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6화. 4. 회귀자가 회귀를 거부함! (11)
그 말을 듣는 순간 멈칫했다.
같은 사람을 만든다니? 무엇을? 어떻게?
내 얼굴에 어린 의문을 알아차렸는지 리제는 자세를 바로 했다. 그늘이 진 얼굴로 짙은 피로감이 느껴졌다.
단순히 지금 당장 이 순간이 피로해서는 아닌 것 같아 보였다. 이건 좀 더, 아주 오래 쌓인 듯한 피로감.
리제의 눈이 회상하는 듯 허공을 헤매다가 나를 응시했다.
“넌, 정말 그놈의 분신을 본 게 맞아? 확신해?”
“응. 확신해.”
나는 리제의 눈을 피하지 않은 채 또박또박 말했다.
“난, 네게 거짓말하지 않았어.”
이 말과 동시에 눈 앞으로 푸르른 요정의 창이 떠올랐다.
[신뢰도를 재산정합니다! 회귀자 ‘리델라제’의 빙의자님을 향한 신뢰도가 공개됩니다.
신뢰도: -4 / 100]
무엇이 리제의 신뢰도를 높여준 걸까?
혹시 리제는 거짓과 진실을 구별할 수 있는 걸까?
‘……아주 오랫동안 회귀했다고 했으니, 사람 보는 눈이 발달한 걸지도. 아니면 특별한 능력이 있는 걸지도 모르지.’
리제가 느릿하게 숨을 내쉰 끝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그놈을 처음 만난 건, 두 번째 삶 끝자락에서였어.”
그 순간이었다.
[주의! 특별 보상, 첫 번째 보따리가 발동합니다. 무한 회귀자 ‘리델라제’의 회차 기록이 펼쳐집니다.]
이제 익숙한 새하얀 빛이 터졌다.
눈을 꾹 감았다가 뜨자 난 이번에도 낯선 공간에 서 있었다.
‘이거, 리제와 ‘달린’의 기억을 봤을 때와 똑같잖아?‘
눈 앞에 리제의 모습이 보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조금 전까지 보았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생기가 넘치는 모습이라고 할까.
[현재 무한 회귀자 ‘리델라제’의 2회차 시간입니다]
‘아무래도 리제가 이야기를 할 때마다 키워드가 되어서 직접 보여주는 모양이네…….’
세계의 오류 이야기를 했으니, 아마 그놈과의 기억을 보여주려는 모양이었다.
리제는 경악에 찬 표정이었다.
-너, 넌, 시몬이 아니지?
나는 리제가 바라보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곳에는 까만 피부를 가진 데다 붉은 머리의 이국적인 미남이 빙긋 능글맞게 웃고 있었다.
시몬, 네 번째 이야기의 남자주인공이었다.
-무슨 소리야, 리델라제. 나야, 네가 사랑하는 연인. 시몬.
-거짓말 하지마! 넌, 시몬이 아니야.
리제는 어째서인지 확신에 찬 얼굴로 단호하게 외쳤다. 그러면서 눈앞의 시몬이 왜 시몬이 아닌지를 설명했는데, 그 모습은 내가 소설을 읽으며 상상했던 똑 부러진 주인공의 모습 그대로였다.
한참을 듣던 시몬이 가만히 리제를 응시하더니, 이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 하, 하…… 이런. 이렇게 알아본 ‘주인공’은 처음인데? 큰일이네. 그냥 죽여 버리려 했는데.
-죽여? 뭐야, 역시 시몬이 아니지? 진짜 시몬은 어딨어!
세계의 오류는 빙글빙글 웃으며 제 가슴을 툭툭 두드렸다.
이어서 시몬의 영혼은 자신에게 먹혔으며 자신은 시몬이나 다름없다는 충격적인 말이 흘러나왔다.
리제가 얼이 빠진 사이 세계의 오류가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너, 잘 다듬으면 나처럼 되겠다? 꼭 내 모습과 닮았어.
리제의 눈이 부릅 뜨였다.
-무슨 헛소리야, 당장, 당장 시몬을 돌려줘……!
-괜찮아, 너도 나처럼 되면 날 이해하게 될 거야. 이미 이 세계는 내 손 안에 들어왔거든.
-그게 무슨…….
-한번 해봤잖아? 회귀.
-……뭐?
