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5화. 4. 회귀자가 회귀를 거부함! (10)
“시간이 없어서 말인데, 여길 엉망으로 만들고 싶지 않다면…… 내 친구에게 그만 나와달라고 해주지 않겠어요?”
나는 말투를 바꿔 말을 높였다.
그리고 말 뿐만이 아니라는 듯 화분을 붕붕 움직였다.
“나는 이미 모든 걸 알고 여기 온 거거든요. 리제에게 꼭 전해주세요. 널 보고 싶다고.”
“…….”
“이건 그냥 단순한 협박이 아니에요.”
물론 진짜로 엉망으로 만들 생각은 없지만 진짜처럼 말하는 게 중요하다. 그래야 리제가 나설 테니까.
나를 빤히 쳐다보던 창구 담당자가 주춤 물러나더니, 곧 계단으로 가는가 싶더니 사라졌다.
나는 홀로 남아 작게 숨을 내쉬었다. 둥실 떠오른 물건들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발데르의 마력으로 이런 것도 가능하구나.’
혹시 몰라서 해본 건데, 이제 발데르가 했던 능력은 웬만하면 가능한 것 같았다.
게다가 스킬을 쓰면 훌륭한 검사가 되니 이제 무력 쪽은 웬만해선 죽지 않을 정도가 된 것 같았다.
‘요정은 나를 먼치킨으로 만들어 어디에 쓰려는지 무서울 지경이지만.’
이러다가 나중엔 거대한 해일을 앞두고 막으라는 소리라도 하는 거 아니야?
[요정이 자신은 그렇게 극악무도하지 않다고 주장해요! ˚‧º·(˚ ˃̣̣̥⌓˂̣̣̥ )‧º·˚]
나는 헛소리를 하는 요정의 창을 읽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헛소리였다.
곧 기다렸던 사람이 나타났다. 나는 반가운 얼굴을 보면서 생긋 웃었다.
“리제!”
“…….”
리제가 나타났다.
‘이렇게 바로 나타날 줄은 몰랐는데, 의외인걸.’
사실 창구 담당자를 좀 협박한다고 나타나진 않을 것 같았다.
중간 관리자 혹은 바지 사장이 나타나고 그들을 다시 한번 협박을 해야 나오려나 싶었는데.
그렇지 않아도 시간이 모자란 판국에 이렇게 빠르게 나타나줘서 감사할 지경이었다.
물론 리제의 표정은 나와 다르게 전혀 반갑지 않다는 표정이었지만.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거지?”
이제는 말투마저 더 딱딱하게 변했다. 나는 아쉬움을 느끼면서도 그저 웃었다.
“네가 알려줬잖아. 카사블란 상단.”
“…….”
“리제, 나는 눈을 뜨고 네가 한 말은 하나도 잊지 않았어.”
리제가 아주 잠깐 멈칫했다. 그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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얌전히 양손을 들어 올렸다. 항복한다는 듯이.
리제는 나를 노려보더니, 등을 돌렸다.
“……따라와.”
살벌한 어조였다. 으음, 리제는 정체를 들킨 이후로…… 많이 날카로워 보이네.
‘아니면 이게 원래 모습인 걸까? 내게 줄곧 보였던 다정한 모습은 연기고?’
그런 것 같았다.
무한 회귀로 몸과 정신이 피폐해졌다. 하지만 유일한 친구인 달린 앞에서는 처음의 다정한 모습을 유지하려 애쓴다.
……달린만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친구가 죽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속으로 무거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곧 나는 작은 방에 안내받았다. 창문이 있기는 했지만 상당히 음산한 느낌이 드는 방이었다.
‘……어째 기대했던 응접실이 아니라 취조실에 가까운 느낌인데?’
리제는 자리에 먼저 앉아 나를 응시했다.
“앉아.”
나는 주춤 앉으면서도 연신 주변을 보기 바빴다.
장식장도 없고, 있는 것이라고는 테이블과 의자뿐인 방이라니. 역시 이거, 아무리 봐도 취조실이잖아?
