 건 시간 문제일 것 같았다.

다른 출구도 골목길이었다.

우리는 조금 커다란 골목으로 나와 걷다가 우리가 만났던 거리에 이르렀다.

그간 나는 생각에 빠져 있었고, 라이칸은 어떠한 말도 걸지 않았다.

“달린.”

주변은 여전히 한낮이었다. 비교적 대로로 나온 탓에 거리에는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우리는 안전한 곳으로 나왔지만, 정말로 안전해졌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조금 전 시몬을 보았을 때 느꼈던 저릿저릿한 감각이 여전히 있었던 탓이다.

“괜찮은가?”

“네……. 저는 괜찮아요.”

일단은 어떤 해코지도 없었으니까. 물론 현재 시몬의 탈을 뒤집어 쓴 세계의 오류와 마주쳤으면 어땠을지 알 수 없지만 말이다.

“혹시, 마지막으로 봤던 남자가 누군지 아는가? 어쩐지 그대는 알고 있는 것 같아 묻는다.”

“……‘시몬’이라 불리던 남자 말인가요?”

“그래.”

라이칸이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향했다.

자세히 보면 라이칸 또한 나처럼 저릿저릿한 감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는지 염려 섞인 시선이 엿보였다.

“네, 알아요.”

잠시 망설였지만 굳이 숨길 필요는 없는 사실 같았다.

무엇보다 라이칸에게 될 수 있는 한 숨기고 싶지 않았고, 이건 긴다고 해서 라이칸이 영원히 모를 사실도 아니었다.

“시몬, 그 남자는 이 제국의 뒷세계를 모두 쥔 남자예요. 암흑가의 수장이죠. 혹시 검은 날개를 알아요?”

“……들어본 적 있다. 범죄 단체 아닌가?”

“네. 그리고 뒷골목의 질서를 맡은 단체기도 하죠. 그들의 수장이 아까 본 그 남자예요.”

라이칸의 표정이 더욱 심각해졌다.

“일개 단체의 수장이라고 하기에는 그 기운은…….”

평범한 인간의 기운이 아니었다고 말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건 나도 공감했다.

‘대체 근본적으로 세계의 오류란 뭘까?’

요정놈들이 자신의 적이 세계의 오류이며, 그놈에게 대항하기 위해 나를 불러왔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이상한 놈이죠? 저도 느꼈어요.”

여전히 그놈의 정확한 정체가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다.

“……혹시 그대가 이번에 받은 계시라는 게 그 남자를. 음.”

“해치우는 거냐고요?”

라이칸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끔찍한 기운을 함께 느끼더니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모양이었다.

나는 대답 없이 웃을 뿐이었다. 더는 내가 줄 수 없는 정보란 걸 알았으니까.

라이칸은 암묵적으로 대답을 들었다는 듯 더욱 무섭게 표정을 굳혔다.

“……어떡하죠? 빠르게 빠져나오느라 라이칸이 바라는 정보는 조사하지 못했잖아요.”

“아니, 괜찮다. 그런 자를 만났는데 가능할 것 같진 않군.”

어지간히 강한 존재감을 심어준 모양이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라이칸, 저는 이쪽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마차가 있어요. 조금 피로해서 돌아가려 하는데, 라이칸은요?”

“나는…….”

라이칸은 나를 바라보며 망설이는 표정을 지었다.

왜일까. 나와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해 보이는데 동시에 아쉬운 마음에 가득해 보였다.

“가봐야 할 곳이 있다.”

“가봐야 할 곳요?”

라이칸이 끄덕였다. 처음부터 오늘은 뒷골목 외에 한곳을 더 갈 작정이었다고.

“같이 갈까요?”

“아니, 조금 험한 곳이니 그대는 이대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 나야말로 데려다주고 싶은데 괜찮겠나?”

“괜찮지 않을 일이 뭐가 있겠어요.”

나는 웃으며 함께 걸었다.

걸으면서도 앞으로 어떡하면 좋을지 한참 생각하는데 어느 순간 손등에 톡톡 무언가 닿는 기분이 들었다.

뭔가 싶어 슬그머니 고개를 내린 순간 부드럽고 단단한 것이 내 손을 잡았다. 라이칸의 손이었다.