그 순간 푸우욱, 소리와 함께 리제가 천천히 자신의 배를 내려다봤다.
-간단해. 그걸 더 반복하면 돼. 나처럼.
뚝뚝 흘러 떨어지는 피의 흔적이 흡사 눈물처럼 보였다.
리제의 뺨으로도 눈물이 뚝 흘러내렸다.
-시몬……. 시몬은……?
-아, 걔? 아마 다시 못 볼걸. 내가 바로 시몬이니까.
칼이 등 쪽으로 쑥 빠져나왔다.
-넌 과연 나처럼 될 수 있을까?
세계의 오류가 리제를 보며 씩 웃더니 칼을 뽑아 들었다.
리제의 두 번째 삶은 그렇게 끝났다.
하지만 곧바로 회귀한 리제는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연이어 삶을 살았다.
이제 그녀의 새로운 목표는 시몬을 찾아 이 회귀를 끝내는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리제는 그를 죽이기 위해 배울 수 있는 모든 것을 배웠다.
검, 창, 단검, 암살 방법, 독, 연금술, 하다못해 마법과 정령술까지.
리제에게는 수많은 회차가 있었고, 한 회차에서 실패하면 다음 회차에선 다른 것을 배우고 또 배워서 시도했다.
그러나 리제는 번번이 세계의 오류에게 도리어 살해당했고.
언제부터인가 리제는 이것을 ‘아웃’이라고 불렀다.
그렇게 약 스무 번의 회귀를 했을 무렵, 리제는 점차 지쳐가고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달린’만 찾아가던 어느 회차에서 세계의 오류가 리제 앞에 나타났다.
-이 회귀를 끝내는 법, 알려줄까?
빙글빙글 웃었다. 이사야 후작의 껍데기를 썼을 때 정말 보기 싫은 미소였건만 본체로 보니 더욱 보기 싫었다.
비단 외모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놈의 얼굴은 마치 인간이 아닌 존재가 인간을 흉내 내는 것처럼 본능적으로 불쾌함을 일으켰다.
놈은 이번에 기회를 준다는 듯 리제에게 작게 속삭였다.
-나를 죽이면 돼. 완전히.
리제의 눈이 부릅뜨였다.
그와 동시에 세계의 오류가 찌른 칼이 리제의 심장을 파고들었고 해당 회차는 그 자리에서 종료되었다.
이후, 다음 회차에서 눈을 뜬 리제는 남자주인공 ‘시몬’을 죽이기 위해 나섰다.
[현재 무한 회귀자 ‘리델라제’의 회차는 빙의자님이 나타나기 직전의 마지막 회차입니다.]
그리고 그 시도는……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윽, 머리야.’
리제의 수많은 생을 한 번에 본다는 건 내게도 곤욕스러웠다.
내게 너무나도 소중한 친구가 몇 번이고 죽는 모습을 봐야 했으니까.
‘리제는 이 지독한 날들을 어떻게 견딘 걸까…….’
처참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날들이었다.
리제는 새로운 회차에서 눈을 뜨는 순간부터 자신의 상단을 키우기 위해 애를 썼다.
시몬이 있는 곳까지 닿기 위해선 시몬의 충성스러운 부하들을 처단할 방법이 필요했고, 혼자서는 무리라는 사실을 깨달은 뒤 소설의 내용처럼 상단을 가장한 자신의 세력을 키워 이들을 처리했다.
그렇게 시몬에게 닿을 무렵, 시몬의 손에 또 죽었다.
몇 번이고, 다시 몇 번이고. 수없이 죽으면서도 리제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럴수록 세계의 오류는 즐거워했다.
-아아, 역시 내가 잘 선택한 것 같아.
리제의 증오는 갈수록 커져만 같지만 동시에 지치고 피폐해지는 모습이 함께 보였다.
그저 견딘 것인지, 아니면 만성적인 인내였는지.
마지막 회차에 이르렀을 때 리제는 그저 저 남자를 죽여야만 한다는 의무감으로 가득해 보였다.
‘가장 마지막 회차까지 봤으니 이제 현실로 돌아가는 걸까?’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눈앞으로 빛이 한 번 더 번쩍하더니, 나는 익숙한 공간에 서 있었다.
‘여긴 공원?’
익숙한 공원이었다.