“……나 이대로 감금당하는 거 아니지?”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리제가 찌푸렸다. 그러더니 방을 한번 훑고는 아, 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어서 표정으로 불쾌함을 드러냈다.
“이 건물에서 가장 안전한 방으로 데려왔을 뿐이야. 엉뚱한 상상 하지 마.”
아, 안전한 방. 내 얼굴이 묘해졌다.
……이야기 하나 나누는 데 안전한 방 운운하다니.
그건 꼭 네가 그간 안전하지만은 않은 삶을 살았다는 이야기로 들리잖아.
“……엉뚱한 상상이나 하는 건 달린이랑 똑같군. 어설프게 흉내 내지 마.”
게다가 진짜 달린 쪽도 상상력이 풍부했던 모양이다.
전에 리제의 기억을 엿보면서 느낀 거지만 진짜 달린은 신기할 정도로 나와 말투, 미세한 몸짓이나 버릇 같은 것이 비슷했다.
나는 굳이 그 부분을 짚지 않았다. 그저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나 진짜 달린인데? 하는 표정으로다가.
“달린이 마법을 쓴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 이제는 숨길 생각조차 하지 않는구나, 너?”
응, 너는 모를 수밖에. 사실 나도 내가 마법을 쓸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거든.
“어쩌다 쓸 수 있게 됐어.”
“하, 어쩌다?”
“응. 신기하지? 마법이란 게 하루아침에 가능한 능력이 아닌데, 이렇게 갑자기 쓸 수 있는 걸 보면 내가 정말 계시를 받은 사람처럼 보이지 않아? 어때, 더 믿기지.”
내가 싱글 웃으며 양 손바닥을 펼쳤다.
아주 잠시 테이블이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리제는 이제 기가 차다는 표정이었다. 내가 이렇게 대놓고 말할 줄은 몰랐다는 듯이.
나는 그런 리제를 일깨우듯 말했다.
“너도 이미 알고 있잖아. 이번 회차는…… 네가 겪어온 앞선 모든 회차와는 다르다는 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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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한 회귀를 거쳐온 이 애는 결코 바보가 아니었다. 오히려 지나치게 똑똑한 축에 속할 것이다.
그러니 논리적으로 따져볼수록 내가 한 말에 신빙성이 실리겠지.
‘아니면 나를 더욱 의심하게 되거나?’
다행스럽게도 신뢰도가 오른 걸 봐서는 리제는 내 말을 믿기 시작한 것 같았다.
“내가 이전과는 다르게 이런 힘들을 가지게 된 건 다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서야. 리제.”
여기까진 말해도 괜찮나? 아슬아슬한 기분이었다.
돌려 전할 경우 어디까지 언급해도 좋을지 모르니 지뢰밭을 걷는 심정이었다고 할까.
“말했듯이 주범을 무너트리기 위해서 말이야.”
리제의 눈썹이 치솟았다. 나는 친구의 예쁜 얼굴을 보면서 말을 이었다.
“혹시 이사야 후작을 알아?”
리제가 남자주인공 시몬을 제거하려 했다는 것은 조금 전 뒷골목에서 들어 익히 알게 됐다.
그 이유는 아마 시몬이 자신을 이렇게 만든 세계의 오류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 테고.
그 남자만 죽이면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올 거라 믿고 있지 않을까?
하지만 과연 세계의 오류 분신의 신분까지 알고 있었을까?
“이사야 가문의 주인을 말하는 건가?”
“응. 혹시 알아?”
“그 자가 왜 나오는 거지? 따로 친분은 없어. 그저 멀리서 봤을 뿐.”
몰랐구나. 나는 깨달았다.
“그 자는 네 운명을 망쳐버린 주범이랑 동일 인물이야.”
“뭐?”
“그 ‘존재’는 사람의 몸을 빼앗을 수 있는 것 같은데, 맞아?”