어머나, 하는 마음으로 고개를 들면 평소와 다르지 않은 표정으로 시선만 피하는 라이칸의 모습이 보였다.

애써 시선을 피하면서도 손은 꼬옥 잡는 것이 귀여워 나는 작게 웃음을 참았다.

어쩐지 이대로 웃음을 터트려버리면, 이 남자가 손을 놓아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으니까.

‘따뜻하다.’

머지않아 내가 세워둔 마차가 윤곽이 보일 즈음 우리는 걸음을 멈췄다.

“여기까지 데려다주셔도 돼요.”

나는 망토를 벗어 라이칸의 손에 쥐여 주었다. 라이칸은 염려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응시했다.

“……조금 전보다 안색이 조금 창백한데 괜찮나?”

“아, 제가요? 으음? 저는 완전히 멀쩡한데.”

나는 싱긋 웃었다.

이 남자의 눈에는 내가 기본적으로 너무 가냘프게 보이는 게 아닐까? 항상 내 건강을 염려해주었던 사람이었으니까.

“아, 황성으로 돌아가시면 래빗 황녀님에게 안부 전해주세요. 한동안은 바빠져서…… 조만간 찾아가겠다고, 전달 가능하실까요?”

“그러지.”

래빗을 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 네 번째 메인 퀘스트의 기한이 아주 악독했다.

아마 남은 시간은 리제에게 몽땅 투자해야할 것이다.

‘사실 시간만 있다면 데이트도 가보고 싶은데 말이지…….’

나는 라이칸을 보냈다. 그가 완전히 멀어져 사라지기를 기다렸다가, 그 자리에서 한숨을 쉬었다.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지.

이미 나와 라이칸을 본 듯 호위기사들이 나를 향해 인사를 까딱했다.

나는 그들에게 더 기다리라는 손짓을 하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내가 향한 곳은 카사블란 상단이었다.

이미 몇 시간 전 갔던 곳이기에 위치는 알고 있겠다, 어렵지 않게 도착했다.

“어서오……, 아가씨는 조금 전에 방문한 사람 아니요?”

1층 창구에 앉아있던 사람이 미간을 찡그렸다.

“어쩐 일로 다시 오셨소?”

“리제를 보길 원해.”

“아, 몇 번을 말해? 그런 여자는 여기 없다니까?”

창구에 앉아있던 사람이 짜증을 냈다.

이미 조금 전에 여기 도착해 한바탕 실랑이를 했다가 날 쫓아냈었으니 짜증날 법도 했다.

어디까지나 결백하다면 말이다.

“그럼 바꿔 말할까? 여기 상단주를 만나게 해줘.”

“허? 우리 상단주님이 한가한 줄 아쇼? 아까도 말했지만 그건 미리 약속한 사람이 아니면 불가능해. 무엇보다 우리 상단주님은 여자가 아니거든?”

“아닌 척하는 건 아니고?”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의아하다는 듯이.

“여기 제일 높은 층에 상단주실이 있지? 거기에 여성 실루엣이 비치던데?”

“……그건, 아가씨가 잘못 봤겠지. 허, 자꾸 헛소리할 거면 썩 물러나.”

노련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미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럴 땐 이렇게 말해야지. 이곳 건물에는 아주 고난도의 마법이 걸려있어서 밖에서는 안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이야.”

아주 잠시지만 창구에 앉아있던 사람의 표정이 굳었다. 정말 찰나였으나 알아보기엔 충분했다.

“허? 이제 미친 소리까지 하네. 썩 나가쇼! 당장 호위 병사들을 불러 내쫓는 수가 있어!”

리제의 잘못은 아니었다. 이 사람은 훌륭한 연기자였지만 내가 모든 것을 눈치챘을 뿐.

나는 생긋 웃었다.

“미안하지만 그건 어렵겠어. 나도 그냥 다시 온 건 아니거든.”

내가 말을 마친 동시에 1층 창구에 있던 물건이 두둥실 떠올랐다. 깃펜, 양피지, 심지어 무거운 화분조차도.

“내가 어째서 마법이 걸린 창문을 알아봤을까. 정답은 내가 마법사이기 때문이야.”

“……다, 다, 당신 대체 무슨 짓을.”

중력이 사라진 것 같은 풍경 속에서 나는 창구의 담당자를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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