헤벤 공녀와 황태자, 발데르와 함께 갔었던 공원이다.
[현재 무한 회귀자 ‘리델라제’의 66회차 시간입니다.]
여기엔 왜 온 거지?
이미 리제와 세계의 오류의 대결을 무수히 지켜봐왔다.
어떡하면 리제가 이 무한 회귀를 빠져나갈 수 있는지, 그 방법이야 내가 이 세계를 구하는 방법과 일치하기 때문에 더는 볼 것이 없을 거라 생각되는데…….
그리 생각한 순간 나는 리제를 발견했다.
‘리제?’
어째서인지 리제는 벤치에 멍하니 앉아있었다.
산발은 아니지만 아무렇게나 풀어헤친 머리카락, 바지자락 끝에는 풀이 잔뜩 묻어 있었다. 마치 한바탕 싸운 뒤의 모습 같았다. 아마도 세계의 오류와 싸운 게 아닐까?
-저, 괜찮습니까?
그때였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먼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놀랍게도 놀란 표정을 지은 파올로가 서 있었다.
-트리샤…… 영애 맞으시지요?
세계의 오류의 등장으로 이미 원작 내용이 엉망으로 일그러진 지 오래였다.
원작에서 서브남이었던 파올로와는 만날 일이 없어졌다. 아니, 만나더라도 아주 가끔 달린을 방문하다가 마주친 것이 전부인 정도.
리제가 피폐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아, 역시 맞으시군요. 멀리서 보고 혹시나 싶었는데…… 아? 여, 영애?
-…….
리제가 파올로를 눈에 담는 순간 눈물을 뚝 흘렸다.
파올로는 그 모습을 보고서 당황하다가 얼른 주머니를 뒤졌는데, 아무래도 손수건이 없던 모양이었다.
-저어, 정말 실례하겠습니다……!
파올로는 자신의 타이 장식을 벗어 리제에게 내밀었다.
리제가 눈물만 떨어트릴 뿐 받지 않자, 한 차례 더 망설이더니…… 리제의 눈물을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울지 마세요. 영애.
-…….
-혹시, 힘든 일이 있으셨던 건가요?
-……네. 너무, 힘들어요.
가냘픈 목소리에 파올로는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안타까운 표정으로 살짝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저라도 괜찮으시다면, 함께 있어드릴까요?
파올로가 손을 내밀었다.
그와 동시에 그들의 모습이 시야에서 차차 멀어졌다.
조심스레 눈을 떠 보니 다시 현재로 돌아와 있었다.
맞은 편에는 리제가 앉아 있었고, 그녀가 한창 제 이야기를 끝맺고 있었다.
“……해서 난 그놈을 죽일 작정이야. 모두 들은 거야?”
“어? 으응, 어. 모두 들었어.”
어째서 환상의 마지막에 파올로와의 모습이 나타난 거지?
리제가 3회차에서 시몬을 죽이기 위해 나선 이후로 모든 원작 사건은 어그러지거나 사라졌다.
오직 시몬과 관련된 일에만 움직인 탓에 파올로와 엮일 사건들이 모두 지워진 것이다.
그 순간 내 의문에 화답하듯 띠리링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서브 퀘스트가 도착했어요! ˚✧ ҉ ٩(๑>ω<๑)۶ ҉✧༚! ]
[퀘스트(서브)- ‘사랑의 위대함!’
가슴 아픈 무한회귀자 ‘리델라제’의 기억을 엿본 당신!
세상에나, 이를 어떡하면 좋을까요? 무한 회귀에 지친 ‘리델라제’의 정신이 아슬아슬합니다!
한계에 다다른 그녀를 협력자로 만들기 위해서는 힐링이 필요해요! (。>﹏<。)
그것은 바로 사랑!
당신은 사랑의 큐피드가 됩니다.
무한 회귀자 ‘리델라제’를 진정한 동료로 만들기 위해 도와봅시다!
내용: 무한 회귀자 ‘리델라제’를 인물 ‘파올로’와 연결해주기
실패 시, 건강 수치 재등장- 스킬 사용시에 건강 수치를 소모하게 됩니다
기한: 10일
보상: 메인 퀘스트 기한 증가, 무한 회귀자 ‘리델라제’의 정신 안정화, ‘리델라제’의 신뢰도 20([email protected])]
……이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황당한 퀘스트야?