남자주인공 시몬이 처음부터 세계의 오류이진 않았을 테니까.
내 추측이 맞았는지 리제가 대답하지 않았다. 긍정의 침묵이었다.
“이사야 후작은 그 자의 분신이야. 그리고 나는 그간…… 다른 계시를 수행하면서 그 자와 마주쳤어.”
북부 영지에서 만났던 건 왜곡된 시간에서였기에 설명할 수 있는 건 세 번째 메인 퀘스트에서 마주쳤을 때의 일 뿐이었다.
나는 리제에게 이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내 말이 이어질수록 리제의 표정은 분노가 떠오르기도 허탈함이 떠오르기도 했다가, 뒤로 갈수록 표현할 수 없이 복잡해졌다.
“……그놈이 분신으로 다른 피해자도 만들었다고?”
그놈 때문에 휴고에게 광증이 생겼으니 그렇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언급한 건 헤벤 공작가에서 있었던 일이니, 내가 빠르게 막아 결과적으로 피해자는 없다지만.
‘놈은 세 번째 이야기의 남녀주인공을 이미 죽인 뒤였어.’
나는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내가 발견했을 때, 이미 죽은 자들이 있었어.”
“…….”
“나는 같은 피해자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어. 그리고 추가적인 피해자는 없었지만.”
이건 말할 수 있을까?
“그 과정에서 동료 같은 사람을 잃어야 했어.”
리제가 가만히 나를 응시했다.
마치 뚫어져라 쳐다보면 내 말의 진실 여부를 알 수 있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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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제 너처럼 소중한 친구가 될 수도 있던 사람을 잃었지만…… 대신 더 많은 피해자를 막을 수 있었지.”
헤벤 공작 가에서 있었던 파티를 생각했다.
내가 세계의 오류가 계획한 음모를 저지하지 않았다면 그날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앞으로 더 생길지도 모를 피해자를 막을 거야.”
다음 타겟은 리제다. 세 번째 이야기에서 저지당한 세계의 오류는 이 이야기에서 움직일 것이다. 무슨 수를 쓸지 몰랐다.
“그리고 네가…… 그간 이렇게 힘들었는데도 몰라줘서 미안해.”
나는 또박또박 말했다.
“나도 한 가지 묻고 싶은데……. 괜찮을까?”
“……뭔데.”
신뢰도는 보지 못했지만 내가 들어도 확연히 누그러진 목소리였다.
여전히 나를 노려보고 있었지만 들려오는 목소리에서 희망을 가졌다.
“조금 전엔…… 뒷골목에 다녀왔어. 온갖 것을 살 수 있는 암흑가에 말이야.”
“뭐?”
리제가 상체를 일으켰다. 나를 연신 훑는 기색이었다.
마치 내가 다친 곳은 없는지 보면서도 누그러진 시선은 온데간데없이 의심하는 낯이었다.
의심과 애정이 공존할 수 있을까?
그런 질문에 딱 부합하는 얼굴이었다.
“거기서 ‘시몬’이라는 남자를 보았는데……. 이런 얘길 함께 들었어. 그 남자를 사냥하는 어느 미친 여자가 있다고.”
“…….”
“그건, 너지?”
리제는 대답하지 않았다.
네가 맞겠지. 어차피 묻지 않아도 뻔히 알 수 있는 진실이었다.
이걸 물으려고 했던 것도 아니다.
“그 남자는 세계를 망친 주범이지. 난 궁금해. 그 남자와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네게는 무슨 일이 있었길래, 무한 회귀를 하게 된 거야?
그러자 리제가, 하, 웃더니 한 번으로 그치지 않고 하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순간 내 친구가 정신이 나갔나 싶을 정도로 큰 웃음소리였다.
곧 리제가 나를 보면서 미소했다.
“……그놈은 미친놈이지. 자신과 같은 동지를 찾고 있다던데?”
리제의 입술이 꾹 깨물렸다.
“찾을 수 없으니, 자신과 같은 놈을 만들겠다고 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